※ The Atlantic에 올라온 Hanna Rosin의 글을 전문 번역 했다.
세명의 아이들이 나무 울타리를 따라 터벅터벅 걸으며, 카니발에서 소리 치는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The Land! 30분 있으면 열려.” 길을 따라 풀로 뒤덮인 광장을 가로질러, 5살의 Dylan은 그의 유모의 앞방에서 창문을 통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30분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보면서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육중한 문이 마침내 열리자, 그 복잡한 곳에서 어떻게 그리 능숙하게 찾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Dylan과 10여명의 아이들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나갔다. “여긴 폐품처리장인가요?” 날 따라온 5살 내 아들, Gideon이 물었다. “그렇지 않단다.” 나도 들은 얘기지만 그렇게 답해줬다. The Land는 북웨일스의 조용한 주택단지의 끝자락에 있는 약 1에이커 정도 되는 놀이터다. 만들어진지 이제 겨우 2년이 됐지만, 이곳에 몇 십년간 있었던 것들이 그대로 있을 뿐 새로운 것은 없다. 땅은 군데군데 진흙이 있고, 한쪽 끝에는 가파른 경사를 따라 시냇가가 있다. 시냇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릴것 같은 크고 색이 바랜 플라스틱 보트가 기슭에 올라와 있다. 놀이터의 중심에는 타이어를 높이 쌓아놓은게 있었는데, 빨간머리 여자아이가 그녀의 친구와 함께 타이어를 냇가로 굴려버리면서 점점 높이가 낮아지고 있었다. 내 아들은 “너희들은 왜 타이어를 굴려넣고 있는거야?”라고 물었다. 여자아이는 “우리가 그러고 싶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아직 아침이었지만, 누군가 이미 코너에 있는 드럼통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늦가을이었고 냉기가 돌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여기 있는 아이들이 불을 붙이는걸 좋아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커보였다. 세 아이들이 유일하게 주변에서 부서지지 않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 아이들은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라디오를 틀었다 -Shaggy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이가 다가왔고 그녀는 장난을 치려는듯 문 옆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몰래 다가갔다). 다른 아이들은 주머니에 막대 사탕과 음료수 캔이 여전히 있는지를 확인했다. 근처에선 두 명의 남자아이가 지저분한 매트리스를 쌓아놓고 트램폴린을 만들어 정신사납게 뛰고 있었다. 놀이터의 반대편에선 십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낣은 나무 침대 여러개를 쌓아 만든 커다란 구조물을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종종 아이들은 나무 침대 몇 개를 헐어버리기도 했다 – 그저 재미를 위해서 말이다. 아니면 새로운 종류의 미끄럼틀이나 요새, 이름을 알 수 없는 구조물을 만들기도 했다. 내일 다시 이곳, The Land에 온다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몇몇 벽이 그래피티로 칠해진 것도 볼 수 있었다. 밝은 색은 없었으며 일반적인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풍경 또한 없었다: 꼭대기에 빨간색 핸들이 있는 빛나는 철제 미끄럼틀이나 틱택토 보드는 없었다; 누구도 떨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노란 시소도 없었다; 아기들을 위한 고무 그네도 없었다. 하지만 낡은 줄에 매달려 물가 너머의 반대편에 사람을 내려줄 수 있는 그네는 있었다. 그네를 충분히 멀리 탈수만 있다면 말이다(그렇지 않다면 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작은 코끼리 인형, 더러워진 곰돌이 푸우 인형)은 무시됐다. 코끼리 인형은 진흙탕 속을 구르고 있었고, 푸우 인형은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보행기에 흥분하고 있었다. 나이든 이웃이 기부한 것이었는데, 아이들은 이걸 스쿠터, 감옥, 철봉으로 썼다.
버몬트의 영화제작자인 Erin Davis가 만든 다큐멘터리 “The Land”의 일부다.
The Land는 “모험이 있는 놀이터(adventure playground)”다. 비록 그 표현이 모험 분위기만을 포착하려 하는 테마 파크를 다소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말이다. 영국에서는 1940년대에 이러한 놀이터가 생기고 유명해졌다. 조경사이자 아이들의 지지자인 Hurtwood의 Marjory Allen 부인이 노력한 덕분이었다. Allen은 그녀가 다큐멘터리에서 “아스팔트 광장”에 몇가지 개성 없는 기구들이 있을뿐이라고 묘사한 (오늘날의) 놀이터에 실망했다. 그녀는 놀이터가 아이들이 옮기고 조작할 수 있는 것들로 디자인되길 원했다. 아이들 스스로 임시적인 구조물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그녀가 가능한 어른들의 감독이 없는 “자유방임적인 분위기”를 독려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정말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스스로 그걸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Allen이 말한 놀이터는 새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런던에서의 문화적 기대감과 일치하기도 했다. 전쟁과 싸우기 위해 자라난 아이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 그들은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는 허세까지 부릴줄 알아야 한다고 기대를 받았다. 오늘날 이러한 놀이터들은 부유한 중산층 부모들의 기준에는 잘 맞지 않는다. 내가 동료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고 있는 비디오를 보여줬을 때, 그들이 나에게 들려준 가장 공통적인 말은 “정신 나간 짓이야.”라는 것이었다. (노동 계급의 부모들은 적어도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터프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통제를 많이 하지 못했다. – 필수적인게 아니었다.) 이게 아마도 세계적으로 이런 모험이 있는 놀이터가 왜 얼마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그리고 the Land와 같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과감한 저항(defiance)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10살짜리 아이가 미국의 놀이터에서 불을 지핀다면, 누군가 경찰에 신고하고 아이는 카운셀링을 받으러 가야 할 것이다. The Land에서는 자발적으로 불을 붙이는 것은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이 곳에는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놀이터직원(playworkers)”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지만, 아이들이 하는 일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The Land의 관리자인 Claire Griffiths는 그녀의 직업이 “목적을 가지고 어슬렁 거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비록 놀이터직원들이 아이들이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들은 놀이터가 문을 열기 전부터 거의 모든 활동에 대한 “위험 이득을 평가(risk benefits assessments)” 해서 바인더를 가득 채운다. (처음 문을 연 이후로 2년간 무릎이 까진 일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들이 쓴 불에 대한 이득을 살펴보자: “친구들과 둘러앉아 사회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고, 친구를 만들고, 주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다. 바라만 볼 수도 있고, 모두가 역할을 담당해서 함께 작업하는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다. 실험을 할만한게 될 수도 있고, 위험을 감수하고 불의 성질을 테스트해 볼 수도 있다. 불의 열과 힘을 이용해 과거의 진화를 다시 경험해볼 수도 있다.” 위험은 어떨까? “불이나 불똥에 화상을 입을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뜻하지 않게 불타는 카드보드나 나무로 서로에게 화상을 입힐 수 있다.” 이 경우엔 이득이 더 크다. 왜냐하면 놀이터직원들이 항상 가까이에서 일어날지 모를 사고를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불에 대한 것을 배울수 있게 그냥 둘 것이다.
