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이었던 것 같네요. 투구추적 시스템이란 게 미국에 도입된다는 뉴스가 나오고, 그해 가을에 샘플 데이터들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데이터’라는 녀석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재미로 시작한 글쓰기가 어느새 칼럼이 되고 생각지 못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2015년엔 꿈에 그리던 야구단 분석가의 기회를 얻었고 4년간의 경험으로 지금은 야구 앱을 기획합니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의 경험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아니기에 아주 짧게 줄였습니다. 오늘은 야구팬이라면 한번쯤 꿈꿔보는 그 자리, ‘MLB 구단 분석가’라는 자리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야구 데이터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 주욱 MLB 구단의 분석 포지션에 지원해왔습니다. 지원하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매년 겨울이면 항상 올라오는 포지션을 보며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겨울마다 하는 저의 루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항상 그렇지만, 이제까진 그 흔한 답 메일 한번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주로 원서가 접수되었다는 정도에서 끝났습니다.
세이버세미나, SABR 애널리틱스 같은 세미나를 참석하며 제 잠재적 경쟁자들의 실력을 이미 알았기에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뛰어난 인재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법이지요. 2020년 겨울에도 여느 때와 같이 미국 모 구단의 분석가 포지션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지원할 때만은 즐겁습니다. 행복회로가 팽팽 돌아가거든요.
일주일 즈음 지난 어느 날 밤.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 We are pleased to inform you that we have moved your application to the next round, […]
제 인생 처음으로 미국 구단 서류전형을 통과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입사 확정도 아니고, 그냥 다음 단계의 채용 전형일 뿐인데도 그 자체가 기뻤습니다. 10년간 도끼질을 하니 나무가 약간 움직이긴 하더라…. 정도일까요.
첫 번째 시험은 서면으로 도착한 여러 질의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더 상세한 자소서를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회사에 지원할 때에는 이력서 외에 커버 레터(Cover Letter)란 것을 첨부하는데, 이 커버레터의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이력서 열람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소서와 비슷하지만, 내가 이 일을 정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 확실히 어필해야 합니다.
제가 받은 질문의 내용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 왜 야구단에 오고 싶은가? 왜 우리 구단인가?: 이건 취준생의 기본이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 온다면, 어떤 업무를 하고 싶은가?: 저는 분석가에 지원했기에 어떤 데이터에 대한 or 어떤 파트에 대한 분석과 모델링 업무를 하고 싶은지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 본인이 해본 프로젝트 하나를 소개하고, 느낀 점을 서술할 것: 어떤 걸 했는지, 어떤 모델을 통해 어떤 결과를 도출해 냈는지 명료하게 적어 나가야 합니다.
- 다양한 분석 글 중 하나를 정해 이 글을 택한 이유와 이 글의 방법론을 더 개량할 방법을 적을 것: 야구 글이 아니어도 됩니다. 하지만 왜 그 글을 택했는지, 그리고 내가 이 방법을 개량한다면 어떤 모델을 어떻게 적용할지 쓸 때는 지식을 총동원하는 게 좋습니다.
이걸 장황하게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다면야 좀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항상 모든 질문의 답변에는 제한 사항이 있습니다. 제가 받은 조건은 ‘각 질문당 300단어 이내의 분량일 것’. 쓰다 보면, 300단어가 아주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분량을 배치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이 숙제의 제한 시간은 7일이었고, 정신없는 연말이 또 지나갔습니다.
2021년 1월이 되었고, 미국 구단의 업무가 재개될 때 즈음, 또 하나의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 We are excited to move forward with the interview process. […]
올해 운을 여기에 다 끌어쓴 건지, 얼떨결에 실무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채용담당자와 시간을 잡고 화상 인터뷰를 했습니다. 원래 15분 정도의 세션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30분 정도를 진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겪는 인터뷰랑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제가 겪어본 바로는 스타트업의 질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직무에 관련된 부분을 끈질기게 물어보고, 거기서 제 밑천이 드러납니다. 실제로 제가 A란 업무를 달성했다고 했으나, 그 과정에 대해 물어볼 때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죠. 또는 그 업무의 프리 라이더였거나요.
인터뷰는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구단의 최근 발생한 큰 사건(트레이드, 계약 등)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다
이 부분에 세이버메트릭한 답변을 할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답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면접관은 대부분 수치에 도가 튼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주장은 아주 쉽게 파훼당할 거예요.
내가 1차 질의서에 답변으로 적은 연구에 대한 질문
면접관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추가 설명을 요구합니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고 싶은가? 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팀 문화에 따른 질문
예를 들자면 “코치가 분석자료를 잘 믿지 않는다. 그럼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같은 것이죠.
Any questions to us?
궁금한 거 많이 물어보세요. 저는 제가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습니다.
내가 10년 동안 지원해 보면서, 이렇게 서류통과도 되고 실무면접까지 해본 게 처음이다. 분명히 미국 본토에도 우수한 지원자가 많았는데, 굳이 나를 택한 이유가 있다면 알려주면 좋겠다.
네, 저는 정말 이게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면접관의 입장에서, 그리고 미국 문화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질문은 제 능력을 제가 깎아 먹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면접관의 답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야구계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 어디에 사는지가 중요하기보다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그중 하나였기에 지금 같이 인터뷰하는 거다.
이 말이 제겐 굉장히 큰 선물이었고, 앞으로 또 힘내서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시 한번 구단의 메일이 도착했고, 제 도전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소중한 경험이었고, 그분의 메일로 이 경험을 다른 분들과 공유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흔쾌히 수락해 주셨기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제 40살입니다. 아이도 있고, 무작정 꿈만 가지고 내달리기엔 현실의 벽이 높아지는 나이에요. 하지만 같은 꿈을 가지고 달려가는, 이 글을 보신 여러 야구팬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유학파도 아니고, 수학과 졸업자도 아닙니다. 코딩 일자무식으로 시작해 다른 사람 코드 뜯어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부끄럽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걸어온 길이 절대 빠른 길이 아니며, 쉬운 길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길을 걷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정보가 공유될수록 여러분 꿈의 직장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이 글을 보며, 프런트 오피스의 꿈을 그리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문: randahlia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