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과 연세대 독립언론에서 최근 문제제기한 “연세대 커뮤니티 세연넷에서의 논쟁“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 학벌주의 논쟁의 핵심인 분교 문제의 경우 80년대에조차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투쟁에서 문제가 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문제였으나,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는 서창캠퍼스 학생에 대한 당시의 대립은 경제적 이해관계상의 문제보다는 말 그대로 학맥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였고, 학내 차별주의는 발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고, 좀 더 정교해지고 있다. 대학 사회의 구별짓기 양식은 이제 더 세밀해졌고, 이전의 학벌주의적 차별이 2등시민에 대한 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차별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경제사범’과 ‘잠재적 경쟁자’를 다루는 방식으로 진화한 상태다. 명예의 투쟁에서 지대의 투쟁으로.
학벌주의와 지대의 논리
대체로 사람들은 학벌에 대한 집착을 양질의 일자리를 획득하는 과정선상에서의 경쟁으로 바라보고, 경쟁사회로 인한 압력으로 ‘구별짓기’가 유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학 진학은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위한 자본주의적인 방법이지만, 대학, 특히 ‘명문대 문과대’가 거기에 기여하는 것은 교육기관으로서의 교육과 학습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인맥과 계층 편입을 통한 지대(Rent)를 배분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몇 가지의 상황을 검토해 보자.
1. 한국에서 학벌이 갖는 의미는 학벌을 확보해 ‘양질의 일자리’와 그를 통한 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의 경쟁을 줄이기 위해 ‘미리 확보하는’ 권리로서의 성질이 강하다. 동시에 대학 진학에서 절대 다수의 당사자, 특히 기술적 전문성을 보여주기 힘든 문과계 진학생들이 1차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학비와 ‘교육의 질’이 아닌, ‘이름값’이다.
대학의 ‘교육적 기능’은 오히려 명문대를 노리는 학생들이 아닌 고만고만한 학교들 간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학생들이 주로 고민한다.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학과에 사람이 과거보다 많아지고, 기능대와 기술대, 산업대의 입시결과가 그 고민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명문대, 특히 명문대 문과의 기능은 사회에서 쓰이는 암묵적 권리로서 드러나며, 그 권리는 흔히 대기업 인사팀의 서류전형을 통해 구체적으로 변한다.
2. 학벌을 획득하고자 하는 경쟁압력은 크지만, ‘학벌간의’ 경쟁은 소위 말하는 명문대로 올라갈수록 적어진다. 성균관대는 자본의 투입으로 ‘입시 결과’에서 일부 지표가 높아졌으나, 그것은 주로 의대와 공대를 대표로 한, 자본을 투입해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고 교육을 받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낮추는 것이 중요한 학과를 중심으로 얻은 결과였으며 문과를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명문대’로서의 서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상대적인 비명문 대학의 입시결과는 양질의 일자리만 어느 정도 보장되어도 급격하게 변한다. 즉 명문대와 문과로 갈수록 사실상 대학들이 돈을 부어도 서열이 변하지 않으며, 특정 학력이 가진 지대로서의 지위는 매우 영구적이고 고정적으로 개인의 인생에 기여한다.
3. 대학 커뮤니티 내의 기사에서 지적된 논쟁에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지난 10여년간 수시를 비롯한 많은 비 수능 입학은 비하의 대상이 되었으나, 오히려 일반편입은 정시 입학생과 맞먹는 높은 지위로 올라서며 꾸준히 비하의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
이는 편입이 수능 입학보다 ‘어렵다’는 대학생들의 컨센서스를 통해 편입이라는 과정이 대학 사회에서 정통성을 공인받아 그 결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편입은 난이도를 인정받아 학벌의 지대로서 ‘미래의 안락한 삶’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다. 즉 편입은 미래의 경쟁을 회피할 자격을 획득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적 자원’을 향상시킨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학벌주의와 대학 사회의 ‘구별짓기’는 전근대적 문벌귀족 사회의 구성원리에 더 가깝다. 문벌귀족의 3요소는 가문(혈통), 토지(전답), 문필(유학)으로 구성된다. 문벌귀족은 음서와 공음전을 비롯한 각종 특혜로 능력을 인정받지 않아도 부를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꾸준히 입증할 필요가 있다.
