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회사의 임원이 신입사원 연수에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우리 회사가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고 좋아 보여도, 막상 들어와 보면 크게 다르진 않아요. 사실 때로는 상사들이 일찍 퇴근한다고 눈치 주는 부서도 있을 것이고, 회식도 적당히 하라고 해도 밤늦게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곳도 있을 거고요. 그런데 왜 채용공고에는 ‘수평적인 문화, 능력 중심의 글로벌 대기업’을 표방하냐고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마치 글로벌 융복합 인재인 것 마냥 자신들의 자소서를 이쁘게 포장해서 우리에게 제출하는 거고, 막상 뽑아놓고 보면 그냥 그저 평범한 사원들에 불과한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서로 속고 속이는 치열한 싸움 끝에 이 자리에서 만난 거죠. 그래서 때로는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도 여러분에게 실망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서로 잘 성장해보자 이겁니다.
웃는 분위기에서 오간 대화였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를 담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신입사원들이 누구나 그러겠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나 더 잘 꾸미고 자연스럽게 풀어내느냐가 자기소개서, 면접의 스킬이니 이 과정을 더 현란하게 발휘할수록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입사 이후 상당수가 생각보다 빠르게 퇴사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을 보면 왜 저렇게 고생했음에도 서둘러 퇴사를 하는 것일까 생각해봤다. 퇴사에는 2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회사가 싫거나, 회사가 나를 싫어하거나. 특히 사회초년생 퇴사는 두 가지 조건이 모두 합치할 때 비로소 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생각했던 회사의 모습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나 또한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기에 다니면서 너무 고통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퇴사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 왜 나는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는지, 나는 왜 회사를 싫어하게 되는지, 퇴사하는 사람들 및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과정을 살펴보자.
1. 숨 가쁘게 달려온 취준에 ‘나’는 없고 ‘회사’만 있었다
청년실업이 일상화되고,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가면서 대학 졸업 후 돈을 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좋은 스펙, 훌륭한 대학 생활을 보냈더라도 이것이 취업에 적합한 스펙인지에 따라 취업의 가능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스무 살 대학을 들어가면서부터 취업형 인재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토익 스피킹, 기사 자격증, 금융 3종 자격증, 학점, 어학연수, 동아리, 학회, 연구실 등 대학 4년을 빼곡히 채우면서 내가 갈 기업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요즘 20대의 생활이다. 이들이 꿈꾸는 졸업 후의 삶은 연봉 5,000 이상의 대기업, 공기업을 다니면서 워라밸을 맞춰 사는 자신의 멋진 모습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런 스펙을 갖춘 사람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채용된 이들은 정말 화려하고, 준수한 스펙들로 무장한 채 입사하는데, 이들이 꿈꾸던 직장은 실재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락되어 있음을 차차 발견해나간다.
중어중문학과를 다녔던 학생이 상품 리스크 분석을 한다거나, 수학과를 졸업한 학생이 회사에서는 법무팀에서 일한다거나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채용해놓고 부서를 임의로 배정하기 때문에 신입사원이 제출한 스펙과 자소서 기반으로 배치된다.
문제는 중어중문학과나 수학과를 다니는 취준생 입장에서는 어디에 채용될지 모르니 일단 노말한 자격증과 영어점수를 획득하는 데 치중하고, 이 결과로 ‘내가 평소 관심 있었던’ 회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회사로 취업하게 되면서 ‘나’는 없는 ‘회사’를 다니게 되는 것이다.
회사생활에서 ‘나’를 지우는 것은 매우 빈번하게 이뤄지는 일이다. 흔히들 회사의 부속품이라고 표현하지만, 좀 더 점잖게 말해 회사의 기능을 해내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결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더 빠르게 조기 퇴사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니는 동안 끊임없이 자아 충돌이 발생한다.
그럼 이런 현상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그럼 본인이 관심 있었던 곳에 평소 스펙을 키우고 길러서 그걸 성장 시켜줄 회사에 들어가면 되지 않나? 왜 억지로 들어와서 나를 찾겠다고 갑자기 퇴사하는 거야?”라고 반문하며 질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이공계에서 취업은 전자, 자동차, 조선, 중공업, 석유화학 회사 등이 많이 뽑아 이공계 졸업생들도 학사졸업 후 전공이 혹여 맞지 않는 경우에도 입사하기도 한다. 인문계나 예체능계는 더 심각해 상경계 전공 졸업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저연봉 중소기업으로 채용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 ‘내가 전공을 하며 즐거워했던 행복’을 위한 회사를 간다는 것은 과분한 일이다.
이와 같이 ‘나’는 없고 ‘회사’만 있던 취준의 결과 만난 회사는 생각보다 버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자아 충돌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퇴사라는 카드를 꺼내는 것 또한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2. 생각보다 직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해외사업팀에 배치되면서 “해외사업? 나에게도 해외사업을 기획할 기회가 생기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업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사업을 기획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드문 일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업이 영위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업무가 직원들의 일이다.
B2C마케팅팀에 배치된 직원도 종일 고객 분류만 하는 경우도 있고, 온라인마케팅팀에 배치된 직원도 종일 채널별 숫자 취합에 몰두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 온종일 이런 업무만 한다. 그런데 회사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누군가는 고객 분류하고, 라벨링을 하고 숫자를 취합해서 보고서를 써야 한다.
