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이 2019년 내놓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7시 40분경 발생한 이른바 10.26 사태를 다룬다. 10.26 사태를 다룬 영화는 <남산의 부장들> 말고도 한석규과 백윤식이 출연한 임상수 감독의 2004년 작품 <그때 그 사람들>이 있다. 영화 말고도 10.26 사건을 다룬 소설과 다큐멘터리도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현대사에서 10.26 사건은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극적이고 흥미진진하고 결정적인 사건인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1979년 10월 26일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이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과 함께 연회를 즐기다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함으로써 20여 년에 걸친 박정희 군부 권위주의 체제는 막을 내린다. 이 자리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절대 권력자의 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성 연예인들이 초대(?)되었고, 이제 막 대학생 가수로 인기를 끌던 심수봉과 광고모델 신재순이 함께 했다.
왜 <남산의 부장들>인가
김충식 기자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시대 권력의 핵심 기구인 청와대와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최고 권력자들의 은밀하고 어두운 권력투쟁과 대통령에 대한 충성경쟁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영화 속에서는 박정희 시대 최고 권력기관이자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는 이병헌이 맡은 김규평이란 인물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용각(곽도원 분)으로,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곽상천(이희준 분)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 그 사람들>도 매우 탁월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을 영화를 통해 우리 정치사를 이해하려는 기획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남산의 부장들>이 보다 최근에 나온 영화라는 점, 10.26 사태의 본질을 김재규 개인의 우발적 사건으로서 다루기보다는 권력기구 내 지배 엘리트의 갈등과 균열 속에서 파악한다는 점,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중앙정보부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보다 입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박정희 정권의 본질과 실체를 조금 더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성민 분)이 쓰러지는 바로 이 10.26 사건이 발생하기 약 40일 전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그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와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실정을 폭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원작 소설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와 한 무리의 군인들이 자신들은 ‘혁명’이라며 일으킨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에서 시작해서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에 이르는 약 20여 년 간의 박정희 독재시대 전반을 서술하고 있지만, 영화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하원 청문회 증인석에 서는 때부터 10.26 사태 발생까지 약 40일의 시간을 설정해서 보여준다.
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 부장이란
한때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해 중앙정보부 부장으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김형욱은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에 성공하고 유신체제의 수립으로 장기 독제체제를 완성한 후에는 그 폭력성과 부정축재 의혹 때문에 박정희의 눈밖에 나게 된다. 영화를 보면 김형욱이 박정희의 지시로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잔혹한 테러를 가한 뒤 문제가 되자 박정희는 김형욱을 버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의 사례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김형욱은 박정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박정희의 관용을 구했으나, 오히려 빼돌린 비자금을 내놓으라는 추궁을 당할 뿐 철저히 배신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김형욱은 박정희의 신임을 잃어 1969년 중앙정보부 부장 자리를 김계원에게 내어준다. 그가 바로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차지철과 함께 궁정동 술자리 현장에 있었던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다.
1972년 유신체제 수립 이후에는 국회의원 자리도 잃고, 유신정우회에서도 제명되자 김형욱은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1976년 한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자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영화에서처럼 김형욱이 미 언론과의 인터뷰와 하원 청문회 등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중앙정보부의 수많은 정치공작을 폭로하고 그 궁극적인 책임을 박정희 정권의 장기 독재에 있다고 고발하자 박정희는 김재규를 시켜 그를 국내로 소환하려는 정치공작을 시도한다.
영화에서는 김형욱이 집필 중이라는 회고록 『혁명의 배신자』를 출판 전에 입수하기 위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워싱턴에 급거 파견되어 회고록 원고를 받아왔지만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라인의 정치공작에 의해 그 회고록이 일본 언론에 유출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결국,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김재규는 한때 ‘혁명의 동지’였던 김형욱을 프랑스에서 암살한다. 이때, 김재규가 김형욱의 처리 방안을 박정희에게 묻자 박정희 대통령이 이렇게 말한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곁엔 내가 있잖아.
