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리겐차는 세상을 비판하고, 기존 질서를 뒤엎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양동신은 이들에게 묻는다. 아파트가 어때서? 토건이 뭐가 문제인데? 그의 반문에 인텔리겐차들은 머뭇거린다.
그들은 양동신처럼 터널을 만들어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을 짓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의 산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혁명적으로 개선하는지는 외면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어때서”라는 평범한 되물음이 우리를 진정한 성찰로 이끄는 까닭이다.”
-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아파트가 어때서』에 부치는 말
콘크리트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칙칙한 도시, 자연과의 단절, 환경파괴, 비인간적인 회색빛 구조물…. 보통은 이런 말들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우리가 콘크리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쉽지 않다. 학창시절부터 배운 게 그랬다. 우리는 유유자적한 자연 속의 삶, 민족의 유구한 역사, 추상적이고도 드높은 유교적 미덕을 주로 암기했다. 토목공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이상 콘크리트는 ‘현대문명의 찝찔한 부산물’ 정도로 인식되기 십상이었다. 그게 도대체 뭐가 중한디?
중요하지 않으니, 아니, 중요하지 않다고 인식되니, 이를 우리 사회의 인문교양으로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없다. 그러면?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우리는 가끔 언론 헤드라인으로 뽑히는 ‘콘크리트로 덮인 도시’, ‘콘크리트가 당신을 위협한다’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에 속으로 혀를 찰 뿐이다. ‘무언가 모를 찝찝함’에 혀를 차면서, 대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하며.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돈만 있다면 저 한적한 교외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아가겠다고 희구하며. 그런 삶이 더욱 ‘인간적’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렇지만 콘크리트, 이렇게만 보기엔 억울하다. 콘크리트의 단점과 한계가 없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 삶과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본질적으로 꿰뚫어 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 사회의 숱한 난제들을 제대로 풀 수 있다는 게 『아파트가 어때서』를 쓴 양동신이 책에서 풀어놓는 주장이다. 10여 년간 건설 엔지니어로 일했던 그에게 ‘아파트’는 부동산 투자의 대상도, 한국사회의 획일성과 몰지각함을 드러내는 추한 건축물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콘크리트적인 삶’, ‘콘크리트 문명’에서 얼마나 큰 편리함과 혜택을 누리는지를 알게 해주는 가장 뚜렷한 상징이다.
콘크리트의 축복을 말한다
콘크리트적인 삶이라? 콘크리트 문명이라? 이렇게만 들으면 영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겨울왕국2>를 살펴보자.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자 1,374만 명이라는 놀라운 관객 수를 기록한 <겨울왕국2>에선 주인공들이 정령의 힘을 동원해 콘크리트 아치형 댐을 허물어버리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워낙 잘 알려진 장면이다. 나도 그랬고, 우리 대다수는 저 둔중한 댐이 무너질 때 속으로 얼마간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초등학생 자제들과 영화를 관람했던 저자는 묻는다. 그런데 정말로 댐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이 작품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노르웨이는 댐을 통해 한 자릿수 미세먼지 농도의 청정한 환경을 누리며, 국가의 재생에너지 생산 발판을 마련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약 18,000개가 넘는 댐이 존재하며, 이 중 1,660개가량이 수력발전 용도이다. 이렇게 많은 수력발전용 댐 덕분에 이 나라의 전체 전기 설비용량 중 95% 이상은 청정한 수력발전 재생에너지가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댐만 그런 게 아니다. 스위스의 터널도 마찬가지다. 알프스산맥에 세계에서 가장 긴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을 뚫은 스위스는 늘 지속가능성 및 환경성과지수에서 전 세계 1, 2위를 다툰다.
저자는 책에서 묻는다. 터널이 환경을 파괴한다고 스위스 정부가 산을 구불구불 넘어가는 아리랑 도로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훨씬 더 많은 이산화탄소로 알프스가 시달리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를 ‘터널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명쾌하고 직관적으로 와 닿는 역설이지 않은가? 터널의 역설은 곧 댐의 역설이며, 콘크리트의 역설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영국 의학 전문지 《British Medical Journal》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1840년 이후 의학계 성과 중 1위는 하수도와 깨끗한 물이었다. 항생제와 마취, 그리고 백신과 DNA 구조 발견은 그다음 순위였다. 20세기 들어 보편화된 하수도 시설 덕분에 인류는 수인성 전염병에서 해방되었고 평균수명이 약 35년가량 늘어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하수도 시설이 콘크리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은 자명하다.
