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5년 이후의 독일의 분열과 통일 과정에서의 주요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에서 말한 대로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던 독일 제국 시대에 최초로 민족 국가가 되었다.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서는 매우 뒤진 경우이다. 그러나 그 뒤에 놀라운 속도로 국력을 신장시켜서 비록 패배했지만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을 실질적으로 일으킬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여파로 1945년부터 4년간 4개 승전국의 군정청의 통치 아래 있다가 1949년 비로소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초 소련 점령 지역이 구동독이 되고 나머지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이 구서독이 된다. 이후 1990년 다시 통일이 될 때까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이 야기한 냉전체제에서 분열된 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통일의 기폭제가 된 것은 동독 주민의 탈출과 동독 내부의 반체제 세력의 확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된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이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독일을 점령했던 4개 국가 곧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도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마지막 인민회의 의원 선거가 열리면서 통일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서독의 기민당과 사민당을 대표하는 당이 각각 40.82%와 21.88%의 득표율을 보이며 공산당(PDS)을 누르고 동독 지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1990년 7월 1일에는 동서독의 통화, 경제, 사회 통합 협약이 발효되고 1990년 9월 12일 이른바 ‘투 플러스 포 협정’(Two plus four agreement), 곧 ‘독일 관련 최종 합의 협정’(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이 맺어지면서 독일 통일이 공식화된다. 된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0일에 동서독 의회는 8월 31일 서명한 통일 조약을 비준하여 법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두 나라가 통일된 것이 아니라 동독의 주들이 서독의 정치 제도에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실 서독은 1990년까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통일은 전적으로 구서독의 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그러나 독일 통일은 순전히 구서독의 힘만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 여기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인 빌리 브란트의 주도로 동서독 화해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 동방정책(neue Ostpolitik)이다. 그리고 이 동방정책은 사민당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동독은 체제 인정과 더불어 평화공존을 모색한다.
여기에 더해 동독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서방과의 교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러모로 서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동서독의 화해 무드 조성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흔히 한국에서 알려진 것처럼 서독이 일방적으로 동독을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동서독의 교류만이 독일 통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통일의 결정적인 요인은 뜻밖에도 소련에서 시작되었다. 고르바초프 당서기가 취임하면서 이른바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곧 개방과 개혁의 정책을 내세우며 당시 소련이 처한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당초 사회주의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작한 이 개방 개혁 정책은 더 커다란 혼란과 경제난을 가중시켜 결국 소련의 붕괴를 촉발하게 되었다. 이미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으로 경제발전이 악화되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저하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왔기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었다. 그래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정작 고르바초프가 시도한 정책은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실 구소련의 경제는 이미 1980년대 이전부터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구소련 역사상 스탈린 다음으로 가장 긴 독재 정치를 한 브레즈네프 시대가 종말을 거둔 후 차례로 권력을 잡은 3인의 지도자는 모두 이 경제를 다시 세우지 못하였다. 사실 구소련은 1928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과 서구에 비하여 뛰어난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제도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석유 파동의 여파가 나타난 1975년 이후 소련은 경제적 발전을 더 이상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단순히 석유 파동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장기 독재에 따른 사회적 부패와 무능한 관료제도의 만연에 더한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구소련의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퇴보를 가져온 것이다. 10차에 이르는 5개년 경제개발 계획도 구소련을 위기에서 구해내지 못하였다.
사실 이는 전적으로 소련 내부의 문제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독일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래서 독일의 통일은 구서독 측의 정권과 정파를 초월한 꾸준한 동방정책과 소련을 비롯한 주변 강국들이 연계된 국제 정치적 변화가 맞물려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그런데 통일이 가능했던 더 구체적인 국내 요인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도 대중매체의 힘이 크다. 동독은 1973년부터 자국 국민들이 서독의 방송을 시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화해의 몸짓이라기보다는 이미 국민의 대다수가 불법적으로 시청하고 있던 상황을 양성화한 것일 뿐이었다.
동독은 서독과 통일을 한 것이 아니라 구소련의 붕괴 이후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어서 생존을 위해 서독에 흡수된 것이다. 그래서 통일 이후 구동독은 철저히 구서독이 주도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국도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남한이 북한을 상대로 여러 화해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가장 큰 사업 가운데 하나가 남북한의 2032년 올림픽 공동 개최이다. 이는 이미 평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으로 대한민국의 정부는 2020년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다.
독일은 어떠하였는가? 1963년 여름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Willy Brandt)는 1968년 올림픽을 동서 베를린이 공동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브란트가 누구인가? 1969년부터 5년 동안 독일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그 유명한 신 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통독의 내적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 특히 아데나워가 죽도록 미워하는 사민당의 유력 수상 후보인 브란트의 제안을 중앙 정부의 집권 여당이 받아들일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동독에서도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으나 결국은 서독의 국내 정치적 갈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공동 올림픽 개최는 실패했지만 동서독 선수들은 1956년, 1960년, 1964년 동계와 하계 올림픽에 독일단일팀으로 참가한 이력이 있다. 그런데 냉전의 산물인 동서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처음부터 일이 잘된 것은 아니었다. 1952년의 동계와 하계 올림픽에는 서독만 참가하였다. IOC가 동독의 국가올림픽위원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동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독에 업혀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65년 동독도 IOC 정식 회원이 되면서 마침내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동독과 서독은 별개의 팀으로 참여하게 된다. 억지로 단일팀을 만든다고 해서 주변 정치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동서독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서독이 민간 차원에서 경제적 지원과 문화 교류를 지속하는 가운데 동독은 아예 국가안전부라는 장관이 관할하는 부서를 만들어 끊임없이 간첩을 서독에 파견하여 정보를 습득하였다. 동방정책을 이끌던 브란트 수상의 비서 기욤(Günter Guillaume, 1927-1995)이 동독의 스파이인 것이 밝혀지면서 서독 수상이 사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통일은 선의만 가지고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2032년이니 12년 남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올림픽 공동 개최는 남한과 북한의 민간 교류 차원에서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변 상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1980년대 말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국제 정치적 지형이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총선에서 패배 가능성이 짙었던 콜(Helmut Kohl) 수상은 여야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문자 그대로 신속히 전진하며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기회가 올 때까지 인내하다가 때가 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치고 나간 것이 독일 통일의 근본적 추력이 되었다.
한국의 통일도 독일이 보여준 무한에 가까운 인내로 노력하며 기다리다가 갑작스러운 국제정치적 변화가 가져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사례를 잘 참조해야 할 것이다.
원문: Francis Lee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