학벌주의는 이 문벌귀족의 3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가문은 대학으로, 전답은 부동산이라는 훨씬 집약적인 형태로, 문필은 ‘영어’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스펙으로 변화한다. 학벌이라는 가문의 획득은 입학사정관제와 귀국자녀 전형, 외국어 특기 전형, 난이도가 높아지는 정시의 외국어 영역을 통해 좀 더 부유층에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명문대와 문벌귀족
한국의 학벌주의는 문벌귀족이 순수한 귀족이 되는 변화와 많은 부분에서 같은 흐름을 탄다.
A- 1. 우선 경전과 문장능력, 특수한 재주, 정치력, 금력 등을 기반으로 삼은 신흥 출세 집단이 생성된다. 아직 이 세력은 혈통적, 경제적 동질성을 완전히 확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직 계층이 아닌 세력을 이룬다.
A-2. 현대 한국에서 이들은 바로 군사독재 시기의 대학생들이다. 학력고사와 본고사를 뚫고, 고시와 같은 출세를 하고, 그들은 부의 원천인 부동산을 축적하며 사회 상류층으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자녀를 갖는다.
B-1. 문벌귀족은 본격적으로 과거제도의 형식을 조정하거나, 시험에 개입하고, 여러 ‘특권적’ 방식으로 자리를 만들어 후세에게 권력과 부를 이어준다. 음서 제도가 대표적이다. 토지는 더욱 상류층에게 집중되고, 슬슬 사회의 자영농은 붕괴되며 토지가 부족해 적극적으로 상대방 귀족을 말살하고 토지를 병합한다.
B-2. ‘성공한’ 군사독재 시기의 대학생들은 사교육과 여러 자본의 투입으로 후손을 ‘부유하고 공부도 잘하는’ 계층으로 키워낸다. 유전적 요인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 세대는 자녀들에게 사교육과 특목고를 안겨주어 그 현상을 뒷받침한다. 외무고시가 대표적으로 현대의 음서로 바뀌며, 수시 입학전형의 논술과 입학사정관제, 외국어 특기자를 비롯한 전형과 ‘자립형 사립고’ 등을 부모들이 제안하고 지지하며 2세를 위해 유리한 룰을 만든다.
C-1. 더 시간이 지나면 상류 계층은 완전히 하부 계층과는 구별되는 혈통적(가문), 경제적(토지-부), 문화적(라이프스타일-교양) 특성의 삼위일체가 형성된다. 그러면서 토지와 관료직의 숫자가 부족해진다. 결과적으로 귀족사회 내부에서도 품계를 엄격하게 따지고, 가문의 ‘질’을 논하게 되며 소수의 가문이 관료를 독점한다. 일각에서는 가문이 성씨를 가신들에게 ‘뿌리고’, 가문 내에서의 ‘순혈’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생한다.
C-2. IMF가 발생한 시점을 전후로 대학이 크게 증가하고 반대로 양질의 고용이 감소하면서, 대학생도 다 같은 대학생이 아니게 된다. 대학생 내에서도 스펙과 이름값을 통해 걸러내는 압력이 커진다. 대부분의 대학생이 양질의 고용에 접근하기 어려워지고 소수의 명문대만이 거기에 부합한다. 명문대도 이전보다 상황이 악화된다. 대학은 학벌로 장사를 하기 시작하며, 대학 내의 구별요소인 학점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또다른 구별법인 스펙이 대두되고, 스펙은 무임금 인턴, 봉사활동, 각종 자격증과 공모전으로서 꾸준히 자본과 시간을 대학생에게 요구한다. 더 극단적으로는 고시에 상응하는, 국가에서 매년 배출되는 숫자를 제약하는 전문직 라이센스를 확보해야 하는 압력이 커진다.
대학생들은 스트레스가 커지고, 대학 구성원들간의 생존투쟁이 격화되면서 ‘차별화'(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위한 언어가 (실제로 기업이 거기에 관심이 있는지와 별개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DC와 대학 익명 커뮤니티를 필두로 지난 10여년간 조용히 대학 사회 일각에서 극단적 형태로 발생한 구별짓기다.