인프라의 막중한 힘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
『아파트가 어때서』의 저자가 들고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인 우리나라에서 고속도로를 충분히 깔아놓지 않았다면, 2019년 강원도 속초의 산불에서 전국의 수많은 소방차가 한밤중에 산불 현장으로 집결하여 빠르게 화재를 진압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아파트가 어때서』에 따르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저자는 말한다. 만약 이 지역에 교통 인프라가 충분히 깔려 있지 않았다면, 강원도의 험한 산간을 잇는 경로에 서울춘천고속도로도, 서울양양고속도로도, 영동고속도로도, 미시령터널도, 배후령터널도, 인제터널도 없었다면, 아마도 이번처럼 한밤중에 전국의 소방차가 집결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너무도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단순한 논의’는 이미 ‘단순한 차원’을 넘어섰다. 지금도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인프라 사업은 곧 토건 사업이며, 전국 곳곳에는 고속도로와 터널과 교량이 ‘차고 넘친다는’ 목소리가 왕왕 들려오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토건은 적폐다. 토건이 적폐인가? 다시 한번, 아니다. 그들은 ‘틀렸다.’ 인도와 이라크, 우즈벡과 오만을 비롯해 십수 개 국가에서 다양한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저자는 지금도 해상 교량 하나를 만들기 위해 분투 중인 나라를 소개하고, 그것이 한 사회에 얼마나 큰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역설한다.
예컨대 『아파트가 어때서』가 들고 있는 천사대교의 사례를 보자. 지난 2019년 개통된 전라남도 신안군 천사대교 덕분에. 암태도와 자은도, 팔금도와 안좌도 등 많은 섬 주민들에게 평생 처음으로 육로 교통이 선사되었고, 그곳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응급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 배로 1시간가량 걸렸던 물류 시간이 이 교량의 신설로 인해 10분으로 단축되었고, 이로부터 추산되는 농수산물 운임비용 절감은 연간 600억 원에 이른다. 섬에 신설되는 교량이 이처럼 복지와 비용 절감의 역할을 한다면, 산간 지방에서는 터널이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프라의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막중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를 연상시킨다. 인류는 전례 없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인류가 끊임없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팩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아동 사망, 아동 노동, 재난 사망, 이산화황 등 매연 입자 등은 비약적으로 감소했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기대수명은 지난 200년 동안 증가했다.
한스 로슬링에 따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말하면서 “생각이 아닌 느낌을 말할 뿐이다.” 한스 로슬링은 ‘느낌’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순진한 소리나 떠벌리는 낙천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발전을 바라보고 앞으로도 더 발전하리라는 확신과 바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콘크리트와 ‘토건’, 인프라 사업에 관하여, 양동신의 주장은 한스 로슬링의 주장과 꼭 일치한다.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건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느낌’에 불과하다. 그것을 ‘사실충실성’에 입각한 ‘생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이 ‘콘크리트 문명’에 대해서 조금 더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아파트 공화국>이 틀린 이유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우리 사회의 주거 논쟁 끝판왕, ‘아파트’에 녹아 있다. 10여 년 전,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책의 논조는 신랄했다. 발레리 줄레조에 따르면, 한국에서 아파트는 “욕망의 상징”이 되어 버렸고, 우리 정부와 사회는 아파트라는 새 주거형태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는 책에서 한국에 서 주택이 유행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이 책이 화제가 된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리라. 유력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을 ‘성냥갑’으로 공공연히 낮춰 부르는 게 사실이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들은 외면한다. 프랑스에선 그랑앙상블(Grands Ensembles) 로 대표되는 공공임대 사회주택(Habitation à Loyer Modéré, HLM) 이 고층 아파트의 주를 이루며, 이 고층 HLM의 경우 이민자들의 유입이 대부분을 차지해서 높은 빈곤율로 유명하다는 것을. 아니, 이미 발레리 줄레조는 프랑스에서의 아파트가 “관리 부실, 볼품없는 건축미, 저급한 생활환경”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면서 ‘대단지 아파트=도시문제 발생 지역’이라는 단순 도식이 프랑스인들에겐 자연스럽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아파트가 어때서』의 저자 양동신은 말한다. 『아파트 공화국』의 문제의식에서 취할 것은 취하되, 무작정 선진국의 학자가 제기한 단편적인 지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저자에 따르면, 아파트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파트를 비롯한 공동주택은 고압으로 유틸리티를 공급할 수 있으니 전기, 수도, 가스 요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되고, 관리인을 따로 두더라도 가정경제에 별 부담이 없다. 그런가 하면 교통의 관점에서도 더 많은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낮출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지속가능한 형태로 계속 진화하고 있는 반면, 노후화된 런던이나 파리의 구조물들은 계속되는 대형 화재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랑스의 공공주택 문화를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하게 형성된 아파트 중심 문화 및 도시 형태와는 완전히 다르며, 프랑스의 아파트 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실패한 정책의 대명사라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거나 비하할 필요가 없다. 