“나는 이 카드보드 박스를 불에 던져 넣을거에요.” 한 남자아이가 말했다.
“그러면 연기가 엄청나게 날거라는걸 알거야.” Griffiths가 말한다.
“연기가 있는 곳이라면 불도 있어요.” 아이가 답하면서 박스를 던져넣었다. 바로 연기가 주변을 채우고 눈을 맵게 만들었다. 불 근처에 앉아있던 다른 남자 아이가 기침을 하고 머리를 돌리면서 박스를 던진 아이를 욕했다. 우리는 이걸 “당연한 결과”라고 한다. 비록 우리는 이보다 더 통제된 시나리오조차도 아이들이 하게 둘만한 용기가 거의 없지만 말이다. 대조적으로 The Land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부모들은 아예 오지 않는게 관행이다. 내가 방문했던 날 놀이터에 있는 10여명의 아이들은 스스로 왔다. 7시간 동안 Griffiths와 다른 놀이터직원들을 제외하면 나는 오직 2명의 어른만을 봤을 뿐이다: 한 명은 Dylan의 유모로 Dylan이 겨우 5살이었기에 함께 왔고, 다른 한 명은 지역 낚시 용품점을 운영하는 Steve Hughes로 몇가지 도구를 빌리러 왔었다.
Griffiths는 2006년 지역 주민들에게 놀이터의 제안서를 보여주고,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유롭게 실외에서 노는 것이 건강과 발달 상의 이득을 준다고 말했고, 놀이터가 엉망처럼 보이지만 안전하게 관리될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녀가 호소한 부분은 부모들이 가진 향수에 기반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고, 부모에게 어렸을 때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 그래본적 있지 않으신가요?”라고 물었다. 이게 그녀가 영업에 성공한 방법이다. Hughes는 The Land가 문을 연 이후에 이웃으로 이사왔지만 그가 멈춰섰을 때 나는 그에게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거냐고 물었다. “내가 어렸을 땐, 건강과 안전에 대한 규칙 같은건 전혀 없었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Dee에 가서 헤엄을 치곤했죠. Dee는 근처에서 가장 위험한 강이었어요. 만약 내 부모님이 그걸 보셨다면, 날 당장 물에서 나오게 했을거에요. 하지만 그때는 모든 종류의 장난을 저지를 수 있었죠.”
작가의 5살 아들인 Gideon이 북웨일스의 놀이터인 The Land에서 놀고 있다.(Hanna Rosin)
내 나이대 대부분의 부모와 같이, 나도 내 아이가 자라온 방식과는 아주 다른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종종 내가 이 기억을 미화하고 있는건 아닌지, 아니면 적어도 과장이 들어간건 아닌지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뉴욕의 퀸즈에 있는 6층 아파트와 거의 똑같은 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 친구와 나는 오후 시간대엔 서로 연결된 아파트의 차고에서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며 놀았다. 우리가 연결통로의 문을 발견하고 호기심으로 열어보고 난 후였다. 한번은 내가 9살 때, 내 친구 Kim과 나는 우리보다 어린 한 무리의 아이들을 아래층 문 뒤에 있는 상상의 감옥에 가둬버린적도 있다. 그리고 나와 Kim은 배가 고파져서 몇 블록 떨어진 Alba의 피자가게에 갔고 그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우리가 한시간쯤 후에 돌아왔을 때 그 아이들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 그들은 문을 뛰어넘지 않았다. 심지어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그들 중 몇몇은 화가 났지만, 그 당시엔 아이들 사이의 규칙이 중요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감옥에 있던거라고 말했고, 우리가 꺼내주기 전에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거라고 했다. 투옥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모들의 생각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쓴 글에서 일상적으로 나오는 특정한 통계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곤 했다: 1970년대에 비해서 오늘날의 여성들은 더욱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 아빠들도 –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과거에 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낸다. 최근 내가 내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까지 내가 볼때 이건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그리 많이 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막대한 시간을 썼던것도 아니다. 그녀는 내가 노는 때를 정해주지 않았고, 수영 학원에 차를 태워주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나한테 알려주지도 않았다. 평일 방과 후에 엄마가 나한테 기대했던건 단지 저녁 식사 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주말엔 난 거의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한편 나는 토요일 깨어있는 시간 전부를 내 아이들 셋과 함께 보낸다. 셋 모두와 보내거나 그게 아니라면 한 명과 말이다. 첫째를 축구 시합에 데려다주고, 둘째를 영화 프로그램에, 셋째를 친구집에 데려다 준다. 혹은 집에서 아이들 모두와 함께 놀아준다. 내 딸이 10살이 되었을 때, 내 남편은 딸의 인생을 통틀어서 어른에 의해 감독받지 않고 보낸 시간이 10분 이상이 안 된다는 것을 갑작스레 깨달았다. 10년을 통틀어 10분이 안된다는 것이다.