약자에 대한 폭력과 투쟁의 언어
개별 대학 내부에서의 DC 학교 갤러리와 익명 학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폭력적인 타자화와 구별짓기는 기본적으로 이 논법을 따르고 있다. 대학의 지대가 악화되고 생존을 위한 압력이 강해지면서, 우선 대학 서열이 명문화, 도식화되어 대학이라는 가문의 ‘품계’를 엄격하게 구별하기 시작한다.
지방대생에 대한 경멸이 하나의 유희처럼 자리잡는다. 그리고 학벌 지대를 복수전공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교란하는, ‘잠재적 경제사범’이자 사생아인 분교생에 대한 언어적 린치가 이루어지며, 학부 권력을 대학원 권력으로 무마시킬 잠재적 의도를 가졌다고 판단되는 타대에서 모교 대학원으로 진학한 대학원생들에 대한 비하와 공격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외부적인 경쟁자들을 제압함과 더불어 대학 내에서의 타자화와 차별화, ‘약자를 향한 폭력’이 구사되기 시작한다.
편입생에 대해서는 조금 관대하다. 죽어라 편입 공부를 했으니, ‘세가’의 어드밴티지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 혐오감이 덜하다. 편입은 ‘용인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반면에 본분교간 복수전공, ‘학력세탁’을 위한 대학원 진학 등은 성적이라는 단위가 그에 상응하지 않으므로 제압의 대상이 된다. ‘미래의 안락한 삶’을 위한 필수요소의 순도를 위협하는 적들을 제압하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조리돌림해 모욕을 줄 욕구가 생긴다.
학생들은 대외 투쟁 이후 본격적으로 대내에서의 순혈 투쟁을 시작한다. 대학(가문)이 보장해줄 수 있는 지대가 대학생의 확대와 고용사정의 악화로 줄어들다 보니, 실제로 고용주가 순혈성에 관심이 있든 없든 ‘쉽게’ 자신과 같은 위치에 오른 사람은 나와 같은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일각에서 싹튼다.
분교의 복수전공과 같은 학벌 지대의 교란은 기업 인사팀의 대응과 교육부의 분교 통폐합 정책을 통해 저지되어 대학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교내 순혈 투쟁은 고용주가 분간할 필요성이 사실상 없고 관심도 없기에, 더더욱 기준이 없는, ‘순혈성’이 떨어지는 학생들에 대한 넷상의 유희적인 폭력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귀국자녀들은 별세계 놈들인 경우가 태반이고, 그놈들은 평범한 중산층 자녀로 수능 쳐서 들어온 사람들과 달리 영어를 잘 한다. 논술은 어쨌든 글은 잘 썼을 테고, 만만한 건 지역균형으로 들어온 허접한 고교에서 내신 좀 잘 친 하룻강아지와 농어촌 전형으로 온 시골 촌놈들, 실업계 전형으로 들어온 기름 냄새나는 직탐 보고 들어온, 자신과 감히 댈 수도 없는 잡종들이다.
대내 계급의 정점은 ‘정시 입학 장학생’이 차지하고, 최하위는 시골에서 온 실업계 전형 합격자가 차지한다. 그래서 그들은 넷스피어를 중심으로 익명을 무기삼아 다른 재학생을 비하한다. 오히려 현실의 고용주들이 그런 아웅다웅에는 별 관심이 없기에 그 비하는 더욱 힘을 얻는다. 그 분간을 해줘야 하는 집단이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비하에 동원되는 언어의 형상에도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과거의 지방대나 분교 출신에 대한 멸시는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자극하는 단순한 언어만으로도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다른 학교인데요’나 ‘잡대’, ‘언감생심’ 이라는 식으로. ‘지방대’는 그 자체로서 멸시적 언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잦다. 루저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소위 말하는 열등감 폭발을 일으켜 얼마든지 비하를 통해 ‘부들부들’거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 내부, ‘대학원’ 등으로 차별주의가 파고들면서, ‘내가 절대적 우세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멸시하는, ‘열등한 자를 경멸하는’ 것이 아닌 ‘경쟁자와의 투쟁’을 목적으로하는 언어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구가 커지고, 넷스피어의 은어(~충, ~퀴)와 적극적으로 그 욕구가 결합한다. 언어의 형상이 좀 더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노골적 비하로 나아간다.