양동신은 발레리 줄레조에 대한 반론을 펼치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세계 건축계의 거장인 르 코르뷔지예의 구상을 꺼내 든다. 코르뷔지예는 1920년대에 주창했던 부아쟁 계획(Plan Voisin)에서 파리의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대건축의 5원칙으로 필로티(pilotis), 옥상 정원(roof garden), 자유로운 파사드(free facade), 자유로운 평면(free plan), 가로로 긴 창(horizontal window)을 꼽았던 바 있다. 양동신은 대한민국 신도시의 판상형 아파트엔 놀랍게도 이러한 요소들이 거의 다 적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말한다. 도시에 고밀도로 모여 사는 것이 시골에 홀로 거주하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친환경적인 시스템을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아파트와 같이 낮은 건폐율과 높은 용적률의 구조물은 한정된 자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가장 진보한 방식일 수 있다고.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는 그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나무에 둘러싸여 사는 것보다 훨씬 친환경적이란 주장을 펼친다. 그는 도시화가 부당한 오해를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연구 결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적은 양의 탄소를 배출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전기 사용량과 주택 난방 등을 모두 고려하면 가계별로 연평균 7톤까지 차이가 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어리석은’ 시민은 없다
나는 평생 한국이라는 인프라 선진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거기선 괜찮은 인프라 시설이 없으면 비가 조금만 내려도 다리가 무너지고 마을과 마을이 분리될 수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담수화 시설 인프라가 없으면 맑은 물을 마실 수도 없고, 발전소가 없으면 산업을 시작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거늘, 이라크의 경우엔 그 많은 석유매장량에도 불구하고 현대식 항구와 철도망이 없어서 수출도 하지 못했다. 중동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에어컨 없이는 생활하지 못하는데, 전기 인프라가 없었다면 여전히 중동이나 동남아시아와 같은 곳의 사람들은 문명을 이루고 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양동신 작가, 『아파트가 어때서』 에필로그 중에서
『아파트가 어때서』의 저자가 인프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책의 말미에 남긴 글 중 일부이다. 양동신은 결국 이 책에서 인프라의 중요함을 치열하게 강조하고 있으며, 주거의 측면에선 높은 용적률의 고층 아파트가 지닌 친환경성과 지속가능성을 다각도로 논증한다.
물론, 우리가 도심의 고층 아파트에 관하여 다양한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것도 맞다. 아파트 대단지는 분명 폐쇄적인 성채와도 같은 특징이 있고, 우리 도시가 다양하게 밟아온 개발의 경로에 관해서도 좀 더 섬세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그렇지만,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거주하고 싶어하는 그 명백한 심리는 어쩔 것인가? 우리는 13년 전 프랑스의 지리학자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을 계급 상승이 욕망에 휩쓸리며 저 촌스럽고 비인간적인 아파트를 선호하는 무지몽매한 대중처럼 바라봐도 좋을 것인가? 그처럼 시민 대중을 꾸짖는 게 맞는 것인가?
아니다. 콘크리트적인 삶, 콘크리트 문명의 관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문제에 관해서든 눈에 보이고 달짝지근한 고담준론에 휩쓸리지 말 것,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주목할 것,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공학적 인프라와 삶의 근본적인 기반을 외면하지 말 것…. 어쩌면 그게 저자가 강조하는 콘크리트 문명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통해 『아파트가 어때서』의 저자 양동신은 우리가 흔히 근거 없는 거부감을 느끼거나, 막무가내로 비판 혹은 비하하는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 문명의 미래를 열어줄 수 있는 지속가능성, 충분한 강점과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일부 건축가들과 같이 도시를 미적으로만 보는 관성적 사고를 거부하며, 실용적인 관점에서 더 많은 사람이 더 행복하고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의 ‘선진적’인 이념으로 다른 사람을 꾸짖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시민을 ‘맹목적인 욕망’으로 똘똘 뭉친, ‘틀린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만큼 오만한 일도 없다. 그리고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아파트가 어때서』에 관하여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역작 『도시의 승리』에 버금가는 훌륭하고 설득력 있는 책”이라며 “그의 제안을 앞으로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출마할 모든 사람이 숙지하고 공약으로 채택하길 바라마지 않는다”고 책을 추천했다.
이 분야의 현대적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승리』에 버금간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책이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많은 정치인, 그들의 보좌진들이 『아파트가 어때서』를 자발적으로 찾아 읽고 여기저기서 스터디를 하는 중이란 것을 듣는 일도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 민주주의는 여전히 콘크리트의 가치에 관해서 더 공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