단지 한 세대만에 아이들의 규범의 얼마나 변했는지를 받아들이는건 힘든 일이다. 70년대에 편집증이라고 생각됐던 행동들 – 3학년짜리를 학교에 데려다준다거나, 아이들이 거리에서 공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다거나,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함께 미끄럼틀을 타는 것 – 이 지금은 일상적인 일이 됐다. 사실 그것들은 이제 책임감 있는 좋은 부모 역할의 지표가 됐다. 영국의 도시, 교외, 시골의 이웃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들의 독립적인 이동성”이라는 한 매우 면밀한 연구를 살펴보면 1971년엔 3학년 아이들의 80퍼센트가 학교에 혼자 갔다고 한다. 1990년엔 이 수치가 9퍼센트로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도 낮다. 당신이 부모들에게 왜 당신의 부모가 그랬던것보다 더 아이들을 보호하려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세상이 자신이 클 때보다 더 위험해졌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과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모든 증거들이 아이들이 낯선 사람에게 유괴될 확률은 한 세기 전과 똑같다는걸(아주 희박하다) 보여준다. 아마 진짜 질문은 ’어떻게 이러한 공포가 우리에게 생겼는가?’일테고, ’우리가 이 공포에 굴복하면서 아이들이 잃은것 – 얻은것도 -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1978년, Frank Nelson이라는 어린 아이(toddler)는 시카고의 Hamlin 공원에 있는 12피트(3.6미터) 높이의 미끄럼틀에 올라갔다. 아이의 엄마 Debra는 몇 발자국 뒤에서 보고만 있었다. 이 미끄럼틀은 3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내려오는 곳이 꼬여 있어서 “토네이드 미끄럼틀”이라고 알려졌다. 아이는 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지 못했다. 대신 난간 사이의 틈으로 떨어졌고,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쳤다. 1년이 지나고 그 아이의 부모는 시카고 공원 관리국(Chicago Park District)과 미끄럼틀을 만들고 설치한 두 개의 기업을 고소했다. Frank는 떨어지면서 두개골에 골절이 생겼고, 영구적인 뇌손상으로 고통받게 됐다. 그 아이는 좌반신이 마비됐고 말하고 보는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의 변호사는 아이가 금이 간 두개골을 보호하기 위해서 평생 헬멧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Nelson의 사례는 잠재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놀이 기구들에 대한 저항에 기름을 부은 그 당시의 여러 소송들 중에 하나다. 클리블랜드 근처에 있는 John Carroll 대학의 소비자 옹호론자이자 안전 컨설턴트인 Theodora Briggs Sweeney는 수십여회의 소송에서 증언을 했었고 놀이터 리폼을 지지하는 대중 운동가가 됐다. “놀이터 게임의 이름은 계속해서 러시안 룰렛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무고한 희생자가 될테구요.” Sweeney가 1979년 Pediatrics에 발행된 논문에 쓴 것이다. 그녀는 많은 것들 – 미끄럼틀의 높이, 난간의 간격, 부품을 이어주는 느슨한 S자 모양의 갈고리의 위험성 – 에 대해서 우려했지만,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스팔트와 흙(dirt)이었다. Sweeney는 그녀의 논문에서 실험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아이들이 낮은 높이에서 떨어져도 머리가 아스팔트에 부딪치면 죽을 수 있고, 3피트(약 1미터)에서 떨어져도 흙바닥이면 죽을 수 있다고 썼다.
그 당시 발행된 연방정부 보고서는 수만명의 아이들이 매년 놀이터 사고로 응급실에 간다는 것을 알아냈다. 결과적으로 미국 소비자 상품 안전 위원회는 1981년 첫 “공공 놀이터 안전에 대한 핸드북”을 발행했고, 여기엔 짧은 일련의 일반적 가이드라인 – 가이드라인이 요구조건에 있는 내용들과 구분되기 위해서 굵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 들이 적혀 있었다. 이 가이드라인이 놀이기구들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어떤 놀이기구의 부품이라도 각이 져 있어서는 안됐고, 아이들의 몸의 일부가 끼일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서는 안됐다. 특히 머리가 끼면 안됐다.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아이들은 독립심의 한계를 넘어서고, 어른들의 공포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압박을 더하기 위해서 Sweeney와 놀이터 안전 컨설턴트인 그의 동료 Joe Frost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일어난 사고로 카탈로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둘은 거의 200회의 소송에서 증언을 했고, 오싹한 사례들을 자세하게 적을 수 있었다 – 몇몇 아이들은 뺑뺑이(merry-go-rounds)에 머리가 끼거나 찌부러졌다; 난간에 걸린 점프 로프에 매달려버린 아이도 있다; 울타리가 없는 놀이터에 오토바이가 부딪쳐 와서 죽은 아이도 있다; 돌이 많은 땅에서 미식축구를 하다가 넘어진 아이도 있다. 그 둘이 함께 쓴 논문에서 Sweeney와 Frost는 1981년 이전에 설치된 모든 놀이기구에 대한 “즉각적인 조사”를 요구했고, 문제가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하라고 했다. 또한 그들은 전국의 놀이터에 중요한 지역을 고무 바닥으로 만들라고 요청했다.
1985년 1월 시카고 공원 관리국은 Nelson 가족과의 소송에 합의했다. Frank Nelson은 최소 950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공원 관리국의 책임 기술자였던 Maurice Thominet는 시카고 트리뷴에 시에서 “모든 놀이기구에 대해 단호하고 냉철한 검사”를 할거라고 말했고, 모든 토네이드 미끄럼틀과 몇몇 다른 시설물들을 제거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 때 당시 독자가 신문에 투고한 내용이 있다:
앞으로도 사고가 일어날까? …
어린 아이가 토네이도 미끄럼틀의 꼭대기에 올라가고 사고가 날 때의 위험을 아이의 엄마가 감수할 수 있을까?
놀이터의 아이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건 누구인가, 공원 관리국인가 부모인가? … 그네가 1살짜리 아이의 머리를 치면, 나는 몇몇 경우엔 끔찍한 결과가 있을거라고 확신하다.
그럼 우리가 그네를 없애야 하나?
하지만 이 글은 사라져 가는 시대의 지나가는 생각이 되어버렸다. Nelson과의 합의가 널리 알려졌을 때 쯤, 전국의 공원 부서들은 새롭게 위험하다고 간주된 놀이기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는 더 이상 소송을 할 여유가 없어서였다. 특히 이제는 소송 당사자가 정부의 핸드북을 공원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증거로 사용했기에 더욱 그랬다. 소송에 대한 기대감으로 보험 프리미엄은 솟구쳤다. 트리뷴의 독자가 직감적으로 알아챘듯이 용인가능한 위험에 대한 문화적인 이해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위험(risk)이 거의 모험(hazard)과 동의어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공식 소비자 제품 핸드북은 몇번의 개정을 거쳤다; 이제는 생산자들을 위한 기술적인 가이드라인들로 보완되었다. 점점 그 기준은 엔지니어들과 기술 전문가들, 변호사들에 의해 제정되어졌고,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의미있는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이는 William Weisz가 한 말로, 그는 몇몇 위원회에서 가이드라인이 변하는 것을 지켜본 디자인 컨설턴트다. 핸드북은 정확한 높이, 경사도, 기구의 거의 모든 부품의 각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고무 바닥이나 잘게 부순 나무 조각은 사실상 요구사항과 다름없다; 잔디와 흙은 “옷과 환경적인 요소가 그것들의 충격 흡수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표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여행을 가든지 이제는 더 이상 놀라운 요소가 있는 놀이터를 찾는게 쉽지가 않다. 아이들은 집 근처에 있는 것과 똑같은 높이에 똑같은 경사도, 똑같은 악세사리를 가진 미끄럼틀을 보게 된다. 나는 워싱턴 D.C.의 Rock Creek 공원 근처에 살고 있고, 공원의 멀리 떨어진 코너 끝에는 우리 이웃들이 잊혀진 놀이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다. 미끄럼틀은 나무 계단이 있었고, 경사각은 아이들이 스피드를 조절해서 흙바닥에 세게 내려오지 않게 연습해야 했다. 더 멋진 것은 독립해 있는 나무집이 땅에서 12피트(약 3.6미터)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곳은 이웃의 아이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계급을 만들어 무리짓는 장소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볼 수 있던 것처럼 말이다 – 작은 아이들은 땅에서 “요리”를 하고 좀 더 큰 아이들은 높은 곳의 집을 차지했다. 하지만 내가 이사 온지 대략 1년쯤 후인 2003년에 공원 관리 부서에서 나무 집을 헐어버렸고 모든 오래된 놀이기구들을 고무 바닥이 있는 조립식 놀이터로 바꿔버렸다. 이제 놀이터는 아주 어린 아이들(toddler)의 관심만 끌 뿐이고, 그보다 조금 큰 아이들의 관심은 끌지 못한다. 아이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모래상자(모래판, sandbox)에서 보냈다; 아마 아이들이 그걸 좋아하는 이유는 이웃사람들이 그 곳을 작은 모험 놀이터로 바꿔놨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사람들은 그곳에 오래된 스푼이나 체, 망가진 장난감 차 같은 것을 던져 놨으니 말이다.
