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위안부 피해자 일각에서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창극 지명 사태와 함께 ‘친일파’에 대한 관심이 최근 몇년 중 가장 커진 상태다. 사실 박유하의 저작이 1년 전에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박유하는 이를테면 재수없는 상황에 화제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유하의 각론 중에서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것도 적지 않다. ‘용서를 원하는 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평균적 한국인에게 매우 낯선 사실이며, 위안부 문제가 사실상 국내정치를 위한 휘발성 강한 연료로 사용되고 있다는 각론은, 실제로 그러하므로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한국인의 반일주의가 대체로 일본인들의 반발심을 자극하는 방향이라는 것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박유하의 주장은 ‘기존의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 무리수를 남발하는 지점이 많다. 이를테면 <한국과 일본 과거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그녀의 기고에서 등장하는 ‘양심적 일본인의 반성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된 자성사관’에 비해 ‘한국인의 비난에는 그 어느 것도 동반되어 있지 않다’는 무리한 비교나(당연히 무리한 비교다 – 일본인이 자성사관을 갖게 된 건 일본이 사고를 쳤기 때문이지 일본인이 잘나서가 아니다), ‘강자로서의 피해자’와 같은 레토릭, 사실상 한국이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 일본이 어떠한 형태의 사죄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으므로, 한국인이 감정적 용서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용서론’이 그러하다.
박유하의 논지 정리
박유하의 한일관계에 대한 논지를 나의 방식으로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위안부 문제를 포함해 일제 시기에 있었던 많은 것들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입체적 상황을 무시하고 ‘피해’로 정의되고, 정치논리에 의해 동원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용서를 바라는 일본인’이나, 일본군과 위안부 사이의 기묘한 정서적 공감(박유하는 이것을 동지적 성격이나 로맨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박유하가 이 문제를 다루는 능력이 의심스러운 이유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검토해야 한다.
2) 이런 무분별한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동원은 그 내부의 제국주의나 남근주의와 같은 많은 지점을 무시하고 가해자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한국이라는 구도만을 반복하고 있다. 그 와중에 ‘조선인 포주’와 같은 종군위안부에 대한 1차적인 학대를 일으킨 한국인은 직시되고 있지 않다.
3) 이와 같은 구도의 고착화는 일본 내 자성적 사관을 가진 일본인의 동력을 저해하고, 일본 극우의 혐한을 자극함으로서 한일 관계의 ‘발전적’ 방향의 변화를 누르고 있다. 동시에 다양한 차원에서의 피해자인 개인이 짓눌리는 현상이 생긴다.
4) 그러므로 대표격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포함해 한국인이 일제 시기의 많은 것에 대한, ‘조선인 포주’와 같은 것을 받아들여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며 ‘객관적인’ 이해를 함으로서, 내셔널리즘적 구도에서 벗어나 ‘양심적 일본인’과 함께 가치지향적인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적 연대를 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동북아 시대’를 열 수 있다.
즉 박유하의 주장은 짧게 요약하면, 한국인이 ‘착한 일본인’과 ‘나쁜 조선인’을 받아들임으로서 일제 시기를 가해자 일제와 피해자 조선인이 아닌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로 인식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하면, 한-일간의 대립 전선은 기존의 속성을 벗겨내고 가치지향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반 제국주의’를 비롯한 많은 반 민족주의적, 반 식민주의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 한-일 관계의 발전적 모색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박유하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들
하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일본 극우의 공적 중 하나가 박유하라는 사실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박유하는 일제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인식의 교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유하가 일제를 긍정하는 부분(생각보다 일제 통치가 나쁘지 않다고 살짝 주장하는 대목)은 그 인식의 교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박유하의 세계관에서 일제는 언제나 제국주의의 표상이다. 약간의 관심법을 시전하면, 박유하의 주장은 어떤 면에선 다소 위악적이다.
물론 박유하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가장 단순한 지점의 문제는, 한국인이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삼든 적으로 삼지 않든, 한국인의 결정이 평균적 일본인이 그에 호응해 한국인이 원하는 형태의 결론을 내 줄지를 전혀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용서론’이 그러하다. 한국인이 일본을 감정적으로 용서할 마음이 있든 없든, 일본이 거기에 한국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응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한일 관계에서 실질적인 칼자루는 언제나 일본에게 있다. 그리고 일본의 전후처리는 비교대상인 ‘독일’과 비교했을 때, 공식적, 사회적 언어로서 자신의 과거사를 꾸준히 반추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매우 희박하다.
전후 일본은 그러한 과거사를 꾸준히 화제로 삼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면을 보여 왔다. 이것은 한일기본조약에 근거한 보상금이나 아시아여성기금과는 별도의 문제다. 그런 차원에서 90년대 이후 가속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의 원인으로 ‘한국’을 지목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 아닐 것이다. 일본의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은 중요하지만, ‘중국’만큼 중요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민족적, 국가적 문제를 벗겨내면 남는 것이 과연 여성주의적, 제국주의 일반론적 문제일까, 아니면 ‘남’의 일로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이슈가 그냥 묻히는 것일까. 80년대까지 위안부는 ‘화냥년’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폭발력 있는 이슈로 자리잡은 것도 90년대의 일이고, 그 동력원은 다름아닌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문제’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 에너지는 언제나 바로 그 ‘민족주의’에 있었다.
