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교양에 대하여: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양이란
1. 인문학이라는 기묘한 대상
최근 ‘인문학’은 기묘한 위상에 놓여있는 듯 보인다. 한편으로는 (주로 대학 강단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대중담론에서는 이처럼 ‘인문학’이란 단어가 자주 호출되던 시대가 있었을까 싶으니까. 자유 교과(liberal arts)의 잠재적인 가치를 역설했던 스티브 잡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인문학(인문교양)은 창조적인 역량을 기르는 왕도로, 더 나아가 리더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소양으로까지 칭송받는다.
한편 치유와 힐링의 인문학도 존재한다. 이것은 이 ‘성공을 위한 자산’ 혹은 스펙으로서의 인문학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잘 달리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나 힘들면 잠깐 쉬어가라고 하는 것이나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니까. 요약하자면 무용하고 비생산적이어서 퇴출당하는 인문학이 다른 쪽에서는 가장 유용한 만능(계발이자 치유)의 도구로 부활하고 있다는 것.
물론 이러한 것이 인문학의 본령이 아니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예를 들어, 이른바 ‘인문 좌파’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쪽에서는 앞에서 말한 인문학(혹은 인문교양)이 현실에 순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 입장에서 보면 인문학은 근본적인 문제들(예를 들자면, 주체라든가 이데올로기라든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현실과 싸울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인간 해방과 혁명을 위한 무기가 된다. 혹은 그렇게 활용되어야 한다.
2. 교양을 교양하기
아무튼 이렇게 인문학(인문교양)은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나는 제 앞가림을 못하는 대신 전업으로 교양에 몰두해 이 시대에 이바지하고 가겠다고 마음먹은 바 있는데, 인문학을 둘러싼 이런 혼란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떤 교양을 쌓아야 하는 것인가. 왜 전업 교양은 생계 꾸리기보다 더 어려운가.
교양이란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네이버 사전) 또는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다음 사전)이라고 하는데, 사전적 정의만 보아도 그 내용과 폭이 방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난 애초에 범위를 좁혀 ‘인문 교양’에만 몰두하려고 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문학(인문 교양)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인문 교양이 도대체 뭔가’부터 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먼저 단어의 유래부터 가보자. 일본인들이 독일어 Bildung(만들다, 짓다 → 형성하다, 가르치다)의 번역어로 ‘교양’이란 말을 쓰기 전까지, 이 한자어는 각 글자의 뜻대로 ‘가르치어 기르다’는 동사로 쓰였다. 해방 직후 이 단어를 가장 표나게 쓴 것은 ‘인민 대중을 교양하기’에 힘쓴 좌파들이었는데, 그 덕분에 정치 교양이라든가 하는 것에 강제로 동원되신 분들이 교양이라면 치를 떨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그래서 교양이 부족한 사회가 되었나?).
아무튼 이 Bildung은 education, culture, cultivation 등으로 번역되는데 모두 다 ‘가르치다, 기르다’ 그런 대강의 의미에 해당하니 단어 자체가 특별하다기보다는 그 역사적 맥락이 더 중요한 셈이다. 그러니 뭔가 내용을 건지려면 어원보다는 교양의 역사를 파고들어야 한다.
3. 교양의 역사
Bildung(교양)이 대두된 배경에는 근대 시민 사회가 있다. 과거의 신분제적 특권층(그러니까 귀족) 대신 사회의 주류이자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시민 세력(부르주아)은 그냥 돈 좀 벌었다고 저절로 세계의 지배자(the ruler of the world)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과거의 우리가 흔히 ‘군대 가야 사람 된다’고 했던 것처럼, 제대로 사람 노릇 하는 사람(그러니까 시민)이 되려면 뭔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근대인들은 그 ‘가르쳐서/배워서 (훌륭한/탁월한/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원형을 과거로부터 가져오면서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업그레이드를 했다.
