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밖 청량리로 가는 길에는 왕산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을지로나 충무로같이 사람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지은 도로명인데 이 왕산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이 왕산은 구한말 의병장 허위의 호다.
허위는 오늘날 독립공원이 돼 있는 옛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서 1호 사형을 당한, 의병장으로서 명망이 가장 드높았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다.”
허위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요즘으로 하면 구미 출신으로, 그는 이미 을미사변 때 민비가 시해된 뒤 바로 의병을 일으킬 정도의 강골이었다고 한다. 동시에 임금이 이제 의병으로 활동하라는 밀지를 내리자 제꺽 휘하 병력 해산하는 군신유의를 보여 준 조선의 선비이기도 했다.
다른 얘기로….. 왕, 즉 고종 황제가 조금만 더 자신의 신민을 믿었더라도 이 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허위가 그 죽음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비만 해도 (명성황후라고 불러야 한다는데 동의 못 하는 필자) 차라리 일본에서 태어나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일본이 아닌 의병을 선택한 허위
의병을 해산한 이후 허위는 학문에 정진하다 추천을 받아 관계에 진출한다. 그는 성균관 박사 등을 거쳐서 평리원장까지 되는데 요즘으로 치면 대법원장격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물론 위상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꽤 고위 관직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이미 나라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그는 일본의 회유를 뿌리치고 또다시 의병 조직에 나선다.
그의 맏형 허훈은 “학문은 내가 아우보다 못할 것이 없지만 포부는 내가 아우를 따르지 못한다,”고 했거니와 허위는 학문을 때로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를 넘어 그걸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진정한 선비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돼 버린 성리학을 줄창 붙잡고 있었던 조선의 세월이 마뜩지 않아도 하나 분명한 건 언제 어느 시절에든 기개 있는 선비,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명운을 걸었던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한계도 뚜렷했다. 13도 의병 모아서 총진군 외쳐 놓고 아버지 상 당했다고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며 낙향해 버린 이인영 같이 꽉 막힌 선비들도 있었고 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 망국의 왕족에게 충성하며 그들에게 정권을 돌려 주자는 대략난감한 선비들도 있었다. 심지어 13도 의병을 모으겠다고 말한 후 양반 앞에서 어디 상놈이 설치냐면서 신돌석 같은 맹장들은 배제해 버렸으니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역시 이완용처럼 ‘시류’에 편승해서 호의호식 편안종생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는 거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위는 13도 의병의 군사장이었다. 즉, 참모총장격인 역할이었다. 우리는 국사책에서 1만여명의 의병이 모였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고 배웠지만 1만명이 전부 집결한 건 아니었고 가장 강력한 군세를 보였던 민긍호 이강년의 부대가 도착하지 못했고 얘기했듯 평민 출신의 신돌석, 홍범도 등도 배제된 상태였다. 우리가 배웠던대로 동대문 30리 밖에 이른 것은 허위가 이끈 300명의 선발대였다.
화력과 물리력에서 단연 앞선 일본군이었지만 꽤 긴장한 흔적이 보였다. 일본은 한강의 선박 운행을 금지시키고 최신 무기라 할 기관총을 동대문에 걸고 의병의 공격에 대비했을 정도였다. 원래 의병들은 서울을 다방면에서 포위하면서 동대문에 집결한 예정이었다고 했으나 일부 의병들은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까지 쳐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에 차단됐고 동대문 밖 30리에 이른 허위의 선발대도 배후를 공격당하고 말았다.
워낙 무기가 다르고 싸우는 법이 다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것으로 서울 진공 작전은 끝난다. 총대장 이인영은 아버지 상을 당했다고 내려가 버리고, 허위는 임진강 너머까지 후퇴하며 계속해서 의병들의 규합을 추진한다. 그즈음 남긴 말이 참 가슴에 찡하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하는것이 아니다. 차마 왜적과 함께 살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후손까지도 이어진 절개와 기개
이완용이 관찰사 자리를 주겠다며 회유했지만 거절하고 의병 규합에 여념이 없던 그는 1908년 6월 11일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가 보낸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다. 당시 체포 작전에 참여했던 일본군의 회고에 따르면 머물던 집 사람들이 몹시 어렵게 대하고 그 이름을 물어도 말하지 않아 의병장 허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허위는 위엄이 대단했으며 심지어 일본군에게 정보를 제공한 끄나풀에게도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고한다.
헌병사령관 아카시가 직접 허위를 심문했다고 하는데 아카시는 허위에게 압도당해 허위의 생명을 살려 보려고 통감 이토에게 직접 그를 살려달라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측도 법부대신이 나서서 구명을 호소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거절한다.
허위가 죽을 당시 유언을 물으니 “대의를 펴지 못했는데 유언을 어디에 쓰겠는가.”고 일갈하고 시신 거둘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 어서 죽이기나 하라고 호령했다고 한다. 끝내 그 시신은 제자가 거두었다. 가족들은 이미 한국에서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죄다 망명길에 나설 준비에 분주해 있었다. 허위의 형제들은 물론 그 자손들까지 대거 만주로 나서는 ‘가족의 대이동’이었다. 그 후 후손들은 현대사의 격랑에 휘말려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만주에서 독립 투쟁을 하다가 연해주로 옮겨간 허위의 가족들은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 때 영문도 모르고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옮겨져서 그 곳에서 살았다. 허위와 같은 시기에 의병을 일으킨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극장 수위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그나마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다. 검색하면 수많은 허씨들이 등장한다. 중앙아시아의 ‘스탄’ 붙은 나라들에 살고 있는 후손도 있고 북한에 들어갔다가 김일성에게 된서리를 맞고 중국으로 탈출해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정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하게 된 후손들도 있다.
중국에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오래도록 불법체류자로 살았던 허위의 형의 손녀는 경상도 억양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라 말을 잃으면 정신을 잃는다.”는 조부모의 말에 경상도 사투리를 배워야 했다고 한다. 그 많고도 슬픈 허씨들, 할아버지 덕분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고생만 하며 살아야 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훑어 보다가 ‘짠하다’고밖에 표현이 안되는 말을 보게 됐다.
“그 동안 독립운동한 사람을 못찾은 것도 나라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 뿐이겠지요. 원망 안합니다. 우리가 간 뒤에 이렇게 나라를 발전시켜 줘서 오히려 고맙습니다.”
총리 후보자가 나이 예순 넘어서 갑자기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를 찾아 보훈처에 확인을 의뢰하고 보훈처는 단 며칠만에 그분이 맞사옵니다 확인을 하는 그 번개 같은 확인과 추적 실력을 목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왕산 허위의 가족들 그리고 허위 생각이 났다.
“이 일을 하는 것은 성공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단지 못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고 되뇌며 칼도 총도 제대로 쥘 줄 모르는 선비 처지에 300명 결사대와 함께 동대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어느 용감한 선비. 총리 후보자가 “500년 허송세월을 했다”고 격하하던 조선이 낳은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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