그런데 입사 전 직무에 대한 이해가 잘 안 된 취준생들은 마케팅팀에 가면 인스타그램으로 고객들과 소통하고 굿즈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멋지게 자신이 마케팅을 기획했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누군가는 빅데이터팀에 가면 자신이 빅데이터 분석에 따라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 런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큰 오산인 게, 대부분의 기획이 탑다운(Top-Down)으로 이뤄지는 규모가 큰 회사들은 누군가가 회사에서 자의적으로 사업을 만들고, 마케팅 기획 채널을 갖고 논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위에서 던지는 기획을 쳐내기 바쁘고, 존재하는 기획을 운영하기도 벅찬 게 현실인데 말이다.
졸업생과의 대화나 알럼나이들의 멋진 세션들을 듣다 보면 회사를 갓 졸업한 초년생이 대단한 것을 할 수 있다고 포장하지만, 아무리 그가 대단해도 회사라는 조직 자체가 응당 기획 1:운영 9의 업무를 가졌다는 현실의 제약으로 인해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생각보다 취준생이 직무를 이해할 통로들이 부족하다. 그래서 방학 때 자격증을 따기보다는 단기아르바이트나 파견직 업무들을 경험하면서 여러 회사를 거쳐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피스 드라마에서 펼쳐지는 멋있는 일들은 배우들이나 하는 것이고, 실제 가려진 현실을 직시할 기회는 파견직, 계약직, 인턴 등 임시로 회사를 직접 다녀봐야 아는 것이다.
3. 회사는 회사다.
요즘 잘나간다는 회사들 복리후생보면 대규모 브랜드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이 따로 없다. 최신식 피트니스 시설, 유명 브랜드 입점 구내식당, 사내 카페 제공, 휴게실 안마의자, 오락기 배치, 빈백 휴게실, 수면실, 세탁실 등 회사에서 쉬고 놀고 먹고 자는데 원 없이 누릴 수 있도록 꾸며놓은 곳들이 많다.
우스갯소리로 사내에 헬스장이 있으면 일하다 죽을까 봐 운동하라고 설치해놓은 거고, 야식 지원하는 건 저녁에 야근할 일 많은데 밥 먹고 힘내라고 하는 거라고, 복리후생도 너무 좋으면 독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사실 이런 게 아니더라도 복리후생이라는 게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많다.
수면실이 있어도 근무시간에 자러 갈 일도 없거니와, 근무를 마치면 집에 가서 자는 게 더 편하다. 피트니스 시설은 대기자가 넘쳐 늘 만원이고, 사내 카페도 늘 놀러 다니는 게 아니라 점심 먹고 잠깐 들러 담소나 나누는 수준이다. 실제로 일을 하는 직원들에겐 이런 복리후생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고, 그저 외부 언론이나 홍보용으로 다뤄지기 좋게 꾸며진 것에 불과하다.
또 그 유명한 대학생 자녀 등록금지원은 어떤가. 결혼이 늦어지면서 자녀를 가지는 나이가 늦어지기도 하고, 정년이 있어도 희망퇴직, 구조조정 등으로 내 자녀가 대학에 갔을 때 회사를 다닐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결국 회사에 다니는 많은 직원에게 중요한 것은 연봉과 성장 가능성 등일 텐데, 취준생들이 이런 복리후생으로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회사에 현혹되어 정작 중요한 부분들을 놓친다. 그리고 천국이고 놀이터인 줄 알았던 회사에 들어와서 일하다 보니 복리후생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현타를 맞이하는 것이다.
결국 회사는 회사였다. 오랜 취준의 고난 끝에 펼쳐질 파라다이스는 없었고, 다시 맞이한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4. 현실은 자발적 겸업 금지인 삶
또 이런 반문을 할 수도 있다. “회사에서 원하는 직무를 찾거나, 새로운 자기계발을 하면 되지 않겠나?” 사실 요즘은 여러 회사에서 직무적합도가 떨어지는 직원들을 위해 팀을 이동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3년 이내 사원들이 겪는 문제들로 인해 갑자기 팀을 이동해달라고 말하는 건 쉬운 분위기가 아니다. 팀을 옮길 수도 없고, 그래서 새로운 직무를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직무를 창조하는 수밖에 없다. 이직을 하거나,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창업을 준비하거나 유튜버 같은 새로운 직업을 아예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했든 저연차 직원들이 쉽게 이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니 대개 영어 공부나 자격증 공부 정도로 자신들의 스펙을 높이는 데 집중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출퇴근에 적게는 왕복 1시간 반에서 3시간가량이 걸리는 직장인들의 삶을 비추어볼 때 출퇴근 시간과 근무시간을 제외하고 개인에게 부여되는 시간은 2시간 남짓이다.
당장이 너무 고통스러운 삶인데, 먼 미래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쪼개서 공부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일 것이고, 그 덕분에 그들은 미래를 바꾸겠지만, 대다수는 회사를 다니면서 고난의 시간을 버텨내기가 힘들다. 저연차 직원이니 휴직도 당연히 안 될 것이고, 결국 이들이 집어드는 것은 사직서다.
사실 퇴사의 이유에는 상사가 괴롭혀서, 연봉이 너무 낮아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여러 번에 걸친 설문의 결과에서 항상 1등을 차지하는 것은 직무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크다. 그리고, 이런 직무 문제에 대한 해결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대부분 그만두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다음 직업, 직무를 고민하고 준비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분명 퇴사율이 높아진 ‘요즘 친구들의 퇴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넘치는 또래, 어른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도 못 버티나?’ ‘퇴사하고 당장 뭐할지도 안정하고 퇴사해?’ ‘퇴사한다고 답 생기는 거 아니다’ 등등 훈계조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취업 상황이 만든 세태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과 더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발생하는 자아 충돌을 발견해본다면 조금은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원문: 글쓰는 워커비의 브런치
8090년대생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유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