아주 먼 과거로 가자면, 지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좀 단순했다고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보면 체구가 작고 간사하게 생긴 군주들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걸 볼 수가 있다. 부족국가를 배경으로 정복 전쟁을 펼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지도자라면 기골이 장대하고 잘 싸우는 인간이어야 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이렇게 기골 장대한 사나이(영웅)들에 대한 찬사가 가득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영화 《300》을 보라. 영웅은 공부 따위는 하지 않는 법, 몸 만드는 게 우선이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 지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달라지는 법이다. 참주 시대를 거쳐 민주화가 된 도시국가들(폴리스)은 곧 법정과 의회에서 말빨이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소피스테스들이 가르쳤던 게 변론술인데, 말하자면 이게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 끼기 위해 새롭게 요구된 자질이었던 것이다.
이런 실용적인 ‘자질’의 전통에 반기를 든 게 소크라테스다.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역할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모두 실용적인 ‘출세하기의 공부’에 인격적/문화적/윤리적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행정, 의전, 전투의 실용적 기술인 ‘육예’의 전통적인 교육에 ‘인’으로 대별되는 인격적 완성이라는 가치를 결부시킨다. 이제 ‘군자’, 즉 훌륭한 지배자(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단순히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소크라테스-플라톤 전통에서 파이데이아(교육)란 ‘탁월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어떤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한다는 의미에서의 기능적인 탁월함(훌륭한 장군, 훌륭한 구두장이 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탁월함’ 말이다.
로마 시대에 오면 키케로가 후마니타스라는 개념을 내세우게 된다. 이것이 파이데이아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후마니타스가 바로 인문학(the humanities)의 어원이 되는 단어인데, 단순하게 ‘사람됨’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의미를 상세화시켜 ‘훌륭한 사람의 미덕’이라고 풀어쓸 수도 있다. 키케로는 좋은 웅변가의 자질을 논하면서 이 후마니타스를 언급한다. 후마니타스는 단순히 타고난 인간의 자질이 아니라 공적인 생활에 필요한 미덕들을 말한다.
흥미로운 건 키케로가 이러한 미덕과 자질, 혹은 소양이 교육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를 위해 ‘좋은 글(bonae litterae)’을 읽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진짜 중요한 얘기는 다 나왔다. ‘좋은 글’(문)을 읽어 ‘훌륭한 사람’(인)이 된다. 인문. 원래 ‘인간 문화’라는 단어의 준말인 이 단어가 번역어로서도 훌륭하지 않은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가 이 후마니타스를 계승해 강조한 사람이다. 그는 ‘좋은 글’(문학 작품)과 함께 언어 3과의 교육도 같이 강조했다.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교육의 필수 교양 과목이라고 할 만한 ‘자유 교과(리버럴 아츠)’ 7과목이 정해졌다. 언어 3과(문법, 수사, 논리)에 수학 4과(대수, 기하, 음악, 천문)이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위마니즘)의 제창자인 페트라르카는 언어3과 + 고전적인 문학 작품의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서구 인문주의의 전통을 실질적으로 창시했다.
여기서 하나 물어야 할 게 있다. 키케로와 페트라르카가 말하는 ‘좋은 글’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하는 것이다. 왜 그 좋은 글을 읽으면 훌륭한 사람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지배자 집단은 사람을 다루는데 그 사람에 대해 알려주는 게 고전으로서의 좋은 글들이다. 이 글들은 ‘작은 인간들’-피지배층의 하찮은 사람들-을 다루지 않고 영웅과 군주에 대해, 그리고 미덕과 악덕에 대해, 집단으로서의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성격에 대해 가르쳐준다. 문학이건 역사건 철학이건 대체로 그 내용이 그러하다. 쉽게 말해 이런 글들을 읽으면 ‘마음을 써서 사람을 다스리는’ 인간이 되기에 필요한 소양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4. 누구의 교양인가
근대에 이르면 이 인문주의 전통이 변화를 겪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3과건 bonae litterae건, 다 극악하기 짝이 없는 고전어(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흥 상공인 계층에서 이런 한가한 고전 취향의 교육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소수인 귀족에 비해 시민은 다수였다. 지배자 집단의 규모와 성격이 달라졌으니 요구되는 자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16,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근대 시민 사회의 성장기에 인문 교양의 전통 역시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어 라틴어 문학 대신 민족어 문학이 성장하고, 문화의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고전들’, 새로운 취향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훌륭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상과 규범들이 정식화되어 갔다. 예를 들자면,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감성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낭만주의적 이상과 같은 게 근대 시민 사회가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특히 루소를 참조하라). 이제 ‘좋은 글’은 영웅과 군주가 아니라, 시민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다.
