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런 농담이 돌았다. 세계 위인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키가 작아 장가도 못가고 특정 지역 출신으로 출세는 꿈도 못꾸었을 것이고, 퀴리부인은 여자라서 박사 학위에서 밀려 나이든 조교로 빌빌 매고 있을 것이고 운운의 농담인데, 여기에 헬렌 켈러를 추가해 보자. 헬렌 켈러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평생 장애인 시설에 갇혀 살거나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나 아니면 저 아이가 어떻게 살겠어요.”라고 울먹이는 부모님의 짐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유력하지만, 용케도 한국에도 앤 설리반 같은 선생님이 계셔서 그녀가 말을 하고 글자를 읽게 되고 대학까지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물론 인간의 불퇴전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전국 곳곳을 누비며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를 부르짖는 명강사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아니오이다.
열정적인 사회주의 활동가 헬렌 켈러
한국에서 헬렌 켈러가 살아갔다면 그녀는 감옥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국가보안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혐의로 말이다. “동쪽에서 새 별이 떠올랐다. 고통과 괴로움으로 얼룩진 낡은 질서 속에서 새 질서가 태어났다. 전진! 동지들이여 단결하라 전진하라. 아! 혁명의 현장으로 전진하라. 동트는 새벽을 향해 전진하라.” 러시아 혁명을 찬미한 사회주의자가 감옥으로 가지 않으면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우리는 불굴의 의지의 가정교사 앤 설리반이 짐승처럼 돌진하는 헬렌 켈러의 머리에 들이받혀 이빨 서너 개 부러뜨려 가면서 아이를 다잡고, 물을 손바닥에 떨어뜨린 후 Water를 가르치고, 단어 하나 하나를 익혀 가던 기적 같은 감동, 감동의 기적만을 주로 기억한다. 그렇게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알았던 헬렌 켈러가 그 뒤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했다거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앤 설리반이 헬렌 켈러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앤 설리반은 헬렌에게 조지 웰즈의 <신세계>를 추천했고 헬렌은 그 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앤 설리반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헬렌도 그를 부인한 바 있지만, 설리반의 남편 존 메이시는 꽤 열정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였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정면으로 맞서다
1898년부터 1921년까지의 헬렌 켈러는 과격해 보일만큼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나는 열악한 작업장과 공장,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뉴욕과 워싱턴의 빈민굴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환경이 열악한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나는 그 비참함을 볼 수 없었지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통렬한 외침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공격한다.
“왜 그들이 저렇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 답은 사회의 토대가 개인주의, 그리고 정복과 착취의 기조 위에 놓여 전체의 행복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기본 원리 위에 지어진 사회의 구조는 모든 인간들의 발전, 심지어 가장 유능한 이들의 발전마저 지체시키는데 이는 인간의 에너지를 쓸모없는 곳으로 돌려 그 성정을 쉽게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 시민들, 그 중에서도 ‘잘나가는’ 시민들이 헬렌 켈러의 이런 말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저 장애를 극복한 영웅, “여러분은 듣고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열심히 일하세요. 행복은 여러분에게 달렸어요.”라고 말하는 연사로서의 역할만 해 주면 좋겠는데 저 따위 수틀리는 소리만 딱딱 하고 있으니 얼마나 고까왔을까.
그들은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설리반이나 메이시 같은 사회주의자들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폄하 비슷한 배려를 통해 헬렌을 무시하려 했다. (하, 이놈의 “너는 이용당하고 있어! 이 불쌍한 것아!” 신공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구하다)
헬렌은 여기에도 명확하게 반박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자신들의 선전선동 수단으로 만든 파렴치한 인간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서글퍼한다. 이제 나는 그들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내가 뭘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먼 조선 땅에서까지 사랑을 설파
그녀는 1912년 미국 노동운동의 전설이 된 “빵과 장미” 파업인 로렌스 섬유노조 파업에 동참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성인 남녀 1백 명당 36명이 25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된 참혹한 노동현장에서 임금마저 깎이자 노동자들은 결사적인 파업으로 저항했다., 헬렌 켈러는 북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이 파업 지지 연설을 하고 모금 활동을 벌였다.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습격하고 사람까지 죽였지만 파업은 승리했다. 헬렌 켈러는 그 중심에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소련 사회주의가 변질되고 미국의 노동운동 조직이 와해되면서 헬렌 켈러도 점차 정치 일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칠 때에도 그녀는 의연하게 과거 사회주의 동지이자 미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을 석방하라고 외치는 강단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전쟁 앞에서 일치단결한 미국의 성조기 앞에서도 “여기 미국에서 흑인들이 학살되고 그들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지배자들은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전 세계를 돌며 장애인 복지와 반전을 외치던 그녀는 1937년 식민지 조선에도 왔었다. 서울에서 강연을 한 후 평양으로 향하는 기차가 개성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그녀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강연을 했다. 당시 개성 호수돈 여고 교사 류달영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사랑이 없는 국가와 사회는 퇴보할 뿐”이라는 주제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알멩이도 없고 뼈대도 없이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부르짖는 뜬구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빌어 온다.
원문: 산하의 썸데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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