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이 고픈 이유
‘코로나블루’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목이 늘어난 티를 몇 년째 버리지 못하면서도 여행의 플렉스만큼은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지만 쓰는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는 것만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 그 기쁨을 억누르고 있는 사람이 나뿐일까.
낯선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요즘. 지난 여행의 기록들을 자주 꺼내어보게 된다. 모름지기 사진부터 찍고 봐야 한다는 유명 관광지의 모습은 물론이고 찍은 이(=나)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난해한 사진들이 마구마구 뒤엉켜 있다.
눈길이 오래 머물고 여행이 더 고파지는 것들은 대체로 후자의 사진들이다. 현지인에겐 익숙하지만 이방인에겐 낯설고 신기한 것들. 특이한 모양의 지하철 손잡이부터 위험을 알리는 이색적인 경고판까지. 초점이 흐리고 구도도 엉망인 이 사진들은 불현듯 오래전 읽은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평상시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기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해외 직구로 못 사는 게 없는 세상이 되었고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먹거리를 이제 다음날 새벽이면 집 앞까지 배송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발품을 팔아 물건을 사고, 겁을 내면서도 숟가락을 들고 맛을 보는 여행의 기쁨을 온전히 채워주지는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낯선 것을 찾아 ‘떠나는’ 행위일까 낯선 환경에서 ‘도전하고 발견해내는’ 그 무언가일까.
2. 관점을 바꾸는 여행, 관점을 바꾸는 시장조사
여행의 목적이 뚜렷하기란 쉽지 않다. 나처럼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날 것이다. 물론 반드시 ‘보고자’, ‘먹고자’, ‘사고자’ 하는 게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얻고자’하는 목적성을 구체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행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한다. 그로부터 얻은 영감으로 일상이 더 풍요로워지는 경험이 반복되면 여행에 중독되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긍정적인 여행의 경험은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여 ‘써먹고자’ 하는 시장조사와 닮아있다.
A. When 언제 떠날까? (=시장조사는 언제 하나)
지친 나를 위한 재충전의 여행
참 달콤한 말이지만 완전히 방전되어 있을 때는 여행이고 뭐고 달갑지가 않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많이 보고 느끼며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고효율의 여행을 위해서는 티케팅과 숙소 예약, 장시간의 비행과 같은 수고로움을 기꺼이 행하고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일단 떠나고 보기에 급급한 여행은 또 어떠한가. 오로지 일탈만을 목적으로 한 여행은 충동적인 소비와 같은 후회를 남길 가능성이 높고, 생각보다 많이 남은 연차를 어떻게든 소진시키기 위해 떠나는 ‘무작정 여행’은 우왕좌왕 겉핥기만 하다 끝나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장조사도 마찬가지다. 촉박한 일정 속에 빠른 결론을 필요로 하는 시장조사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무수한 보물이 숨어있는 현장을 찾는다 한들 내가 보고 싶은 것, 이미 정해져 있는 결론의 데이터가 될만한 것들만 가려서 보게 된다. 뜻밖의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활용해볼 여유를 느낄 틈이 없다.
30여 년째 마케팅 실무에서 뛰고 있는 ‘김수진Works’의 김수진 대표는 생각을 깨우는 시장조사는 ‘평상시’에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장에 닥친 어떠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평상시의 습관, 라이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본업을 내팽개치고 매일 낯선 곳을 찾아 떠나라는 말이 아니다.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을 요리조리 관찰하고 뒤집어보는 ‘여행자의 눈’을 겸비하라는 것.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평범한 일상을 달리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장을 발로 뛰며 경험을 쌓는 것이 효과적이다. 김수진 대표는 누적된 경험과 시간의 절대량을 이길 수 없다고 강조하며 아쉬운 빈틈은 독서로 매우길 권유한다.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효과적인 독서 방법도 있다.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김수진식 독서법
- 목차를 달달 외워 씹어 먹어라! 책의 구조부터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 주제별로 엮어보라!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 읽으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너무 어려운 책은 읽지 마라! 도무지 안 읽히는 책 or 너무 쉬운 책은 과감하게 패스~
- 글로 기록하거나 말로 리뷰하라! 쓰고 말해야 정리가 되고 정리가 되어야 내 것이 된다
B. Where, 어디로 떠나야 할까?
떠나고 싶은 여행지는 수없이 많고 꽤 자주 달라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주로 현실과 대조되는 상황에 놓인 여행지를 자주 갈망했던 것 같다. 가령, 기나긴 추위에 지친 초봄에는 봄꽃이 일찍 피는 일본의 후쿠오카를. 커다란 빌딩 숲과 닭장 같은 오피스텔을 오가며 ‘빨리빨리’를 되뇌는 일상이 반복되면 태국의 치앙마이가 그리워진다. 정확하게 따지고 보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과 문화가 그립다.
