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아파트를 싫어했다. 돌덩어리에 우르르 들러붙어 사는 게 멋대가리 없었다. 죄다 똑같은 집에 개성 없이 사는 걸로 보였고, 닭장 같은 데 갇혀 사육당한다고도 여겼다. 내 생각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만 진짜 집이었다. 정원을 가꾸고 개도 키울 수 있는.
허튼 생각이었다. 성인이 되어 홀로 상경하자마자 즉각 깨달았다. 세상은 방긋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웰컴 투 더 리얼 월드♪
옥탑방에서 바라본 풍경은
첫 집은 옥탑이었다. 냉난방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여름엔 홀딱 벗은 채 젖은 수건을 두르고 살았고, 겨울은 전기장판과 가스난로로 버텼다. 한적한 동네의 옥탑이어서 나름 운치는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젊음이 스쳐가는 곳일 뿐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었다.
다음은 상가건물의 1층 쪽방이었다. 미아리 텍사스에서 멀지 않은 유흥가였다. ‘오빠~’라고 불러서 쳐다보면 아무리 봐도 나보다 훨씬 누나였다. 길에선 걸핏하면 시비가 벌어졌고 술 취한 잡것들이 한밤중에 문을 걷어찼다. 화장실은 계단 아래에 대충 조성한 것이었다. 웅크린 채로 샤워했고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다가구 주택의 원룸을 세 차례 거쳤다. 모두 198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문제가 많았다. 위아래는 물론 양옆으로도 소음이 차단되지 않았다. 쿵쿵 울리는 소리, 음악이나 TV 소리, 대화 소리, 섹스 소리 등이 마구 날아드는데 누가 범인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한번은 윗집의 발소리와 섹스 소리가 너무 괴로워서 갈등을 벌인 적도 있다. 심할 땐 한밤중에 윗집 현관을 걷어차고 주먹으로 미친 듯이 두들겨댔다. 불법이고 나발이고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선 서로 적당히 소리를 내고 또 참는 게 에티켓이자 생존 전략인데, 그 선을 넘으면 진짜 사람 미친다.
집주인들의 시큰둥한 태도 역시 피곤했다. 이런 다가구 주택은 집 관리와 세입자 후생에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꽤 투자하고 꾸민 (그래서 비싼) 신축은 다를 수 있으나 지은 지 오래된 허름한 (그래서 싼) 건물은 그렇지 않다. 보일러가 맛이 가도, 벽에 곰팡이가 슬어도, 화장실에 문제가 생겨도 즉각 해결되지 않는다. 때로는 세입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든다. 달랑 1년 산 나더러 10년 넘은 보일러의 노후화에 따른 수리비를 내라고?
빌라로 이사했지만
시간이 흘러 내 집을 마련했다. 서울 구석탱이의 신축 빌라다. 거실, 주방, 방 세 개, 작은 베란다가 있는 번듯한 집이다. 인테리어와 설비는 깔끔하고 만듦새도 괜찮다. 요즘 거론되는 ‘질 좋은 빌라’가 바로 내 집이다. 일상의 퀄리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드디어 침대와 TV를 갖게 됐고, 거실은 덕질의 전당으로 조성했으며, 고양이도 한 마리 입양했다. 최근엔 악기마저 잔뜩 들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한계는 바로 척박한 환경과 커뮤니티의 부재. 우리 빌라엔 총 15세대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 규모로는 무언가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 가치를 높여가려면 건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일대 조경에도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 명목상 회장, 총무는 존재하지만 주요한 보수나 청소 정도 외엔 챙기지 않는다.
우리 빌라만 이런 게 아니다. 동네가 다 이렇다. 자연히 빌라촌은 뚜렷한 계획이나 콘셉트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그저 자기 건물만 최소한으로 관리하며 다닥다닥 붙어서 그럭저럭 살아갈 뿐이다. 동네 자체가 콩가루 같다고 해야 하나? 상황에 따라 슬럼화할 때도 잦다.
커뮤니티도 없다. 흔히들 대단지 아파트를 두고 삭막한 인간관계 운운하는데 그건 빌라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여기야말로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고작 15세대인 우리 빌라에 누가 사는지 거의 모르며 다른 건물엔 아예 관심이 없다. ‘아, 글쎄~ 6동 907호 엄마가~’ 같은 뒷담화는 애초 있을 수 없다. 아주 절박한 사안이 아니면 민의 자체가 없기에 마을 발전, 집값 상승을 위한 단체 행동도 기대하기 어렵다. 학군 역시 다른 세계 이야기.
아파트를 바라보는 이유
춘천 이주 과정에서 오직 대단지 아파트만 고집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현재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은 1000세대 정도 되고, 인근의 다른 단지까지 합하면 4000세대 가까이 된다. 당연히 동네 자체가 잘 관리되며 보다 쾌적한 환경과 좋은 인프라를 위해 주민들이 협업해서 목소리를 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온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다. 법적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한 명의 시민이지만 현실에선 결코 그렇지 않다. 직업엔 슬프게도 귀천이 있으며, 가진 것과 버는 것에 따라 각자의 목소리엔 다른 가중치가 부여된다.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자체도 누군가가 바라보기엔 특권일 것이다. 주거의 측면에서 이 목소리는 아파트냐 아니냐가 결정적이다.
아울러 교류할 사람을 만나기에도 대단지 아파트가 한결 용이하다. 아무 연고 없는 중소도시로 이주하는 내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가진 스펙과 실력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수 있다. 빌라촌에선 시도조차 못하지만 대단지 아파트에선 가능하다.
현대 한국의 주거는 아파트와 나머지로 확 나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운운하며 ‘빌라도 살 만하니 만족하라’는 투로 말하는데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너무 많이 갖고 살다 보니 자기가 가진 것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따위로 말하겠나? 일종의 ‘선 긋기’로 느껴진다. 안전펜스를 잡은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 ‘너네도 살 만하지 않니? 그러니까 꺼져 줄래?’라고 말하는 모양새.
근래 분위기를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아파트와 나머지로 세상이 이분화되는 흐름에 반감을 느끼면서도, 나 또한 어떻게든 아파트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만 이런 건 아닌 것 같다.
아파트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가 점점 높고 공고해져 간다. 울타리 밖에서 살아온 내가 그걸 모를 리 없다. 한데 그 해결책이 ‘아파트 별거 아냐’, ‘아파트 나빠’ 같은 기만적인 시선에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해야 그것이 계층 간 분리가 아닌 화합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답을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무식한 편견, 허접한 선동, 번지르르한 말잔치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좋은 거름이 되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건설 엔지니어인 저자가 탄탄한 논리와 근거로 우리의 시야를 틔워준다.
여기 담긴 내용 정도는 사회의 컨센서스 또는 기초 상식이 되길 바란다. 이 책과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 두 권만 읽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와 친분이 있는 사이임을 밝힌다. 하지만 나는 친하다고, 책 한 권 받았다고 소개하거나 좋게 이야기한 역사가 없다. 우주대천재로서의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원문: 홍형진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