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는 지난 대선의 주요후보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전체적으로 자기만의 스토리가 약합니다. 인생 스토리가 약하다는 건 그만큼 큰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적다는 뜻이죠. 대통령이 되면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중요한 결정들을 수없이 내려야 하는데, 큰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시시각각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의미심장한 경고였다.
보고만 잘하면 중간은 가는 대한민국
군대나 회사에 들어갔을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보고만 잘하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다. 뭔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네가 스스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즉시 상사에게 보고부터 하라”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상사는 또 다른 상사에게 다시 보고한다.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진 ‘오너’에게까지 보고가 이뤄지는 동안 현장의 상황은 달라지고 적절한 결정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고를 잘하라’는 말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 바로 이준석 선장과 세월호의 1등 항해사였다. 세월호가 쓰러지자 ‘비정규직 바지선장’인 이준석 선장은 청해진해운 측에 상황을 보고했다. 해경에 구출된 1등 항해사도 어딘가에 전화를 걸며 보고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금수원에 틀어박혀 사진 찍기에 열중하던 유병언 회장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동안 승객들을 구출할 골든타임은 놓치고 말았다.
‘책임회피성 결정장애’란 병명은 내가 아는한 SNS 논객인 김반장이 이런 이준석 세월호 선장을 평하며 만든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성인들 중에 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다준다연구소가 주최한 ‘청소년 세월호를 말하다’ 토론회에선 ‘그저 가만이 있으라’고 가르치는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꼬집는 청소년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대통령부터 언론까지 모두 책임회피하기 바쁜 사회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사고 다음날 진도 현장을 찾았으면서도 아무런 결정도 내려주지 않았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말처럼 ‘선거운동하듯이’ 한번 다녀온 것 뿐이었다. 선거 때는 유권자들의 아픔에 공감해주기만 하면 되지만, 집권하고 나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욕을 먹을 결정도 내려야 한다. 내려야 할 결정이 제때 내려지지 않을때 피해를 보는건 결국 국민이다.
대통령이 다녀갔는데도 구조의 난맥상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해군, 해경 측과 민간 잠수사들간의 갈등, 다이빙 벨을 투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언딘을 둘러싼 의혹 등 구조 현장은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 거리가 있었지만, 누구도 책임있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김장수 안보실장이라도 현장에 내려와 시시각각 적절한 결정을 내려줘야 했지만, 그는 ‘청와대는 콘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변명하다 결국 경질됐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사고 다음날 새벽 세월호 특집뉴스에 전화연결된 한 민간 잠수사는 (홍가혜는 아니었다) 이미 바닷속에서 20시간 이상이 흘렀으니 죄송한 말씀이지만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보고 즉시 인양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뱃사람의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수 있다. 앵커는 당황하며 ‘이건 이 분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수습하기 바빴다. 그때 누군가 욕을 먹고 인양을 결정하거나, 최소한 바지선에 걸어서 세월호가 더이상 물에 가라앉지 않도록 지시했더라면, 그나마 시신이라도 온전한 상태로 모두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 큰 결정들을 내리며 온갖 욕을 먹었던 한 정치인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결정이 어려운 이유는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점을 잘 알았고 평생 책임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책임을 지기 위해 목숨까지 내놨다. 그 점이 그와 그를 계승한다른 다른 정치인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우리는 언제쯤 그만한 결단력과 책임감을 가진 정치인을 다시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피처 이미지 출처: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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