영화에서는 김형욱이 김재규가 보낸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쫓기다 프랑스 어떤 시골 마을에서 살해되어 시신조차 사료 분쇄기에 의해 분쇄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사실 김형욱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영화처럼 프랑스의 한 시골 목장에서 잔혹하게 살해되어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갈기갈기 갈렸다는 설과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박정희가 직접 카빈총으로 사살했다는 설 등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과 가설이 떠돈다.
남산의 부장들의 진정한 역할은
박정희 등 소위 ‘혁명 세력’은 5·16 군사 쿠데타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킨다. 그리고 그 즉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미국의 CIA를 본떠 자신들의 혁명과업에 장해가 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보수집·범죄 수사 기구로 ‘중앙정보부’를 설립한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는 ‘KCIA’라고 불리기도 하고 ‘남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보기관의 외양을 갖추긴 했지만, 중앙정보부는 검찰보다 더 상위의 수사권을 갖고 모든 검찰 및 경찰, 군 정보기관의 정보를 장악하여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권력유지에 필수적인 정치공작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 책임자로는 초대 김종필부터 김형욱, 김계원, 이후락, 김재규 등 박정희의 측근인 육사 출신 군인들이 있다. 전두환은 12.12. 쿠데타 이후 10대 중앙정보부 부장에 취임한다.
중앙정보부의 핵심기능은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세력을 조기에 찾아내 감시, 통제하고 제거함으로써 정권 불안요인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법 도청, 미행, 납치, 수색과 잔인한 고문 등 인권유린 행위는 폭넓게 자행되었고 그 폭력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김형욱이 재미교포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 분)과 손을 잡고 미 하원에서 박정희 독재의 비리를 고발하고, 김재규를 이용해 박정희 제거를 위한 CIA 공작에 가담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폭로와 고발을 계속하면서, 마치 자신이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는 민주투사인 듯한 행보를 이어간다.
하지만 사실 김형욱도 민주주의와 인권 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최고 정보기구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등 각종 시국 사건과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과 같은 무자비한 정치공작과 테러를 기획하고 감행한 잔인한 인물이었다.
국가 정보기관의 폭압성은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 개인의 성격상의 기질 뿐만 아니라,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유신독재는 폭력적 억압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애초에 독재정권의 유지가 정보기관의 핵심 기능이었으니까.
이런 점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장으로 권력의 핵심부에서 있던 인물들의 생각을 통해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의 본질을 파악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1960-1970년대의 독재 18년은 중요한 시대다. 그 18년을 지배한 정점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할 정도로 권력을 누렸던 중앙정보부에 대해 1990년대까지 모든 매체가 보도를 꺼렸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막중한 권력을 휘두른 이들에 대해 기자가 보도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 생각해 사명감을 갖고 집필을 시작했다.
<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자 김충식 기자는 자신의 집필 동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정희 시대에 흔히 ‘남산’이라 불린 중앙정보부는 초헌법적 절대 권력기구로 군림하면서 수많은 정치공작과 정치탄압을 통해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을 지탱해 왔다.
군부 권위주의 체제인 박정희 유신체제의 성격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전형적인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 regimes)란 스페인의 정치학자 후안 린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기본적으로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나타내지만, 독일 나치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는 다른 또 다른 정치제제를 뜻한다. 후안 린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정권이나 아시아의 개발 독재 국가,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부 등을 이러한 권위주의 정권에 포함시켰다.
권위주의 체제의 특징은 민주적 정치참여나 복수정당제가 부정되지만, 단일정당과 대중 동원은 부재한다. 한정된 범위에서는 다원주의가 허용되는 정치체제다. 따라서 권위주의 군부독재 체제로서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시대 최고 정보기관이자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역할과 기능을 이해해야 하고, 그 수장인 중앙정보부 부장의 행태를 파악해야 한다.
