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 소설을 쓴 정세랑 작가. ‘유퀴즈’에 출연해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정작 소설가 정세랑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정세랑 작가의 대표작 4권을 소개해본다. 소개하는 4권만 읽어도 정세랑 작가의 책 좀 읽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정세랑이 궁금하다면?
정세랑 월드의 입문서로 추천! 『지구에서 한아뿐』
외계인과의 러브스토리라니? 이토록 당당하게 황당무게한 이야기를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작가는 단연코 정세랑 뿐일 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설정은 아마 이 책으로부터 시작이 된 건 아닐까? 『지구에서 한아뿐』은 정세랑 작가가 스물여섯 살에 처음 쓰고 서른여섯 살에 다시 고쳐 쓴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10년 동안 정세랑 작가가 아낀 소설이라는 뜻.
지구와 환경을 사랑하는 한아. 한아는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유학 가서 더 공부를 하는 대신 옷 수선집을 차린다. 그녀에겐 만난 지 11년 된 동갑 남자친구가 있다. 평소 무뚝뚝하고 챙겨주지도 않는 무심한 남자친구 경민.
어느 날, 경민이 유성우를 본다며 캐나다로 떠났다 돌아오니 180도 달라졌다. 그렇게 무심하던 경민이 뭔 일인지 친근하게 얘기하고 요리도 해주며 사근사근해진 것이다. 한아 친구에게 갑자기 프러포즈를 한다며 조언을 구하기까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사근사근하게 변한 남자친구가 결코 싫지 않은 한아. 경민의 집에 놀러 간 한아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경민의 입에서 초록색 광선이 뿜어져 나오더니 페트병을 쓱 스캔한다. 도대체 캐나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180도 바뀐 남자친구,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색 광선, 이게 다 뭐지 싶지만 정세랑 작가라 가능하다. 남자친구가 외국 여행 갔다가 외계인으로 돌아왔다는 설정 말이다. 황당하지만 ‘미드’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재밌었다. 장담컨대, 『보건교사 안은영』 다음으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단연 『지구에서 한아뿐』이 아닐까.
넷플릭스 오지리널 드라마의 원작, 『보건교사 안은영』
2020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최고의 흥행작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 소설이다. 정세랑 작가만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자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다. 아마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후식 커피를 마시듯 자연스럽게 읽게 되는 작품일 것이다.
주인공 안은영의 별명은 ‘아는 형’. 학창 시절에 친구들에게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 받았던 과거가 있다. 원래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밤마다 젤리(?)를 퇴치하는 게 힘들어 사립 M 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옮긴다. 안은영 선생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통 젤리 형태로 보인다. 다양한 젤리 중 공격하는 젤리도 있는데, 그럴 땐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으로 퇴치한다.
어느 날, 뭔가에 물려 아프다는 학생이 나타난다.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안은영 선생은 우연히 학교에 있는 지하실을 발견한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그곳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출입 금지 구역. 안은영 선생은 독특한 기운에 이끌려 지하실 문을 열게 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봉인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도 재밌었다. 마지막까지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와 독특한 소재, 정세랑 작가 특유의 분위기까지. 정세랑 소설 중 최고로 손꼽고 싶다.
소설가 정세랑의 마음이 담긴 『시선으로부터,』
얼마 전 나혜석 화가가 등장하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인텔리였으나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보고 난 뒤부터 머리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팠는데 이 책을 읽고 바로 나아졌다. 그 책은 바로 정세랑 작가의 최신작 『시선으로부터,』였다.
심시선 여사는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가족의 몰살을 겪고 하와이로 건너가 허드렛일을 하다 화가의 꿈을 위해 독일로 가는 등 파란의 생을 펼쳐간다. 세상은 그녀를 남성 앞의 약자로 몰아가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위장된 폭력에 맞서고 남편들의 입장을 존중하며 자신의 삶을 열어간다.
그런 그녀가 있었기에, 인습에 매몰되어 제사 지내지 말라는 유지에도 그녀의 자녀, 손주들은 시선의 10주기를 위해 그녀의 젊은 날이 있었던 하와이로 모인다. 이 역시 제사처럼 강요된 절차가 아니어야 하기에 가족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하와이다운 제수를 모아 제사를 지낸다.
그 안에 담긴 시선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에는 가슴 저린 부분도 많지만 정세랑 작가의 주인공들은 어떤 곳에서든 올곧다. 무엇보다 진정 모계사회로의 회귀가 지금의 이 폭력으로 얼룩진 지구를 구하는 길은 아닐까 하는 깊은 고민을 하게 했다. 심시선 여사의 이름뿐 아니라 모든 비틀린 시선으로부터 차별받는 모든 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랐을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한 권이었다.
주인공만 50명 등장하는 독특한 소설 『피프티 피플』
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끝이 났다. 그러는 동안 우리 뇌리에 가장 많이 남은 이들이 누굴까 생각해보면 하얀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선한 영향으로 병원 관계자들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을 때, 나에게 병원과 병원사람들에 대해 가장 진솔하게 들려준 책이 있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다. 엥? 의사가 쓴 책이 아니라 소설이라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묻지도 말고 읽어보시길.
이 책은 50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로 유명했다. 차례 역시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말 그대로 피프티 피플인 셈이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책 주변의 유명세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전하는 가슴 뜨거운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하나로 엮여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동은 그야말로 작가님이 천재라는 말로밖에 표현 못 한다.
50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여기저기서 조금씩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 모습뿐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도 그 안에 담겨 있다. 뉴스에 보도된 가습기 살균제 기사에 분노하면서 한규익 씨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가슴 아파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소설 한 권의 힘이 이토록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고 싶은 사연을 열어 읽는 나만의 애착 도서다.
원문: 명랑 소년의 일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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