대략 근대 시민 사회가 성숙해지는 시기에 대학의 인문학과도 제도적으로 안착하게 된다. 법학, 의학과 같은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혹은 그것을 포함해서) 모든 학문이 ‘철학’이었던 시대는 먼 과거의 일이었다.
근대 초기에 ‘도덕철학’과 ‘자연철학’이 분리되더니 순식간에 분과학문 체계들이 생겨났다. 여러 학문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인문학과는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의 ‘텍스트’들을 다루는 분야로 정해졌다. 대학의 문학 연구는 의도적으로 근대의 문학 텍스트들이 ‘고전 문학’의 정당한 계승인 양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 덕분에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근대의 문학 작품들’을 읽는 게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인문학’이 가지는 위상은 대단했다. 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모든 학문이 철학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게다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이 ‘새로운 사회’는 가치관의 혼란과 변화를 조절하기 위해 문학의 이데올로기적(혹은 종교적) 기능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는 이를 ‘종교’ 대신 ‘문화’를 발명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중심에는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이 있었고, 이들이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들에 대해 지침과 가르침을 주는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유명한 표현을 빌자면 ‘나아갈 길을 가리키고 밝혀주는’ 하늘의 별들이 바로 인문학 교수들이었던 것이다. 문학 따위를 하면서도 시대의 나아갈 길을 밝힐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시대인가.
물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인문학의 위상은 19세기 말에 그 정점에 달했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급속하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서구(특히 미국의) 대학에서는 이 ‘인문 정신’의 소멸에 대해 우려하는 선각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이른바 ‘문화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시발점은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이라는 책이었다(물론 소개는 했지만 읽지는 않아도 된다).
간단하게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앨런 블룸은 네오 리버럴리즘의 정신적 스승으로 여겨지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였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고전(특히 플라톤)을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간단히 말해 앞에서 말했듯이 서구 인문주의의 정신이 결국 소수 엘리트들의 미덕을 훈육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블룸은 이 정신의 정통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블룸은 미국 대학에서 인문 고전을 읽는 서구 인문주의의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게 대단히 불건강한 징후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앞서 말한 책 외에도 루소의 『에밀』이나 플라톤의 『국가』를 직접 번역하는가 하면 세익스피어 읽기에 관한 짧은 책(『셰익스피어의 정치학』)을 쓰기도 했다. 만국의 엘리트들이여, 인문 고전을 읽자. 잃을 것은 시간뿐이고, 얻을 것은 고귀한 소양이다. 뭐 그런 거다.
이에 대해 그 엘리트주의적인 입장을 비판하고 나선 좌파 인문학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루카치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후) 인문학이 담당한 비판의 역할과 가치를 신봉했고, 소멸하지 말아야 할 인문 정신의 정수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두 입장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긴 했지만 결국 둘 다 인문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복고적이고 퇴행적인 입장에서 크게 다르진 않다고 볼 수 있었다. 이게(인문고전이) 사람한테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참 좋은 건데.
미국 인문학계를 양분한 치열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학의 인문 교육은 쇠퇴했고 (TV와 인터넷 덕분에?) 인문 고전을 읽는 것 자체를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독서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는 ‘길고 어려운 글’ 읽기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지금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가 얼마나 될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한국 사회도 저항의 시대에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하늘의 별 노릇을 했지만, 1990년대 이후 그 위상이 급속도로 시들었다. 강단에 자리를 잡지 못한 ‘주변 인문학자’들이 대중강의로 연명하기도 하고 비즈니스 리더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강단에서는 ‘인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간단히 말해 뭔가 잘난 척 하려면 문학 계간지 하나씩 끼고 다니던 예전 시대 같지 않다는 거다.
5. 그래서 어떤 교양인가
인문 정신이 쇠퇴한 것은 현실이다. 일단 여기서 출발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의 도입부에서 말했던 ‘강단 인문학’(의 부활)이나 ‘인문 교양 상품’(의 대중화)이 ‘인문 정신의 쇠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인지는 모르겠다.