최근에 Sweeney가 한 안전 운동의 오랜 동료인 Joe Frost는 우리가 너무 많이 나갔다는 것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6년 연구에서 두 부모의 소송을 사례로 든다. 그 부모의 아이는 작은 삼나무 숲의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졌는데, 하필 그 곳이 놀이터의 일부였다. 그들은 소송의 기본 요건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신의 안전 핸드북은 디자이너들에게 “노출된 콘크리트 바닥이나, 나무 그루터기, 바위 같은 걸려 넘어질만한 위험물을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성인들은 “아이들은 반드시 모든 부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게 됐다. Frost가 쓴 내용이다. “실제 세상에서 삶은 위험 – 재정적, 물리적, 감정적, 사회적 위험 – 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합당한 위험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안전 강박의 핵심에는 Allen 부인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관점이 들어가 있다. “아이들은 쉽게 다칠 수 있고(fragile), 주어진 상황에서 위험을 평가할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No Fear의 저자이자 위험-회피 사회의 비판가인 Tim Gill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신중을 요하는 물리적이거나 사회적, 감정적인 상황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을 정도로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걸 실질적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보호 장치들 사이에서 잃은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 중반 노르웨이는 놀이터가 특정 안전 기준을 충족해야만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Trondheim에 있는 Queen Maud 대학의 소년기(eary-childhodd) 교육 교수인 Ellen Sandseter는 그녀의 첫 아이를 낳고, 이웃의 놀이터들이 하나하나 무균의 지루한 장소로 변해가는 것을 보게 됐다. Sandseter는 어린 10대와 그들의 위험과 감각에 대한 필요성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그녀는 만약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될만한 방법으로 그러한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몇몇은 더욱 무모한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걸 알았다. 그녀는 놀이터가 더 안전해지고 덜 흥미로워지면서부터 비슷한 역학이 더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아이들은 위험을 알기 위해 감각적인 경험을 할 필요를 느낀다 – 불 근처에서 놀고, 높이를 경험하고,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는 속도로 움직여 본다. (Hanna Rosin)
Sandseter는 노르웨이의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2011년 그녀는 “발달의 관점에서 본 아이들의 위험한 놀이: 소름 끼치는 경험의 안티-공포증 효과(Children’s Risky Play From an Evolutionary Perspective: The Anti-Phobic Effects of Thrilling Experiences.)”라는 논문에 그녀의 결과를 발표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위험과 흥분을 경험하고자 느끼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낀다고 결론내렸다; 이는 아이들이 하는 일이 실제로 위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아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아이들을 겁먹게 하지만, 아이들은 이 공포를 극복해낸다. 논문에서 Sandseter는 위험한 놀이를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1) 높은 곳을 탐험하거나 “새의 시점”을 느껴본다. 그녀는 이렇게 일컬었다 – “공포의 감정을 자아낼 정도로 충분히 높아야 한다.” (2) 위험한 도구를 다뤄본다 – 날카로운 가위나 칼, 혹은 무거운 망치를 써본다. 처음에는 다루지 못하는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은 곧 다루는 법을 배운다. (3) 위험한 것 근처에 있어 본다 – 물가나 불 근처에서 놀아본다. 그러면 아이들은 근처에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4) 거칠고 구르는 놀이를 해 본다 – 레슬링, 싸움 놀이 같은 것들이다 – 그러면 아이들은 공격성을 다루는 법과 협력에 대해 배우게 된다 (5) 속도 – 너무 빠르다고 느낄 정도의 속도로 자전거를 타거나 스키를 탄다. (6) 스스로 탐험해본다.
Sandseter는 마지막 항목을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나에게 “아이들이 혼자 있을 때 스스로의 행동과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결과를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thrilling) 경험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때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 Sandseter는 진화 심리학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들은 놀이에서 위험을 감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위험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생존에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엔 위험으로부터 도망칠수 있는 법과 다른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법,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성장한다는 것은 공포를 다루고 적절한 결정에 도달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위험한 놀이를 함으로서 아이들은 효과적으로 노출 치료에 자신들을 드러내놓게 된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 아이들이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두려움은 공포증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Sandseter는 “아이들이 다칠지 모른다는 우리의 두려움은 더욱 공포에 질린 아이들을 만들고 정신병리학적인 문제를 증가시키고 있다.”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소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녀는 5살에서 9살 사이에 높은 곳에 떨어져 스스로 다쳐본 적이 있는 아이들은 18살에 높은 곳을 덜 무서워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를 인용했다. “높은 곳에서의 위험한 놀이는 (높이에 대한 공포를) 둔감하게 하거나 경험 자체를 익숙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녀가 논문에 쓴 말이다.
