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라면 드라마 <스타트업>을 많이 보고 계실 겁니다. 저도 방영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넷플릭스를 통해 매주 챙겨보고 있는데요, 에피소드 초반에는 스타트업에 대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거나 전개가 급진적이어서 스타트업 업계에 대해 일반인들이 오해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평이 많았다면 5화/6화를 거치면서 업계 현실을 반영해서 꽤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창업자들 사이의 지분 갈등이나 VC와 엔젤 투자자의 관점 차이, 대표이사의 책임 등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고민하는 주제들이 꽤 많이 담겨있습니다.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에서 주관하는 창업 해커톤이나 대표이사의 사업 아이템 피칭 모습 등도 꽤나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죠.
드라마 주인공들이 고민하는 사업 아이템들이 최근 업계 트렌드인 딥러닝 기술기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술적인 구현 가능성과 참신성, 사업성을 모두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스타트업 업계 16년 차로서 감히 평가해 보겠습니다
전 스타트업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던 16년 전, 작은 벤처기업에서부터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스타트업 업계 16년 차이자 개발자로서 16년 차, 그중 대표이사로는 8년 차입니다. 3년은 스타트업 대표이사로, 5년은 스타트업 전문 개발사의 대표이사로 지내고 있는 것이죠. ‘내 분야’를 다루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관점이자 해당 업계 종사자의 관점으로, 눈길을 끄는 포인트를 다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드라마를 3~4배속으로 보고, 스토리보다는 설정과 소재를 중심으로 재미를 찾아냅니다. 스토리가 늘어지는 드라마나 영화라도 빠른 배속으로 보기 때문에 지루함을 덜 느끼고, 참신한 설정이나 흥미 있는 분야의 배경과 소재라면 재미있는 포인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모든 작품을 재미있게 보는 편입니다. 12편의 드라마 완결까지 3~4시간 정도면 되다 보니 흥미가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다 봅니다.
배수지 같은 대표이사나 남주혁 같은 개발자가 현실에 존재하느냐, 사무실이 저렇게 넓고 예쁠 수 있냐 등등의 논쟁은 제쳐둡시다. 멋있는 대표님들과 멋있는 개발자분들을 많이 만나보고, 잘 만들어진 인테리어의 사무실들을 많이 방문해본 저로서는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타트업의 멋있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업계에서 일하는 저나 주변 스타트업 대표님들, 개발자분들도 덩달아 멋있어진 기분이 들더군요. 전 좋았습니다.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와 샌드박스, 런칭 파티와 해커톤
드라마에 나온 액셀러레이터 회사 ‘샌드박스’는 실제로 같은 이름의 회사가 존재하죠.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을 관리·육성하고 광고주와 유튜버를 연결해주는 MCN 비즈니스를 하는 스타트업입니다. 실제 회사 ‘샌드박스’로부터 협찬을 받았나 했는데, 완전히 다른 회사로 묘사되는 것을 봐서는 단순히 이름만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다치치 않게 하기 위해 뿌려놓은 모래’라는 의미로 사명의 기원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개발 업계나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샌드박스라는 용어가 ‘테스트 환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죠. 예를 들어 페이팔 결제를 연동할 때 결제를 테스트하기 위한 계정을 ‘샌드박스 계정’이라고 합니다. 좀 더 다양한 기술적인 용어 해설을 보시려면 이 링크를 참고해보세요.
초기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멘토링 하는 액셀러레이터는 해외의 Y컴비네이터가 대표적입니다. 국내에는 프라이머·스파크랩·롯데 액셀러레이터·매쉬업 엔젤스·드림플러스·신한 퓨처스랩 등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의 런칭 파티나 해커톤 후 피칭하는 모습도 실제보다 조금 화려하게 그려진 측면이 있긴 하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스타트업 런칭 파티나 공유 오피스 입점 파티 등이 많이 열렸습니다. 저도 참석해서 인썸니아를 영업하기도 했었고, 개발자 해커톤을 후원하거나 심사위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삼산텍의 사업 아이템
삼산텍의 사업 아이템은 은행으로부터 확보한 필적 데이터를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시켜서 사람의 눈으로 이루어지던 필적 감정 비용을 낮추고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입니다. 감정사가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을 법한 필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머신러닝이라는 현존하는 기술을 활용해, 필적 감정을 통한 위조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비용이 절감되는지를 강조했죠.
따라서 B2G, B2B로 단기적으로 의미 있는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드라마에서는 장기적으로는 머신러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로 뻗어 나가는 확장성까지 제안하는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죠. 기술력을 어필하고, 이를 현존하는 문제를 해결할 솔루션으로 포장하면서, 숫자를 통해 사업성과 확장성까지 어필했다는 점에서 멋진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머신러닝으로 필적감정을 시도한 사례가 있는지 검색해보면, 이런 논문이 나옵니다. 실제로 연구되고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업계 자문을 받을 때 이를 참고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인재컴퍼니의 사업 아이템
하나의 폰트 제작에는 수억이 들고 많은 인력이 오랜 기간 소요됩니다. 극 중에서는 사람의 필적 데이터를 머신러닝으로 학습시켜 200~300자만 작성하면 손글씨 폰트로 만들어주는 아이템을 소개합니다.
이 아이템은 실제로 존재하고 서비스도 진행 중입니다. 인공지능 전문 회사 보이저엑스가 서비스 중인 ‘온글잎‘입니다.
실존하는 서비스를 드라마에서 신규 스타트업 아이템으로 삼은 것은 일견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글잎 서비스가 올해 4월에 출시되었으니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업은 그전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겠죠. 동일 아이템의 서비스가 출시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 있고, 확인했더라도 시나리오를 수정하거나 다시 촬영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온글잎 서비스 이전에도 구글의 딥러닝 엔진인 텐서플로우를 바탕으로 적은 글자 수를 이용해 손글씨 폰트를 제작하는 연구는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공개한 제작자가 코드를 깃헙 저장소에 올린 시점이 3년 전입니다. 그러니 드라마는 온글잎 서비스보다는 이 프로젝트를 참고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드라마 속의 사업 아이템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메시지로 온글잎을 홍보하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스타트업하는 불효자식입니다
서달미의 아버지는 스타트업을 세워 투자유치를 하러 다니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습니다. 서달미의 할머니는 당장 자식도 잃었는데 손녀딸도 스타트업을 하겠다 하니 말리는 게 당연지사입니다. 남도산의 아버지는 아예 자식이 뭘 하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스타트업 업계 사람들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래도 이 드라마에는 구석구석 낭만이 살아 있습니다. 당장 머신러닝을 ‘타잔이 제인에게 꽃을 주기까지의 학습 여정’으로 설명하는 부분도 사랑스럽죠. 대표이사가 해야 하는 선택과 책임을 묘사하는 부분도 성장 드라마로서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해외에는 해커들을 주제로 한 <미스터 로봇> 같은 드라마도 있고, 스타트업 업계를 풍자하면서 여러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리콘밸리> 같은 드라마들이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에도 개발과 스타트업을 멋지게 다루어주는 재미있는 드라마가 나와서 매우 반갑습니다.
원문: 이성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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