전두환이 설치한 합동수사본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0·26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최고 권력자 박정희를 둘러싸고 충성 경쟁을 벌이다 비롯한 우발적인 사건이다. 이 갈등은 영화에서도 잘 묘사된다. 박정희의 신임을 믿고 거친 행동과 막말을 일삼는 차지철과 냉정하게 정세를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김재규가 대비된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으로 인해 부산, 마산 등지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한 항위시위가 격렬해지는 이른바 ‘부마항쟁’에 대한 대응 방안을 놓고 두 사람의 대립은 극에 달한다.
영화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로 시민들을 밀어버리자는 차지철과, 김영삼 제명을 철회하고 야당과 협상을 벌여야 하며 계엄령을 선포하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김재규의 입장이 대립한다. 이 과정에서 김재규는 점차 박정희의 신임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전임자들의 최후가 그랬듯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박정희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는 것이 10.26 사건에 대한 통상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10.26 사건은 단순히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집권 지배세력 내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균열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깊은 사회구조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중남미나 아시아의 군사독재 정권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 엘리트들은 민주적 정당성의 부재라는 태생적 결함을 급속한 경제성장과 물질적 성공을 통해 보완하려고 한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재임 당시 군부 독재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목표로 소수 엘리트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와 막후 조정기능을 가진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주요 정책을 조정해왔다. 이런 통치 시스템과 권력구조는 만성적인 부정부패와 곧바로 연결되었고, 그 부정부패의 주인공들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소위 ‘혁명 동지’들이었다.
정보와 자원, 권력을 독점한 군부 엘리트 지배세력은 강남 개발 등과 같은 각종 경제정책을 통해 손쉽게 부를 축적하고 부정을 저지를 수 있었다. 지배 엘리트의 자원 독점과 부패의 반대편에서는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세력의 거센 도전과 저항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듯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는 1970년대 후반 제2차 석유위기가 촉발한 경제위기와 맞물려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20년에 달하는 권위주의 강압 통치에 대한 극심한 저항, 권력기구의 인권유린과 민주화 세력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 불러 일으킨 미국과의 정치적 불화 등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누적된 모순이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이라는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면서 유신체제는 큰 위기를 맞았고, 극에 달한 지배 권력 엘리트 간의 갈등과 반발이 결국 10.26 사건으로 터져나왔다. 김재규에 의한 차지철의 제거,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 체제가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사건 당일인 1979년 10월 26일 오전, 삽교천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박정희와 차지철, 김계원 비서실장이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한다. 함께 가려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을 차지철이 막아 세우자 김재규가 분노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 결단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가 탄 헬기가 착륙할 때 호텔 사육장에서 키우던 사슴들 중 새끼를 밴 암사슴 한 마리가 헬기의 소음과 강풍에 놀라 날뛰다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고 즉사했다고 한다. 이는 그날 저녁 박정희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일화로 전해져 온다.
영화에서는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지는 연회에 김재규 부장도 참석하라는 박정희의 말을 전하고, 김재규 부장은 자신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한다.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궁정동으로 불러놓고 갑자기 대통령과 연회가 잡혔다며 궁정동 안가의 식당에서 중앙정보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으라고 정승화 참모총장을 붙잡아 놓는다. 이는 박정희를 암살한 곳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함께 하여 육군이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모양새로 보이게 하려는 김재규의 노림수로 파악된다.
영화를 보면 김재규는 궁정동에 먼저 도착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자 먼저 자신의 의중을 털어놓는다.
그 친구 해치워버릴까요?