다소 요란하게 봄꽃을 즐기는 후쿠오카 사람들의 상기된 모습,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다 일어나는 치앙마이의 직장인들. 그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여행뿐만 아니라 시장조사의 중심에도 ‘사람’이 있다. 좋은 것을 베끼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쉬운 우리의 ‘경쟁사’만이 조사하고 비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고객이라고 정해놓은 성별, 연령대가 좋아할 만한 ‘모든 것’으로 카테고리를 넓혀야 한다. 그래야만 고객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리는 색다른 무언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 즉 ‘사람’의 발길이 닿은 현장에는 또 다른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관찰해야 할 공간과 경험해야 할 상품과 서비스 뒤에는 모두 다 사람이 있다. 무언가를 일구어 내게 한 그 사람의 역사와 이야기.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고민의 흔적과 세심한 헤아림을 찾는 것이 시장조사의 진짜 목적이다.
C. What,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까?
2~3년 전, 홀로 일본의 교토를 찾은 적이 있다. 두 번째 찾은 교토였다. 첫 여행 때는 여행서와 블로그에 나와 있는 관광지를 찾아 헤매느라 교토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두번째도 블로그와 책으로부터 100% 자유로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의지하지만은 않았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니 더 많은 게 보였다. 만약 내가 블로그에 나와 있는 교토의 맛집 탐방에만 급급했다면 나는 현지 가족들에게 인기인 푸짐한 샐러드 전문 레스토랑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카모가와 강가에 앉아 오랜 시간 사색하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을 관찰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녀를 관찰한다는 핑계로 몇 시간 동안 멍을 때리는 호사도 누렸다.
위 사진이 유독 마음에 남는 걸 보면 그때 내게 필요한 건 아마도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닌 머리를 비우는 것이었나보다. 지금도 조용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교토가 그리워진다.
구체적인 목적 없이 떠나는 힐링 여행과 달리 시장조사는 ‘조사’라는 단어를 명명하는 것만으로도 어떠한 목적이 생겨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또 조사를 한다. 일명 시장조사를 위한 사전 조사. 시장조사라는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시장을 찾기도 전에 조사부터 하고 보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그곳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SNS를 염탐하고 책 속에 나와 있는 저자의 경험을 참고해 계획을 세운다.
물론 효율 측면으로만 생각하면 이 또한 가치 있는 정보들이.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 ‘참고만 해야 할’ 데이터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망각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순간! 우리는 저자의 프레임에 갇힌 현장을 보게 될 것이고 ‘좋아요 수’라는 평가에만 의존해 새로운 무언가를 찾지 못할 것이다.
김수진 대표의 말처럼 SNS에서 본 건 내가 본 게 아니다. 적어도 생각을 깨우는 시장조사에 나섰다면 SNS에 인기인 맛집 대신 유독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는 식당을 찾아야 한다. 그래도 유명한 곳을 꼭 들려야겠다면 ‘와~ 역시!’하고 감탄만 할 게 아니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이 인기가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와 같은 ‘나만의 질문’을 품어야 한다.
D. How,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곱씹어 보면 여행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일에 직접적으로 써먹은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지역 문화와 상생하는 콘텐츠’라는 주제로 한 기업의 사내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각 지역마다 특산물을 내세우던 일본 소도시에서의 경험을 활용했고, 태국의 이색적인 환경보호 활동을 다룬 뉴스레터를 만들 때는 방콕 게스트하우스에서 알게 된 ‘3S(편안·Sabai, 재미·Sanook, 편리·Saduak)문화’를 소개했다. 그나마 짧게라도 메모해둔 게 있었길 망정이지 이조차 없었다면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김수진 대표는 보고 느낀 것을 써먹기 위해서는 사실(본 것)을 영감(느낀 것)으로 확장시켜 분리하고 구체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분류와 정리 과정을 거쳐야만 현재와 맞닿아 있는 요소를 효과적으로 찾아낼 수 있고, 혹은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현장을 시간의 순서대로 보관하는 것과 같은 정리 작업은 ‘구글포토’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재료들 사이에서 나만의 레시피로 국거리용, 샐러드용, 조림용 등으로 쓰임에 맞게 분류하는 일은 누군가 대신할 수 없다.
가급적 언제 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기록해 두어야만 1년 뒤, 2년 뒤라도 써먹을 수 있는 ‘나만의 데이터’가 될 수 있다.
3. 엄청난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시장 조사’는 마케터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만의 색깔과 방식을 덧대 내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어느 직군, 누구에게나 필요한 프로일잘러의 필수 요소이다.
시장조사라 이름 붙이긴 뭣하지만 강의를 듣는 내내 지난 여행들을 들추어내니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해진다. 시간이 없고 일정이 촉박하다는 변명으로 블로그에만 의존했던 순간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여기에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막연함까지 더해지니 더 설레고 간절하다. 준비단계부터 기록의 순간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엄청난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아직 가보지 못한 여행지는 많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보물은 더 많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보는 새로운 관점을 키워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아낸다면 우리의 일상은 한층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엄청난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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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강의를 누가 들으면 좋을까요?
- 우리의 조직이나 회사가 더 커지길 바라는 분
- 마케팅과 브랜드, 업의 본질의 관점을 세우고 싶으신 분
- 경영과 마케팅, 브랜딩이 결국 다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