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첫눈에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정보도 없이 반하는 일은 없다. 사실은 외모, 복장, 목소리, 행동과 태도, 눈빛, 나아가 그 사람의 직업과 신분까지 모든 정보들이 알게 모르게 협력적으로 작동한다.
질문을 바꾸어 보자. 어떤 “그림”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그림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벅찬 감동을 느꼈다”,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는 남자가 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남자의 말을 듣기 위해 전시장에 모여든다. 4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서 EBS의 클래스e 온라인 강연 프로그램을 방문한다.
EBS의 클래스e는 인문, 역사, 과학, 경제경영, 예술 등 총 10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지식강연 서비스 프로그램이다. 이 중 ‘도슨트계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우철의 강의는, 현재 클래스e의 전체 강연 중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도슨트 정우철은 미술 분야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한동안 영화 업계에서 일하다 약 3년 전부터 미술관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특별전’으로 경력을 시작한 후 2년, 2019년 ‘베르나르 뷔페 전’에 이르러서는 관람객들이 그를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도슨트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공식 온라인 팬클럽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매혹하게 된 것일까?
‘비전공자’가 들려주는 ‘전문적 해설’이라고?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비전공자라고? 예술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이 비전문가라고? 문제 있는 거 아냐?
하지만 지식의 깊이와 정보 전달은 다르다. 당장 역사 해설가 설민석 또한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물론 이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과연 비전공자가 유명 해설가가 되는 일이 경천동지할 만한 일일까?
정우철은 큐레이터가 아닌 도슨트다. 미술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관람객이 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사람이다. 도슨트는 미술사학계의 새로운 학설을 사람들에게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술의 높은 문턱을 쉽게 낮춰주는, 일종의 ‘관광 가이드’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많은 대중들이 점점 더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효과적인 화술법이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 대신, 극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언변 전문가’들의 말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시대가 장기화되는 지금, 지식 전달 강의자들에게는 새로운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다.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 일반 대중의 그림 감상법
흥미로운 것은 이 스토리텔링 기법이 현대인의 미술작품 감상법 1장 1절이라는 점이다.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떤 이유가 있듯, 낯선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무언가 뜨거운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정보들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는 크게 작품의 ‘형식(form)’과 ‘내용(content)’로 구분할 수 있다. 작품에서의 형식이란 곧 점, 선, 면, 색 등의 구성적인 요소다. 작품의 내용이란 그 형태를 이루게 된 이유를 말한다. 즉 창작자의 생각과 사연 등을 구성된 스토리라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예술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이러한 형식과 내용을 모두 탐구했다. 특히 형식에 조금 더 치중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의 스토리는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 스토리조차 접하기 쉽지 않다.
예전에는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사진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모방을 통한 예술은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예술이 가지는 의미도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 위해 직접 그림 앞에 가야 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매체로 얼마든지 그림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일반 대중이 되었다.
이제 공공 미술관의 전시회는 일반 대중이 대상이다. ‘미술을 위한 교육 (Education for Art)’이 아니라 ‘미술을 통한 교육 (Education through Art)’ 시대가 된 것이다. 미술의 의미 자체를 따져 묻기보다는, 미술 작품의 감상을 통해 대중 교육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명제의 효과를 인정한다면, 미술 작품 감상을 위한 기초 공사가 ‘쉬운 내용의 전달’이라는 면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내용, 즉 스토리이다. 그리고 도슨트 정우철은 그 스토리를 힘있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스토리텔러, 정우철
정우철의 힘은 EBS 클래스 e 강의에서도 똑똑히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총 5명의 아티스트를 소개한다. 각각 툴루즈 로트렉,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구스타프 클림프, 폴 고갱, 그리고 알폰스 무하다(참고로 이 순서에도 의미가 있다). 정우철은 각 아티스트의 삶을 드라마처럼 보여주면서도 총 8강의 강연을 관통하는 또 다른 스토리까지 준비했다.
기구한 운명으로 선천적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툴루즈 로트렉의 아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삶을 살아야 했던 모딜리아니 부부, 어린 자식의 죽음을 평생 작품 속에 녹여낸 구스타프 클림트, 객기와 광기로 점철되었던 질곡의 삶을 살았던 폴 고갱, 그리고 이들 네 명의 비극적 삶과는 달리 다른 의미의 성공과 영광을 누렸던 알폰스 무하…
이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듣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 폭소를 터트리게 되기도 한다. 각각의 작품들이 미술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예술사적 의미가 있으며, 어떤 역사적 사회적 발전을 가져왔느냐 등의 인문학적 담론은 잠시 잊어도 된다. 그저 정우철의 음성을 따라 그림을 보며 사랑에 빠지면 된다.
예술과 미술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아무리 많은 노력을 들여서 조사한다 해도, 당신이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고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당신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도슨트가 필요한 이유다. 도슨트는,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은 당신이 소화하기 쉽도록 부드럽게 만든 이야기를 건네주고 있다.
그것을 한 번만 먹어보자. 어느 순간 그림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이 설령 이발소에 걸린 한 장의 그림이라도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