우리는 덜 다치는 것의 대가로 아이들이 몇가지 공포증을 더 가지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인 아이러니는 안전에 대한 우리의 밀접한 관심이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사고의 빈도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게 아니라는데 있다. 사람들의 병원 방문을 모니터링 하는 국립 전자 상해 감시 시스템(National Electronic Injury Surveillance System)에 따르면 놀이터의 기구와 집에서 기구들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한 횟수는 1980년에 156,000회였다. 이는 1,452명의 미국인 중 한 명 꼴이다. 2012년에 271,475회였고, 이는 1,156명의 미국인 당 한명 꼴이다. 사망 숫자도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소비자 제품 안전 위원회는 놀이 기구와 관련해서 100명이 죽었다고 보고했다 – 1년에 평균 13명이고, 1980년에 보고됐던 것보다는 10명이 적다. 머리 부상, 들이닥치는 오토바이, 치명적으로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것 – Sweeney와 Frost가 그 때 당시 묘사했던 대부분의 것들은 매우 흔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판정됐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어떠한 안전 보강으로도 예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고무 바닥조차도 실제 세상에서는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Middlesex 대학의 위험 관리 교수인 David Ball은 영국의 부상 통계를 분석했고 미국처럼 시간에 따른 분명한 경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놀이터에 있는 이러한 특별한 표면의 출현은 아이들의 안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적습니다. 무언가 기여한게 있긴 하다면 말이죠.” 그가 나에게 말했다. Ball은 (오히려) 머리 부상보다는 좀 더 흔한 긴 뼈의 부상이 실제로는 증가하고 있다는 몇가지 증거를 발견했다.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이론은 “위험 보상”일 것이다 – 아이들은 고무에 떨어지는 것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고, 부주의해진다. 그리고 결국 더 자주 다치게 된다. Ball은 “문제는 우리가 사고를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아니라 예방할 수 있는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현재 세대의 부모들을 소심하게 만드는 Sandseter의 위험한 놀이 분류는 아이들을 떠돌아다니게 만드는 것이나 어른들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이들은 홀로 걷고 어른들의 눈에서 벗어나 탐험하는것을 좋아합니다.” 그녀가 쓴 말이다. 아이들은 “모르는 장소를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험(risk and danger)을 경험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그러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Sandseter가 인용한 것으로, 9살 이전에 혼자 있어본 경험(separation experiences)을 한 횟수가 18살에 분리 불안 증세와 음의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또다른 증거도 있다. 이는 “‘예방주사’ 효과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놀이터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것과 비슷하게 197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9년 Frank Nelson이 시카고의 미끄럼틀에서 떨어지고 나서 9달 후의 일이다. 6살 된 Etan Patz는 뉴욕 시내의 아파트에 있는 자신의 부모님을 떠나 스스로 학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Etan은 엄마에게 혼자 가게 해달라고 졸랐었다; 자신의 친구들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엄마는 Etan을 혼자서 가게 해줬다. 하지만 그 시대에 뉴욕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그 아이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2012년, 뉴저지의 남자가 Etan의 살인범으로 체포됐다.) 나는 그 당시 대략 10살쯤이었고, 밤마다 뉴스에서 그의 학교 사진을 보여줬던게 기억난다. 또 나는 Etan의 수색을 끊임없이 보도했던 때 즈음에 이웃의 부모들이 처음으로 아이들을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 주는 모임을 조직했던게 기억난다.
Etan Patz의 케이스는 도처에 존재하는 미아의 시대를 열었다. 유괴에 대한 Paula Fass의 연대기와 함께 말이다: 미국에서의 어린아이 유괴라는 책이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우유 만화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Etan이 사라진 날을 미아의 날(National Missing Children’s Day)로 지정했다. 비록 아무도 Etan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가 성적으로 학대 당했다는 설이 만들어졌다; 곧 뉴욕타임즈는 Patz의 케이스가 “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의 만행”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리는거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짧은 기간동안 미국인들은 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널리 퍼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는 새로운 양육 원칙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이 낯선 사람과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Etan Patz의 케이스와 같은 유괴는 한 세대 전엔 극히 흔하지 않은 일이었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David Finkelhor은 아동을 상대로 한 범죄 연구 센터의 소장이고 아동에 대한 유괴와 성적 학대에 대해 가장 믿을만한 권위자이다. Finkelhor은 그의 연구에서 “틀에 박힌 유괴(stereotypical abduction)”라고 불리는 범죄 유형을 구분했다. 이러한 유괴는 뉴스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희생자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거나, 희생자를 50 마일 이상 멀리 데려가는 것, 혹은 희생자가 살해되는 것을 뜻한다. Finkelhor은 이러한 케이스는 극히 드물고 80년대 중반부터는 증가하는 경향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기록을 한 것은 아니지만, 70년대도 그랬을거라고 추측했다. 무엇보다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감소하고 있다. 90년대부터 전체적인 범죄가 감소하고 있는것처럼 말이다. 행복하고 온전한 가족의 아이가 버스 정류장에 가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례는 지금도 하나의 비극일뿐이며, 국가적인 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Finkelhor은 발생이 증가한 범죄 중 하나가 가족 내 유괴라고 말한다 (FBI 범죄 보고서에서 틀에 박힌 유괴와 함께 취급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유괴 사례를 자주 일어나는 사례처럼 만든다.) 70년대 이혼의 급증은 수많은 양육권 전쟁을 촉발했고, 더욱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한쪽 부모에게 몰래 데려가졌다. 만약 엄마가 자신의 아이가 유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가 아이에게 말해야 하는 규칙은 ’낯선 사람과 말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아빠와 말을 하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낯선 사람에게 유괴 당하는 것)과 실제 일어나는 일(가족 내의 싸움과 양육권 전쟁) 사이의 갭은 차차 드러나는 중이다. 1970년대 이후로 변하고 있는 것은 미국 가정의 특성과 사회의 폭넓은 인식이다. 다양한 이유로 인해 – 이혼, 더 많아진 한부모 가정, 더 많아진 워킹맘 – 가정과 이웃 모두가 그들의 결속력을 일부 잃었다. 아마 일반적으로 신뢰가 깨지는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한 더 가까이서 통제하고자 한다 –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아이들에게 말이다.
많은 미국 놀이터와 대조적으로 the Land에 오는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와 함께 오지 않는다.(Hanna Rosin)
우리 부모들이 공공 장소 – 놀이터, 길거리, 공공 야구장, 통학로 – 를 위험한 곳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다른 것들, 작은 일상의 결정들은 틀에 박히기 시작했다. 어떤 부모 집단에게든 아이들의 평상시 한주를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라고 질문하면, 그들은 학교, 숙제, 학원, 정해진 노는 시간, 동료 부모가 지도하는 스포츠 팀, 그리고 아주 적은, 자유롭고 감독되지 않은 시간을 언급할 가능성이 크다. 감독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실제로 양육을 실패하는 것과 동의어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방법으로 놀고 탐험하는 기회가 지속적이고 극적으로 감소하게 됐다.”고 Boston 대학의 심리학자이자 Free to Learn의 저자인 Peter Gray가 썼다. 더 이상 픽업 게임은 없고, 통학길에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도 없으며, 오후 내내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는 것도 없다. 내가 퀸즈에 살 때의 어릴적 문화는 그 문화만의 전통과 결말이 있었고, 특별한 기쁨과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문화는 사실상 사라졌다.