또한 박유하는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교정하려는 욕망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까지 손을 댄다. 식민 통치 그 자체에 대한, 별로 ‘식민지 근대화론’처럼 수치적으로, 계량적으로 충실하지도 않은, “내가 봤는데 생각보다 식민 통치가 괜찮아” 식의 설명을 하거나, 아니면 일본군과 종군 위안부의 일시적 정서적 공감을 두고 ‘사랑’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려 드는, 일종의 관심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결국 역린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어지고, 박유하는 자신의 결론이 뭔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학습된 반일, 그리고 한국을 위한 제국주의
그러나, 박유하가 말하는 어떤 지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해볼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되돌아가서, 한국인은 ‘왜’ 반일을 하고 있는가? 과연 평균적 한국인의 반일 멘털리티는 일본의 행위에 대한 주의인가, 아니면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한 주의인가?
현대의 한국인에게 있어 일본은 4~6세기의 임나일본부설, 고려 시기의 ‘왜적’, 조선의 임진왜란, 그리고 한일 병합이라는 사건을 연계시켜 언제나 한반도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조직으로 학습된다. 국사 교육부터가 그러하다. 국사 교과서를 펼쳐서 중국으로부터 한국과 일본으로 문명이 전파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보면, 거의 빠짐없이 같은 문물을 받아들여도 한국은 ‘독창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재해석 없이 그냥 받아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즉 한 쪽에서는 (일본에 비해) 우월한 한민족이라는 인식을 꾸준히 강화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5세기의 일본인과 20세기의 일본인이 마치 같은 사람인 것처럼, 꾸준히 일본인이 한국을 노리는 ‘본능’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임진왜란의 조총이나, 근대의 메이지 유신은 ‘열등한 일본인이 한국인을 침공하기 위해 얻은 힘’처럼 인식되어 버린다.
이 와중에 근본적인 문제가 묻힌다.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에 규탄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를 침공하는 행위가 옳지 않고, 나아가 ‘일본이’ 옳지 않다는 식의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반대편에서 한국인의 일반적인 가치관 속에서 제국주의적 행동은 그 자체로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상황의 패자’로 남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일본인은 언제나 한반도에 야욕을 갖고 있으며, 한국의 국력이 일본보다 뒤떨어지기에 한국인은 언제나 학습받은 ‘제국주의의 패배자’로 남는 상황을 두려워하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위가 아닌 ‘제국주의로서의 일본’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평균적 한국인은 제국주의의 약육강식 구조에서 절대적으로 피해자로서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학습했기에 제국주의를 거부하기는 커녕, ‘패배할 바에는 승리해야 한다’는 사고까지 자리잡는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의 언론은 자주 ‘침공’ 내지는 ‘점령’으로 그 현상을 묘사하고는 한다. 일본이나 중국에 대해서 ‘무력이 없는 것이 한’이라는 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며, 반대로 말하면 조국에게 힘이 존재하면 언제든지 거슬리는 것을 파괴할 수 있고 그리 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무방할 것 같다.
또다른 면에서 ‘방위산업’ 역시 그러하다. 방위산업의 본질은 자기가 쓸 무기를 만들고, 남에게 무기를 팔아먹는 것이다. 무기의 수출은 제국주의적 행위에 상당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유럽뿐만이 아니라 일본 호헌파에서도 과연 무기를 수출하는 행위를 국가적으로 장려해야 하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허나 한국 사회에서 방위산업에 관한 그와 같은 논쟁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방위산업은 정권을 가리지 않고 ‘신 성장동력’으로 주목받아 왔다. 한국 사회와 평균적 한국인은 자신이 제국주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극히 민감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적 논법 그 자체와 매우 친숙해져 있다.
반공과 반일
현대 한국인의 ‘반일’이 문제가 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지점이다.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병합하며, 기본권을 억압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제국주의로서 비판받아야 하나, 한국인의 반일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비틀려 있다.
‘감히’ 일본이 한국을 침공했다는 인식, 그리고 한국이 제국주의적 상황에서 일본에게 꾸준히 패배해 치욕을 겪어왔다는 인식으로 인해 애초에 남을 괴롭히면 안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뒤로 밀려나고, 모든 일본이 관계된 이슈에서 일본을 꺾어내야 만족하는 멘털리티가 자리잡는다.
한국인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일본을 통해 제국주의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만을 꾸준히 학습하고, 제국주의가 아닌 ‘패배’를 두려워하게 되며, 그 반동으로 ‘적’에 대한 선제적 무력행사와 그것을 위한 부국강병이라는 기반을 꿈꾸고, 다소간의 그로 인한 윤리적, 사회적 문제는 넘어갈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된다.
