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월드’
몇몇 감독은 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딴 ‘○○ 월드’란 수식어를 가졌다. 물론 모든 감독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명확히 드러낼 때, 특히 여러 작품을 거듭하면서 그 세계관이 지속되는 걸 확인시켜줄 때 우리는 흔히 감독 이름을 붙여 ‘누구 월드’라고 부른다. 감독에게 있어 이것이 장점일지 단점일지는 각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수식어를 장점으로 붙이곤 한다.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은 국내 감독 중 앞서 말한 이런 수식어를 가진 몇 안 되는 감독이다. 최근 〈미쓰 홍당무〉의 각본집 출시에 맞춰 다시 한번 전작들을 훑어보며 ‘이경미 월드’라는 수식어를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었는데, 그의 신작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면서 이 느낌은 이제 더 단단한 확신으로 굳어졌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젤리 (악귀 혹은 혼령)를 보는 능력을 가진 보건교사 안은영(정유미)이 한 고등학교에서 미스터리를 발견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판타지 드라마다. 정세랑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이경미 감독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조화가 찰떡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이를 둘러싼 음모까지, 판타지 장르의 모습을 취했지만 내면의 정서는 이경미 감독 전작들의 그것과 아주 닮아 있다. 판타지 장르물로서도 귀엽고 재미있으며 이런 장르에서만 가능한 긴장과 스토리텔링이 존재하는 드라마지만, 안은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여러 현실의 씁쓸한 반영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키득키득 잔재미의 연속
이경미 감독의 전작들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건 아주 작은, 깨알 같은 잔재미 요소다. 외국영화에도 물론 존재하지만 외국어의 특성상 완벽하게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잔재미를 잘 살리는 국내 감독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다. 봉준호 감독이 대표적이고 류승완 감독 역시 코미디가 섞인 작품들을 보면 이런 요소들이 살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 역시 다른 포인트에서 자신만의 잔재미를 풍겨내는 편인데, 그의 골수팬들은 아마 무얼 말하는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경미 감독 역시 이런 잔재미를 살려내는 재주가 탁월한 감독임을 이번 작품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박장대소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큭’하고 순간 웃게 되거나, 대부분은 못 보고 (못 듣고) 지나가지만 앵글 구석에서 혼자 열심인 캐릭터를 발견하거나 혹은 거의 들릴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는 대사를 알아챘을 때 소소하게 느낄 수 있는 재미. 특히 대사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대사도 아닌데 캐릭터는 유난히 힘주어 말하거나(역시 잘 안 들리는 것이 포인트), 이상한 억양으로 스치듯 말할 때 새어 나오는 말 그대로 ‘잔’재미.
그것을 〈보건교사 안은영〉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는 없어도 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런 잔재미에 한 번 맛을 들이면 빅 재미보다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 매력적이다.
살아 있는 학생들의 얼굴
어쩌면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기 전에는 몰랐던 점일지 모른다. 나름 현실적이라고 평가받던 여러 교실의 모습들, 그 안에 생활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을 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었던 걸 떠올려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른 작품 속 학생들의 얼굴이 제대로 살아 있지 않았다는 걸.
그저 메이크업을 진하게 했느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물론 이 점도 한몫을 차지한다. 안은영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맨 얼굴을 보는 순간, ‘맞아 원래 애들 얼굴이 이랬지’ 하게 되니까). 극 중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생동감 넘치게 살아 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이상한 표정을 지을 때도, 그냥 가만히 있을 때도 모두 ‘맞아 원래 애들은 저래!’ 싶을 정도다. 그렇기에 젤리가 넘쳐나는 판타지 배경 속에서도 이 이야기는 충분히 현실감을 얻는다.
학교라는 공간, 더 구체적으로는 교실이라는 공간만의 특성이 있는데, 완벽하게 구현해 낸 이 현실성이 이 판타지 드라마를 오히려 돋보이게 만드는 구조다. 그러고 보니 이경미 감독은 학교 내 학생들을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고 해야겠다. 〈미쓰 홍당무〉도 학교가 배경이었고, 〈비밀은 없다〉도 마찬가지고, 이번 작품 〈보건교사 안은영〉도 그렇다. 어른들은 모르는 세상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은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지만 그들에겐 전부인 교실 속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향한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이번 드라마에서도 돋보인다.
학생이 등장하는 보통의 드라마라면 자극적인 욕설과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왕따라는 커다란 주제를 그에 걸맞은 자극적 설정만으로 묘사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보건교사 안은영’의 교실 속 갈등 들은 유사한 주제를 다룸에도 전혀 다른 결, 아니, 훨씬 더 깊이 있는 여러 결을 통해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사람들을 위해
히어로물로 볼 수도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동일한 장르의 작법을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영웅은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간에 한 번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남들 모두가 그 능력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저 평범해지길 바라는 것 말이다.
안은영 역시 마찬가지다. 본인에게 한편으론 저주처럼 느껴지는 능력이 사라지자 평범해진 것에 기뻐하지만, 결국 본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외면하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런 구조는 유사 히어로물에서 자주, 거의 필수로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그 간절함의 묘사에 있어서 정유미가 연기한 안은영의 묘사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평범해지고 싶지만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 쫌!’
이런 안은영의 갈등을 더 배가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옴잡이 백혜민에 관한 에피소드다. 오로지 옴을 잡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렇기에 일정 구역을 벗어날 수도 없으며, 그 공간에서 계속 반복되는 삶을 사는 백혜민을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끔 해주고 싶은 안은영의 진심은 그것이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특히 자신을 옴잡이에서 구원해 주겠다는 안은영의 제안에 ‘그럼 학교는 어떻게 해요, 제 친구들은요?’라고 되묻는 백혜민의 얼굴에서 안은영은 본인 역시 이 질문에 같은 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본인의 운명을 탓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 없지만, 백혜민 너라도 해방되었으면 하는 진심이 더 간절하게 느껴졌고.
안은영이라는 캐릭터가 더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런 어쩔 수 없는 심정 때문이다. 모두가 미쳐있는 것만 같은 세상. 그래서 나 하나쯤 더 미쳐도 이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러울 세상 속에서, 끝까지 ‘그렇게 될 수는 없잖아’라고 스스로 그냥 넘기질 못하는 기질의 주인공 이야기는 현실에 빗대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하게 타협하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 속에서(그야말로 안전한 행복이다), 본인도 그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걸 그냥 넘기고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사람들. 〈보건교사 안은영〉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을 멀리서 응원하는 이야기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하겠지만, 멀리 누군가가 당신의 진심을 알아요’라고 고백하는 듯한. 그래서 안은영이 펼쳐갈 앞으로의 이야기도 더 기대된다. 시즌 2가 꼭 나왔으면.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