왜냐면 결국 중요한 것은 인문 고전의 텍스트들과 그에 대한 연구의 전통을 지키는 게 아니라, ‘교양’의 정신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훌륭한 지도자/시민이 되기 위해 (공적인 삶에 요구되는) 소양을 기른다’는 정신 말이다. 과거에는 소수의 지배층을 위한 소양이었으나, 근대 시민 사회의 출현 이후 모든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지식과 소양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쓰이는 ‘교양’이 핵심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교양’의 정신이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부하 직원의 용인술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고 성공을 거두기 위한 자원도 아니고 상처 입고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위안의 제공도 아니다. 그것들은 교양을 쌓다보니 얻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일 수는 있겠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거다. 뭐 어느 시대나 근본에 힘쓰는 사람들은 소수인 법이겠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누구나 갖추어야 할 지식과 소양’이란 결국 ‘이상적인 인간형’이라는 이념과 가치를 전제로 한다. 한 사회의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지식과 소양이라면 ‘바람직한 사회’와 ‘바람직한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문제와 뗄 수 없다는 거다. 이 말을 풀자면, 결국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민주적 시민들이 어떤 소양을 갖추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인문적 전통, 혹은 인문 고전이란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사실 그런 거 안 읽어도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실용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공적 생활(public life)’을 중심에 놓고 인문학을 재구성, 재평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의 ’인문학‘ 수용 혹은 상품화는 이런 의미에서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면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문 고전을 접하고 활용하는 게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스펙으로서의 인문학‘(’인문학으로 리더가 되어라‘)이나 ’힐링 인문학‘을 비판하는 인문학자들조차도 결국은 고급스러운 처세담론을 인문학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공적인 삶‘을 전제로 교양의 정신을 논하는 인문 교양 저자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나.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교양 강의를 찾아 들어 보았지만, 그럴 듯해 보여도 결국 시시한 이야기들뿐이란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6. 우리 시대의 교양
어떤 맥락에서 ‘교양’은 ‘성공한 삶의 필수 액서세리’ 같은 걸로 쓰인다(‘교양 없는 것들 같으니.’라든가). 이런 걸 요구하는 소비자들이 있고 그에 부응해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도 있다. 잘 돌아가는 시장에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니니 그 쪽에 대해서는 더 이상은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이런 너절한 시장터에서 눈을 돌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지식과 소양이란 의미에서의 ‘교양’을 전파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찾을 때, 나는 강유원을 떠올린다. 그건 그가 헤겔주의자여서 그렇다. 그가 헤겔주의자라는 것은, 전공이 헤겔이라거나 헤겔을 떠받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옳다고 믿는 게 헤겔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은 19세기 근대 시민 사회가 성취한 정신사의 높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주체로서의 시민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온전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온전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교양(Bildung)의 핵심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가 행하는 일련의 강의들이 이러한 이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도 말했다시피 과거의 인문 고전들은 과학과 기술이 오늘날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대의 것들이다. 그는 이 한계를 알기에 본인은 과학 교양 서적들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남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전공의 한계로 인해) 인문주의자가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커리큘럼은 편향되어 있다. 지나치게 고급하고, 어쩔 수 없이 치우쳐 있다는 의미에서.
나 역시 그의 기본적인 입장에는 뜻을 같이 하지만, 보편적인 교양이라면 그 기초는 더 급진적으로 재규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조금 조악한 설명이지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 어머니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셨는데, 평생을 일을 하면서도 가끔 손에 들어오는 책은 끝까지 읽는 분이시다. 내가 사와서 집에 굴러다니는 소설책 몇 권을 읽으시길래 감상을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얜 사기꾼 같다.”(이문열 소설) “얜 연애 얘기밖에 할 줄 모르니?”(윤후명 소설이었다) “이 아줌마는 너무 높은 곳에서 세상을 봐서 나한테는 안 맞더라.”(오정희 소설). 결국 우리 어머니가 고른 것은 박완서 소설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이 이렇게 간단한 직관적인 느낌으로 응축된 것일 게다.