1972년, 영국 태생의 지리학 학생인 Roger Hart는 그의 학위 논문을 위해 특이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뉴잉글랜드 타운의 시골 지역으로 가서 2년간 지역 초등학교에 다니는 86명의 아이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가 “아이들의 지리학”이라 부르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제 지도에 아이들이 어디를 가고 얼마나 집에서 멀리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보통 아이들에 대한 연구는 부모를 인터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Hart는 소스(아이들)에 직접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학교의 교장은 그에게 방을 빌려줬다. 그 방은 나중에 “Roger의 방”으로 알려졌고, 그는 천천히 아이들을 알아갔다. Hart는 아이들에게 매일 그들이 어디를 가고 그 장소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갖는지 질문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아이들과 함께 돌아다녔다. 심지어 지금도 아빠이자 대학 교수인 그는 멋진 장난꾸러기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그를 편안해했고 자신들의 자랑스러웠던 순간과 비밀을 공유했다. 종종 아이들은 그를 어른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장소로 데리고 갔다 – 아이들이 스스로를 위해서 만든 장난감집이나 요새 말이다.
Hart의 방법은 새로웠지만, 그는 그가 무언가 원리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관찰한 것의 상당수는 그 당시에 흔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놀 곳을 만들려고 지형지물을 고쳐나가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논문을 읽어보면 마치 잃어버린 문명과, 지금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자신만의 놀이와 생각, 느낌의 방식을 가진 아이들의 문화를 우연히 마주친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을 스스로 소비했고, 상상속의 지형지물을 그들의 부모 몰래 만들곤 했다. 부모들은 그들이 함께 어울리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은 요새 덕분에 부모들에게 칭찬 받거나 다정한 말을 들은건 아니다. 아이들의 부모는 그걸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도를 보고, Hart는 폭넓은 패턴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2학년과 3학년 사이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범위(free rage)” – 집에 먼저 얘기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는 거리 – 가 현저하게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집이나 야구장에 갈 때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기 때문이다. 5학년이 되면 남자아이들은 특히나 더 “극적으로 새로운 자유”를 얻어 집에 얘기하지 않고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 (여자아이들은 좀 더 제한된다. 여자아이들은 종종 엄마를 도와 집안일이나 심부름을 하고, 어린 동생을 돌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범위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은 포장 도로를 건너가거나 마을의 중심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다 – 성장한다는 신호다. 아이들은 특별한 자신감을 갖고 “어떻게 그 장소까지 가는지를 안다”고 Hart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어른들은 쓰지 않는 지름길을 찾아낸다는 말이다.
Hart의 연구는 BBC 다큐멘터리의 기초가 됐다. 그는 최근 나에게 뉴욕시립대학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한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리버 하우스 (river houses)”라고 부르는 나무가지와 잡동사니들을 이용해 만든 구조물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이 집을 만들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Joanne과 그녀의 동생 Sylvia가 영화제작자에게 자신들이 만든 “집”을 보여줬다. 이 집은 대부분 나무가지에 오렌지와 갈색 종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가구들은 애정과 위트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 예를 들어 TV는 바위 위에 나무상자를 올려놓고 잡지의 멋진 사진을 앞에 붙여놓았다. 전화는 돌에다가 꼬인 전선을 붙여놓은 것이었다.
영화를 찍고 있었기에 여자아이들은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집에 있는 같았다. 머리를 넘기고, 나무상자 앞에 가까이 앉아 어떻게 집을 리노베이션 할지 계획을 짰다. 근처에는 그들의 4살짜리 남동생이 새롭게 추가할 것들을 위해 작은 나무를 손도끼로 잘라내고 있었다. 여자아이들과 그들의 동생은 이곳에서 수년 동안 수백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엄마는 이곳에 와 본적이 없다. 단 한번도 말이다. 아이들이 말하기로는 그녀가 자신들의 발이 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장면에선 각각 6살과 4살로 남매인 Andrew와 Jenny가 침대에 들어갈 최고의 나뭇잎(고사리, fern)을 찾기 위해 수풀을 탐험하는게 나왔다. Jenny는 무릎까지 오는 하얀 양말을 신고, 땋아놓은 머리를 흔들며, 가장 큰 수풀더미(fronds)를 찾아 걸었다. 그녀의 오빠는 그것들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태양이 빛났고 카메라는 아이들을 오래 시간 비춰줬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침대에 만족했을 때, 그들은 함께 침대에 누웠다. “내 고사리 가져가지 말아요.” Jenny가 소리쳤고 Andrew는 혀를 내밀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머릿속에서 부모가 끼어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얘들아 함께 나눠야지. 주변에 많이 있잖니.” 하지만 거기엔 부모가 없었다; 아이들은 지금 몇시간째 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된건 겨우 며칠 후였다. 내가 부모로써 지낸 시간 동안 나는 그렇게 내적으로 집중하고 서로 어울리면서 자신들이 만든 세계에 완전히 열중한 아이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내가 부모로 지낸 시간 동안 부모들이 지켜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만 대부분 만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에 Roger Hart가 연구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유 시간을 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비밀 장소에서 보냈다. (Roger Hart)
2004년, Hart는 후속 연구를 위해서 같은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이 만났던 아이들 중에 여전히 마을에서 100마일 이내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을에 살고 있는 다른 아이들 몇을 추적하는 일도 목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도착한 첫째날부터 그는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는 연구를 할 수 없다는걸 알게 됐다. Hart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자아이의 집에서 시작했다. 과거의 남자아이는 현재 아빠가 됐고, Hart는 그에게 아들과 밖에서 얘기할 수 없겠냐고 물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들이 뒷마당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뒤따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항상 아이들로부터 200 야드 근처에 있다고도 했다. Hart는 부모들이 그를 의심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보다는 부모들이 “항상 아이의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졌고, 아이들이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을(going off) 좋아하지 않았다”고 봤다. 그는 오늘날엔 아이들에게 다가가려면 반드시 어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아이조차도 혼자 그와 얘기하는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것 같았다;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어른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정해준 삶을 사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한편 학교의 새로운 교장은 Hart가 학교에서 연구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커리큘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게 이유였다.