‘박정희’가 그렇게 부족한 정통성을 손쉽게 만회한다. 제국주의적 패배가 두렵기에,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지도자는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치명적인 단점이 사라지게 될 정도의 어드밴티지를 얻게 된다. 현재의 한국인의 반일주의는 반 제국주의도, 반 식민주의도, 반 민족주의도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매일 한반도에 야욕을 드러내는 원숭이들’에 대한 경멸과 멸시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그 원숭이를 제압할 만한 상황이 되고 그걸 가능케 하는 힘을 얻을 공산이 도무지 없으니, 끝없이 일본인에 대한 경계태세를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극일’을 위해서 많은 가치의 문제들이 우선순위가 떨어진다.
유사한 것이 반공주의다. 반공주의와 반일주의는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과 결합해 사회적 자원을 더 쉽게 공출하고, 그 공출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체주의적으로 억제시키는 데 탁월한 기능을 해왔다. 현역병의 처우나 ‘징병’ 그 자체에 대한 불만도 쉽게 완화되었고,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기 쉬운 병기는 오히려 적을 저지하는 민족적 보위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그뿐인가. 반공과 반일은 많은 면에서, 계층을 뛰어넘어 ‘남의 일’을 ‘우리의 일’로 바꿔왔다. 종군 위안부는 그렇게 한국인에게 있어 폭발적인 소재로 자리잡았다.
한국인이 지금의 ‘반일’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에는 분명 중국의 위협으로 인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요, 양국이 어쨌든 이웃 국가니 언제까지 안보 딜레마를 발생시키는 것이 한국인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한국인의 현재의 반일주의가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엔 그런 차원이 아니다. 현재의 반일이라는,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 얻게 된 갈 곳 없는 분노가 우리 사회에 있어 일본의 과거사 해결만큼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를 바라는 위안부 피해자’는 민족의 배신자가 되기에 딱 좋으며, 학문적 연구로서 최소한도의 존중은 받아야 하는 박유하의 저서를 두고 출판을 막아야 한다는 파쇼적인 요구가 범람한다.
그뿐인가?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제국주의적 강함의 추구에 대한 국민적인 압력이 계속해서 생성되고, 대표적으로 ‘현역병’이 갖는 심대한 인권 침해와 부적절한 보상과 같은 이슈는 ‘반공’이 그러하듯 반일에서도 뒷전으로 밀린다. ‘자위’를 위한 군사력의 기준은 끝없이 올라간다. 아무것도 창출하지 못하는 군에 대한 투자는 계속 늘어나며, 필연적으로 국민이 갖는 의사는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위해 그 다양함이 억제되어야 한다. 정치적 의사결정은 ‘독재’를 합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쉽다.
민과 군의 거리는 비정상적으로 가까워진다. 박정희 정권은 꾸준히 이순신의 위업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켰다. 반일은 아주 일상적으로 국내정치를 위한 소재로 동원된다. 현재의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에만 의지하는 반일주의는 사용될 때마다 강력한 사회적 자원의 동원을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배타성을 꾸준히 강화시켜 왔다.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반일은 위험하다
현재의 한국인의 반일은 분명 좀 더 나은 수준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반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반일은 결국 가장 본능적인 차원의 민족적, 국가적 아이덴티티로 되돌아가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가진 필연적인 배타성에 의해 한국 사회의 다원주의와 다양성,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으로서 표출되어 온 반일주의는 한국인이 자신과 별 관계없는 ‘남의 일’ 때문에 분노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어 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양날로서 평균적 한국인을 끊임없이 제국주의의 트라우마를 자극함으로서 그 피해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사회 내에 존재하는 많은 가치들의 우선순위를 억지로 희생시켰다.
또 유형적 자원뿐만 아니라 ‘용서를 바라는 위안부 피해자’의 감정조차도 그런 반일주의를 위한 민족적 단결의 불순물로서 쳐낼 필요가 있었다. 개인은 끊임없이 체제동원으로서 희생되어 왔고, 국가적 정체성은 ‘정부’의 만능 맥가이버 나이프로 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박유하의 주장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 세련되지 못할 뿐더러, 그것을 달성해야 하는 이유가 ‘그렇게 하면 일본인이 호응하고’, ‘나아가 한일 관계가 발전적으로 바뀌고’,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리기 때문이라는, 별로 설득력 없을 뿐더러 그 이유를 자꾸만 바깥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서만 찾는 조잡한 방식으로 기술되기 때문에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인의 현재의 반일 멘털리티는 분명 극복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갈 곳 없는 비틀린 분노가 아닌 우리 사회를 위한 가치의 지향으로서 발전해야 하고,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화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후의 한국 사회에 있어 가치있는 재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극복해야만 한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민족과 국가가 사라지면 그걸 위해 나설 사람들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 에너지를 담을 칼집 자체는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를 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한국인에게 놓여 있는, 현재의 반일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valentinoGilgamesh Complete Collection 2009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