그러자 평소 차지철의 만행을 가까이서 목격해 온 김계원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시간, 김재규의 심복인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광고모델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을 데리고 안가에 도착했다.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포병대령도 무좀 때문에 새 신발을 사서 신고 현장에 도착했다. 김재규가 거사 직후 정신없이 육본으로 향하던 중 맨발인 것을 알게 된 박흥주가 바로 이 새 신발을 김재규에게 건네 갈아 신게 한다. 저녁 6시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도착하자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만찬이 시작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김재규는 만찬장을 빠져나와 50m가량 떨어진 본관(김재규 집무실) 1층 식당에서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정승화를 만난다. 각하와 만찬이 끝나는 대로 오겠다는 말을 전한 뒤 자신의 집무실에 숨겨둔 권총을 챙겨 나왔고, 이때 마주친 자신의 심복 박선호와 박흥주에게 박정희 암살 계획을 오늘 저녁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한 뒤 중정 요원 몇 명을 더 준비시켜 총성이 울리면 청와대 경호실 경호원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박선호는 자기가 신임하던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 예비역 해군 보병 하사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만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이기주는 나중에 동원된 안가 경비원 김태원과 함께 차지철과 운전수,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맡았다.
7시 30분경 준비가 완료되자 박선호는 안가 지배인을 통해 김재규에게 전화가 왔다는 전갈을 전했고, 이에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뒤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간다. 영화에서는 김재규가 술잔을 가득 채우며 죽은 김형욱의 죽음을 언급하고, 박정희에게 ‘혁명의 대의’에 대해 묻으며 분노를 유발하는 것으로 암살 직전의 상황을 그린다. 마침내 김재규는 차지철을 향해 분노의 일격을 발사하고, 격노한 박정희가 소리치자 박정희의 가슴에도 권총을 발사한다. 이때 밖에서도 김재규의 부하들이 총소리에 놀란 청와대 경호실 경호요원들을 차례로 사살한다.
김재규가 쏜 총알에 손을 맞고 놀란 차지철이 달아나려 하자 김재규가 쫒아 가 다시 차지철에게 권총을 쏘려 한다. 하지만 격발장치 이상으로 총은 발사되지 않고, 순간 정전이 발생해 차지철은 현장에서 달아난다. 김재규는 연회장 밖으로 나와 부하들에게 다른 권총을 전달받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달아나던 차지철의 복부를 저격하고, 연회장에 쓰러진 박정희의 머리에 마지막 총알을 발사하여 거사를 마무리한다.
거사를 끝낸 김재규가 부하들과 김계원에게 현장 수습을 맡기고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승화와 함께 육본으로 향한 것은 10.26. 사건의 최대 미스터리이자 김재규의 최악의 한 수였다.
처음에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가려고 출발했으나, 정승화가 육본으로 가자고 권하자 잠깐 고민하더니 차를 돌려 자신의 본거지가 아닌 육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당시 정승화와 함께 중정으로 갔다면 사태를 수습하면서 거사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아무도 김재규의 계획에 반발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김계원도 박정희 암살까지는 아니어도 차지철 제거에는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황에서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차지철에게 뒤집어 씌워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주도면밀한 후속 계획이 없었던지, 아니면 막상 자신이 저지른 ‘거사’의 충격에서 본인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신발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하고 육본으로 간다. 거기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범인 것을 알아차린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보낸 병력에 의해 체포된다. 그렇게 10.26의 거사는 1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두환이 청와대 금고를 털어 금고 속의 금괴와 함께 박정희의 스위스 비자금 계좌를 챙겨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이후 보안사령관으로서 김재규를 조사한 뒤 미국의 지원을 받고 김재규와 함께 하는 반란 세력이 없음을 확인한 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 금고를 털어 나가려던 전두환의 마지막 시선은 청와대 집무실의 대통령 자리에 오랫동안 머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40일 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최고 권력기구 책임자들의 냉혹한 사투와 갈등, 비열한 권모술수와 배신을 그린다. 이를 통해 박정희 군부 체제의 폭압과 무자비한 독재 정권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소 손색이 없다.
10.26은 박정희 유신 독재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폭발한 결정적 시점이다. ‘남산’으로 대변되는 독재정권의 최고 정보기구가 전면적 사회통제와 반대세력 제거라는 핵심 역할을 담당한 기구라는 점에서 구체적 사안을 통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시대의 종말뿐 아니라 박정희 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전반적인 이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봐야 할 영화이다.
원문: 꿈공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