Hart는 Sylvia도 찾아갔다. Sylvia는 그가 영화를 찍은 리버 하우스의 여자아이들 중 하나였다. “Roger Hart! 오 이런, 내 어릴 때가 생각나네요.” 그녀는 전화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늘 사람들에게 우리가 뭘 했었는지 얘기했었어요. 사람들은 날 믿지 않았죠!” Sylvia는 이제 교외에서 두 아이(5살과 4살)를 키우는 엄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30 마일 떨어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Hart가 Sylvia를 방문 했을 때, 그는 대화 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놨다. 그녀의 뒷마당에 서서 Sylvia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자기가 어릴적 겪었던 경험들을 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작은 나무가 있는 장소를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숲에서 나와서는 안돼요.”라고 그녀는 첨언했다. “내 고향은 이제 너무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오고 가고, 많은 여행객들이 있죠.” Hart는 그녀에게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강을 건너가 놀았는지 상기시켜줬다. “여기엔 강이 없어요.” 그녀가 그에게 말하면서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전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곧 마당엔 울타리가 쳐질 것이다 – 그녀는 울타리를 몇번이나 언급했다 – “그러면 아이들은 그 안에서 놀거에요.”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 부엌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Sylvia가 인터뷰 하는 동안 그녀의 아들은 울타리처럼 되어 있는 관목을 가위로 잘랐다. 다만 그다지 내켜서 하는 것 같진 않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빠로부터 몇 인치 이상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Hart가 Jenny와 Andrew에게 그들이 고사리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비디오로 보여줬을 때, 그들은 둘다 모두 깊이 감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릴적 모습을 찍어 놓은 것을 본적이 없었고, 어렸을 적의 기억이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뉴잉글랜드 타운에 살고 있고 둘다 부모가 됐다. Hart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어렸을 적 했던 것과 똑같이 놀이 기회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Jenny는 헛간이 있고, 근처에 나무 덤불이 있는 집을 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이 오랜 시간 TV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도록 두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에게 헛간에 가서 짚을 가지고 놀거나 정원에 가서 놀라고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숲을 벗어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제 시야에서 벗어나길 원하지 않아요.”라고 했다. 어쨌든 아이들은 다양한 스포츠 팀에서 운동을 했다. Jenny는 그녀와 아이들이 함께 뒷마당에서 스키 점프를 만들기 위해 돌을 쌓고, 요새를 만들기 위해 나무가지를 이용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녀의 소녀시절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은 Jenny가 시작했다; 아이들은 보통 스스로는 이런 활동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러한 최근의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는 범위는 다소 제한적이다. 그들은 집에서 먼 곳을 가지 않고, 그러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보였다. Hart는 그 지역의 경찰관과 얘기를 나눠봤고, 그는 그렇게 많은 여행객이 있는건 아니고, 범죄도 매우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 일정하게 낮다 – 말했다. 부모들 사이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라고 Hart가 나에게 말했다. “위험의 과장, 신뢰의 상실은 완전히 명확하게 설명될 수 없어요.” Hart는 아직 그의 최근 연구에서 발견한 것들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루쏘니안(역자주: 루소의 추종자.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명언과 관련된듯) 아이들에 대한 스스로의 향수와 맞닥뜨리게 될까봐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요즘의 새로운 아이들에게서 더 나아진 점에 대해 솔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옛날엔 아이들이 스스로 밖에 나가서 놀면, 아이들 사이에 계급이 매우 빠르게 형성됐고, 어떤 아이들은 언제나 하위 계급에 속했었다. 어떤 때는 완전히 왕따를 당했다. 또한 그 당시엔 아빠가 거의 생략되어 있었다; 오늘날 아이들은 아빠와 더욱 가깝게 지낸다 – 그 당시의 아이들에 비해 양쪽 부모 모두와 가깝게 지낸다. 나는 1970년대가 이혼이 급증했던 시기라는 것도 추가하고자 한다. 이혼 때문에 그 당시에 많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방치되었다고 느끼곤 했다; 아마도 오늘날 가까이서 아이들을 살피는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다짐의 일환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Hart는 “아이들 문화의 사멸”과 함께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내고 부모에 비해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아는,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었던” 아이들의 문화 말이다.
The Land의 놀이터에선 어른인 “놀이터직원”들이 아이들을 살피고 있지만, 거의 끼어들지 않는다. (Hanna Rosin)
오늘날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걱정 한가지는 아이들이 너무 빠르게 자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아이들은 마치 성장할 만한 여지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지 어른들의 습관을 모방하는데 숙달됐을 뿐이다. Hart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아이들은 해가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책임을 더 많이 지곤했다. 그들은 길을 건너고 가게에 갔다; 결국에 그들 중 몇몇은 작은 아르바이트 자리(neighborhood jobs)를 얻곤 했다. 그들의 자존심은 능력과 독립심으로 감싸졌다. 작년에는 할 줄 몰랐던 활동들을 시도하고, 숙달하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산층의 아이들은 이러한 중요한 사건들을 건너뛰어버린다. 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마치 어른들처럼 말하고 생각할 줄 알게 되지만, 진정으로 독립적이고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자신감을 만들지는 못한다.
최근의 부모들은 펜실베니아 대학의 사회학자인 Annette Lareau가 정의한 계층 구분(class lines)에 따라 생각한다. 중산층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프로젝트로 본다: 그들은 그녀가 “계획된 양육(concerted cultiv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계획된 양육”은 능동적으로 아이들의 가치를 높이는 것(child’s enrichment)을 뜻한다. 반면 노동계급과 가난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더 적게 말하고, 덜 가까이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Lareau가 “자연스러운 성장의 성취 (accomplishment of natural growth)”라고 부르는 것을 조장한다. 아마 이것은 아이들이 중산층을 이끄는 어른의 삶을 사는데 덜 준비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연구를 중산층의 양육 스타일이 전반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 단순화한 이기적인 결론일 것이다; 아마 아이를 뒷받침하는 각각의 방식은 상대편에게 추천해줄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The Land의 관리자인 Claire Griffiths는 그녀의 혁신적인 놀이 공간을 펀딩하기 위해 보조금을 신청했었다. 그녀는 자주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했을 때의 구체적인 장점들을 리스트로 적었다: 비만과 싸우기, 운동 기술의 발달 같은 것들이다. 그녀는 또한 수십년전 Allen 부인이 말했던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해 말했다 – 아이들이 위험을 감수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워준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아이들의 문화가 갖는 더 막연한 장점은 보조금 신청서에 설명하기 어려웠다. 비록 여러가지 실험들이 이를 지지해주고는 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2011년 초, 뉴질랜드의 Swanson 초등학교는 대학 실험에 동참해서 운동장의 규칙들을 모조리 폐기하고, 아이들이 뛰고, 나무를 오르고, 진흙 언덕에서 미끄럼틀을 탈 수 있게 허락했다. 여기에는 그네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있었고, 마치 작은 모험 놀이터 같은 “잡동사니가 있는 구덩이”에서 놀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교사들은 혼란을 두려워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본 것은 버릇없는 행동과 괴롭힘이 줄어든 모습이었다 – 교장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이 (노느라) 너무나 바빴고, 문제를 만들고 싶어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The Play Deficit”이라는 논평에서, 보스턴 대학의 심리학자인 Peter Gray는 과거 아이들의 문화가 사라지면서 생긴 부작용을 시간순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밀레니엄에 흔히 발생하는 질환들을 나열한 친숙한 리스트였다: 우울증, 자기도취증, 공감의 결핍 같은게 있었다. 2012년 미국 대학 카운셀링 협회(American College Counseling Association)의 연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은 대학생 나이대의 아이들 비율은 급증했다. 임상심리학자들은 이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독특한 정체성 위기에 대해 (이 잡지를 비롯해 여러 곳에) 글을 써왔다 – 뉴욕에 있는 치료사인 Brooke Donatone의 표현을 빌리자면, 커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Gray는 그의 논평에서, 윌리엄 & 매리 단과대학의 아동심리학자이자 2011년 논문 “창의력의 위기(The Creativity Crisis)”의 저자인 김경희의 작업을 강조했다. 김경희는 창의적인 생각에 대한 Torrance 테스트(Torrance Tests of Creative Thinking)의 결과를 분석했고, 미국 아이들의 점수가 지난 10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꾸준히 감소해왔다는걸 발견했다. 데이터는 아이들이 점차 변해가고 있다는걸 보여줬다.