그래서 탄생한 ‘로퀴’나 ‘수시충’과 같은 언어들은 과거와는 조금 다르다.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출신을 공격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비하하게 된다. 취업이라는 목표 하에서 상대방의 위치가 나와 사실상 동일하게 평가되기 때문에, 언어 자체가 띄는 공격성이 더욱 커지고, 이는 프로스포츠에서 자주 발견되는 ‘트래쉬 토크’와 유사하다.
수시 전형의 양면성
이 과정에서 대입 전형은 중요한 논쟁의 키로 자리잡는다. 수시 전형은 대학 사회에 두 가지의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입학사정관제-논술-귀국자녀 전형으로 대표되는 ‘부유층 2세대’에 대한 합법적인 음서과 공음전의 하사고, 다른 하나는 다문화-농어촌-실업계로 대표되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인위적인 학벌 지대의 배분이다.
좋은 수능 점수라는, 대입을 위한 큰 비용을 지불한 ‘정시생’들의 입장에서는 둘 다 용인할 수 없는 반칙이나, 전자는 상대가 만만치 않고 자기가 영어를 못하니 어느 정도 참고, 후자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 출세를 꿈꾸는 평범한 집안의 정시 합격생들은 이런 종류의 입학생들을 ‘꼼수’로 상정하며 자신의 지대를 해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를테면 합격생의 대입 전형에 대한 다른 대학생의 문제제기는 학벌 지대를 배분하는 방식인 대입 전형에 대한 주도권에 관한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입시에 영향을 미치거나, 또는 대학 사회에서 보편적인지를 떠나서.
열등한 학과와 열등한 전형의 대두
모든 과정을 쭉 놓고 보면, 존재하는 것은 안정된 고소득 직장에 액세스하기 위한 인맥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암묵적 증명서로서의(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는 자신이 학벌로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한다) 지대(Rent)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고, 대외적으로 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끝나자 남는 건 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순결의 투쟁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은 ‘나와 동일한 노력을 하지 않은 자는 나와 같은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외친다.
IMF 이후 평생고용이 붕괴되고, 대학 사회가 팽창하며 명문대를 포함한 고용시장에서의 대학이 갖는 지대가 감소함에 따라,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해 지대를 늘리고 싶어하는 개개인의 매우 전근대적인 정통성 대립이 본격화된다. 수시에 대한 비하는 단순한 비하가 아닌 학벌 지대를 추가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경쟁자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다. ‘손쉽게’ 같은 지대를 획득한 자들에 대한 린치가 대학 사회 일각에서부터 방출된다. 인터넷과 익명성은 좋은 무기다.
좋은 학벌이 갖는 지대가 악화되면서 대학들은 구조조정을 당할 수는 없고 장사는 해야 하니 대신 학점을 잘 주는 과정으로 자신들의 고용시장에서의 입지를 유지하려고 했고, 모두가 그렇게 한 결과 모든 대학의 학점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결국 고용주들 입장에서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 경쟁을 피하고 싶었던 대학생들을 구별하기 위해 더 많은 경쟁을 요구하게 된다. 대학생들은 그 경쟁에 화가 나고, 그 분노를 만만한 사람에게 푸는 과정이 뒤따른다. 또한 사회적 필요성이 큰 상경대와 공대는 학교 안에서 좀 더 우월한 위치를 쥐며 그 학과의 안티테제인 ‘문사철’에 대한 조롱이 생겨난다.
결국 수시와 각종 ‘공부’를 통해 공인되지 않는 방식을 활용한 학벌 지대의 침입은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치르고'(수능), 그 지대를 강하게 원해온(금수저가 없는) 사람들을 위협한다. 물론 대부분의 재학생은 그것에 대한 반감을 사회적 예절로서숨기거나, 아니면 거기에서 문제를 찾지 않으나 일부는 분명히 그것에서 벗어난다. 익명화된 넷스피어에서의 분위기가 이 현상을 보여준다.