문예 사조의 역사나 문학 이론에 대해 공부하는 것보다, 이런 안목을 가지는 게 교양의 기초에 더 가깝지 않을까. 어차피 모든 지식은 인식과 판단, 행동의 기초로 우리에게 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할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 없이) 적절한 안목을 갖추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난 이런 게 보편적인 교양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학문’이나 ‘문화예술’이라는 고급문화(하이컬쳐)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없다. 교양을 말하기 위해 하이컬쳐로부터 출발하는 게 지식인의 병증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하이컬쳐는 엘리트들을 위한 교양에 포함된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식인 사회와 밀접한 삶을 살아간다면 하이컬쳐의 유산을 두루 섭렵하고 소화하는 게 필수적일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2차적인 의미에서의 교양일 뿐, ‘만인을 위한 교양’일 수는 없다(물론 블룸은 그게 더 중요하다고 보겠지만).
결론을 서둘러 내려야 할 지점에 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 근본적인 의미의 교양,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교양이라고 생각한다.
1. 다른 사람들(특히 자신보다 못한)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며 사는지 아는 것. – 이걸 모르면 꼰대가 되기 쉽다.
꼰대란 아랫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는 촉각이 퇴화된 병리적인 인간들을 말한다. 최근의 인문학 리더 담론의 일부는 괴상하게도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이해하고 따를 것을 강조하는데(아마도 목표가 ‘윗사람되기’여서 그럴 것이다), 고래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주지 못해 생긴 문제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몰라서 생기는 문제가 더 컸다.
권위란 말로 번역되는 auctoritas(authority의 어원)는 원래 ‘생육시키는 (신적인) 힘’이란 뜻이다. 자기 그늘에 있는 존재들을 생육시키면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법이다.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리더의 심정을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에 무슨 리더의 자질이 있겠나.
2. 앞의 1과 밀접한 것인데,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의 기대와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하지만 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로 인해 상처받는다. 이게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 병리적인 국뽕이 만들어진다. 사실 이 점에서 교양을 갖춘 국민 문화는 거의 없긴 하다. 대체로 거의 모든 국가 정체성은 병들어 있다. 다만 한국은 조금 더 심각한 편인데, 자기비하(‘개한민국’)와 신화화(‘위대한 상고사’)가 공존하는 이 문화에서 건강한 시민 되기는 정말 어렵다. 사실 인문학적 힐링이 필요한 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3. 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들에 대한 유물론적인(객관적인) 인식. – 돈, 숫자, 제도, 규범과 행태, 과학과 기술 등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사회의 주인이라면 제 집안 살림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걸 포기할 때 우리는 마음 편하게 합리적 판단이라는 시민적 의무를 방기하고 음모론으로 종교적 귀의를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좌파적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집단에서 이러한 교양의 결여는 더 심각하다. 대안을 생각하고 제시해야 하는 건 그쪽이니까. 전문가들의 숫자 놀음에 대해 “그런 건 모르겠고 아무튼 너희들이 나쁜 놈”이라는 속 편한 진영논리로 대응하는 게 습관이 되면 나중에는 어떤 자료도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4. 올바른 사고를 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 – 3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는 한데 ‘합리적 사고’를 위한 몇 가지 원칙들을 말한다.
이건 혼자서만 갖추면 세상 살기가 매우 힘들다. 알다시피 논리의 칼날은 무지의 갑옷을 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증의 기초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별 근거 없이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누가 비판을 제시하면 “님 생각을 강요하지 마셈.”이라고 대응하는 종류도 여기에 해당한다. 자기 모순 금지(금반언)의 원칙이 뭔지는 알고 사는 게 우리 모두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
5. 민주적 공동체를 위한 도덕적 규범들. – 서로에게 요구하고 스스로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할 공동의 규범들이 무엇인가. 그 기초부터 하나씩 고민해 보는 게 교양의 핵심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규칙은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만 규범을 요구하고 자신은 요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비민주적 작태야말로 무교양의 출발점이다. 이 문제는 다시 1의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이런 관점에서 아주 탁월한 무교양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누구보다 탁월한 무례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 없다고 지랄을 하는 것 같은 경우 말이다.
물론 이 항목들은 더 상세하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글이 길어졌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이 ‘우리 시대의 교양’의 내용을 함께 더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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