감정적으로 덜 표현하고, 덜 활력적이고, 이야기하고 말로 표현하는걸 덜 좋아하며, 덜 유머스럽고, 덜 상상하며, 덜 자유롭고, 활기차고 정열적인 면이 줄어들고, 자각력이 떨어지고,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관지으려 하는 경향이 줄어들고, 덜 종합적으로 보며, 사물을 다른 각도로 관찰하려 하지 않는다.
김경희는 가장 크게 점수가 떨어진 부분이 “공들여 만드는 일(elaboration)”이라고 했다. 아이디어를 갖고 그걸 새로운 방법으로 확장하는 능력 말이다.
틀에 박힌 아이들은 연구자들과 부모들에게 충분한 놀람을 줬고, 그들은 부모가 통제하는 문화에 대항해 과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의 많이 나온 부모들을 위한 책들에서는 그러한 회귀를 촉구한다. 책들에는 Duct Tape Parenting, Baby Knows Best, 그리고 곧 출판될 The Kids Will Be Fine 같은 것들이 있다. 그녀의 멋진 새로운 책인 All Joys and No Fun에서 Jennifer Senior는 부모들이 항상 아이들의 행복과 성공을 최대화 해야만 한다고 믿음으로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얘기를 썼다.
영국에서 안전에 대한 편집증은 누그러지고 있다. 소비자 상품 안전 위원회에 상응하는 영국의 기관은 최근 “잘못 생각한 건강과 안전에 대한 우려가 도전이 없는 무균의 놀이 기구들을 만들고, 아이들이 배움을 확장하고 능력을 신장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길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내가 영국에 있을 때, No Fear의 저자인 Tim Gill은 나를 새롭게 지어진 런던의 놀이터에 데려갔다. 그 놀이터는 돌투성이 언덕을 길고 빠르게 내려오는 미끄럼틀과 높이 오를 수 있는 암벽 등반 기구, 울타리 쳐진 지역이 아주 조금만 있었기에, 난 옛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편 웨일즈 정부는 아이들 사이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놀이를 장려하고, The Land나 다른 모범적인 놀이공간들처럼 모험이 있는 놀이터가 만들어지기 용이하게 하는 전략을 확실하게 채용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영국의 분위기를 채택할지 아닐지는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나, 몇가지 희망적인 신호들이 있기는 하다. 일례로 유럽 스타일의 “숲 유치원”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숲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형식적인 교육은 적게 받으며, 자연을 탐험하는데 더 많은 자유를 갖는다. 워싱턴 D.C.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드디어 재미있는 놀이터가 생겼다. “잊혀진 놀이터”가 없어진 이후에 처음이다. 이 놀이터는 Beauvoir라는 사립학교에 위치해 있으며, 놀이터 안에는 모든 연령대의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 느낄만한 짚 라인(zip line)과 등반용 구조물들이 있다. 나는 최근에 그 놀이터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는데 그에게 왜 학교 이사회가 안전에 대한 우려를 고려하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특히 주말에는 놀이터를 대중에게 공개하기 때문에 더 신중했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이사회가 안전에 대한 고려를 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놀이터를 원했다고 답했다; 안전 가이드라인은 시간이 지나고나서도 여전히 가이드라인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화의 변화는 부모들에게 나타나야만 한다. 큼직한 위험들을 피하는 것과 모든 결정에서 아이들의 안전(혹은 향상이나 행복)을 일차적인 목표로 두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완벽한 아이를 만들 수 없는 것 만큼이나 더이상 아이를 위해 완벽한 환경을 만들 수도 없다. 그럴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고 해로운 것이다; 패닉이 발발할 때마다 스스로 상기해야 한다.
The Land에 해가 질 때 즈음 나는 마치 재활용품들을 넣어둘거 같은 회색의 커다란 상자(bin)를 누군가 시냇가를 향해 미끄럼틀 아래로 밀기 직전이라는걸 곁눈으로 알아챘다. 상자 위로 아이의 머리가 쑥 내밀어졌고, 나는 그게 내 아들의 머리라는걸 알아챘다. 상대적으로 자유방임주의인 내 양육 기준으로 볼때도 상황은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어두워지고 있었고, 경사는 가파랐다. 그리고 상자를 밀고 있는 아이인 Christian은 겨우 7살이었다. 또 시내물은 차가웠고, 나는 내 아들 Gideon의 여벌옷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날 내 아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떼로 몰려다녔고, 그래서 가장 어리고 새로운 참가자인 내 아들은 The Land의 베테랑들에게 보살펴졌다. 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너 아마 시내물에 빠질거야.” Christian이 말했다.
“나도 알아.” Gideon이 답했다.
Christian은 이미 Gideon에게 어떻게 가장 높은 미끄럼틀에 올라가는지 가르쳐주고, 줄로 만들어진 그네를 타는 법을 알려줬다. 이 때 쯤에 그 아이는 약간의 신뢰를 얻었다. “내가 부드럽게 밀게, 알겠지?” “준비하고 출발!” Gideon이 대답했다. 내 아들은 미끄럼틀을 따라 시내물에 내려섰다. 내 경험에 의하면 Gideon은 물을 몹시 싫어한다(finicky). Gideon은 양치를 할 때 소매에 불이 한 방울 튀는것조차 싫어한다. 나는 이 여행에 차를 렌트하지 않았고, 우리를 차에 태워줬던 여자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했다. 나는 어떻게 새로운 옷을 구할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근처 이웃의 문을 두드려야 할까? Christian에게 아빠를 불러올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안된다면 Gideon에게 형들과 함께 잠깐 불 근처에 앉아있으라고 해야 할까?
“나 젖었어.” Gideon이 Christian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요새를 만들기 위해 먼저 망치를 찾는 시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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