대학 사회의 붕괴와 구별짓기
학벌은 점차 부동산과 함께 부의 생산수단이 아니라 부의 증명수단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실제로 소위 ‘명문대’ 재학생의 소득수준은 과거에 비해 계속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 대학생이라는 사회 엘리트는 숫자가 늘어났으나 대부분이 엘리트로서의 입지에서 몰락했고, 남은 소수의 명문대도 이전에 비해서 확연히 줄 수 있는 지대가 줄어들었다. 상경대와 공대는 특수 학문으로서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고, ‘문사철’은 궁지에 몰린다. 명문대는 점차 부의 기회를 제공하는 곳에서 부를 증명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평범한 중산층 집단의 자녀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이 수시를 통해 끼어들어오는 상황이 싫다. 자신보다 성적이 나쁜 이들의 ‘학력세탁’도 싫다. 농어촌이나 실업계에 대한 쿼터의 배분도 싫다. 모두 얼마 남지 않은 학벌 지대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수저를 든 사람들은 거기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으며, 실제로 그 부류는 이미 조기유학과 인맥으로 중무장했다. 그래서 일단 사생아를 축출한다. 그 후 약자와 소수자를 찍어내고, 자기 내부에서 경쟁압력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취업’을 통해 서열을 나누는 유희가 등장한다.
대학생이 사회적 모순에 대동단결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된다. 대학은 특권을 주는 가문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에, 서로간에 분명히 상하관계가 있고, 그들이 ‘을’로서 대동단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학 사회는 동질성이 없어졌고, 대학생은 ‘어느 대학’과 ‘어느 학과’라는 구별을 거쳐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의 어느 전형으로 온 사람’으로 더 세밀한 구분을 동원한다. 그러나 고용주는 전혀 이런 구분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 사실이 공격성을 더 키운다.
팽창한 대학생이란 계층이 앞으로 사회를 어떻게 변혁시키려 들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생은 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상실하고 있으며, ‘구별짓기’는 개인의 예의없음과 폭력으로 해석되면 부족하다. 실제로는 대학이 배타적 지대를 상실했기에,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경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있고 그것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가’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학 사회의 다수는 이런 폭력적 구별짓기가 옳지는 않다는 것을 알며, 기본적으로 남의 프라이버시를 알 기회가 그리 많지 않고 각자의 일과가 있어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다. 사회인은 ‘취업’을 한 순간 학벌이 학연이자 학맥으로 전환되며, 경제적 네트워크가 되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순혈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포용한다. 그러나 대학 재학생의 논법은 다르다. 현재 대학 사회를 지배하는 구별짓기의 근간이며 현재의 한국의 20대가 처한 현실이다.
혹자는 세연넷, 고파스, 스누라이프 등의 익명 커뮤니티에서 발생하는 차별적 언어폭력을 두고 ‘극히 일부’의 일로 표현한다. 모 언론 대표의 경우 세연넷을 두고 ‘연대의 극소수’이자 ‘일베’로 비유하며 나와 내 주변은 그런 차별적 폭력에 참여한 적이 없고 연대생의 대다수가 그렇다는 반론을 펼쳤다.
일베는 한국 사회, 특히 미혼 청년들의 보수적/반사회적/극우적 마인드가 가장 극단적이며 조직적으로 표출되는 커뮤니티이며, 일베는 청년층의 보수화를 대변하는 대표적 조직이다. 일베를 하지 않더라도 ‘일베적인 형식논리’를 공유하는 사람은 사회에 많다. 세연넷이 일베라면, 연세대학교는 ‘청년 보수화’와 같이 보수화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무엇이 이상한가?
실제로 세연넷 익명 게시판을 포함한 ‘명문대’의 익명 게시판은 일베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며, 거기서 표출되는 마인드에 비해 극단성이 줄어들었을 뿐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는 굉장히 많은 구성원이 공유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도 네이버와 구글에 원세대나 조려대를 입력하였을 때 입에 담기도 어려운 비하들이 몇년치가 뜨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타자화는 한국의 기독교 세력이 교내 부패에 대해서 자주 꺼내는 일부드립과 별 차이가 없고, 냉철한 문제의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문: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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