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 열렸다. 2차대전 후로는 유럽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이었다.
그런데 6월 16일 녹초가 된 채 취리히 공항에 내리는 일군의 동양인들이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었다. 월드컵 극동 예선에는 한국 대만 일본이 편성됐는데 대만, 즉 당시 중국은 불참했고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려면 일본을 꺾어야 했다. 그런데 “강력한 반일감정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팀의 입국을 강력히 반대하여 어웨이 경기로만 두 경기를 치러야 했다.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수업 뒤에 질문 퍼붓는 느낌)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만약에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결사의 각오를 내비치고서야 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갔고 일본을 한 번은 대파하고 한 번은 비겼다. 그로써 1954년 월드컵의 아시아 몫 티켓은 한국의 것이 됐다.
그런데 스위스가 어디메뇨. 지구본만 돌려봐도 아득한 거리였다. 더구나 그때는 스위스 직항 따위는 꿈에서도 나타날 때가 아니었고, 타고 갈 비행기도 없었다. 결국 미 군용기를 빌려 탄 대한민국 축구팀은 일단 일본으로 갔다. 방콕에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란 우주 유영만큼 귀하던 시절, 업무 처리 미숙으로 예약이 불확실하게 되는 바람에 두 자리가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다.
이 사태에 망연자실한 군상들을 본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비행기표가 없어서 못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자기 자리를 양보해 주어 선수단은 비행기에 전원 탑승해서는 방콕을 거쳐 인도 캘커타를 지나 로마를 찍고서야 취리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캘커타 지날 때는 프로펠러가 고장나서 국수를 삶아먹으며 허기를 견뎠고 로마에서는 그래도 전쟁 갓 치른 아시아의 선수들이 유럽에 왔다 해서 기자회견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힘겨운 장도를 거쳐 도착한 다음날 1954년 6월 17일 한국은 당시 축구 최강팀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헝가리와 대결한다. 이때 헝가리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딴 이래 무패의 가도를 달려 오던 세계 최강팀이었다.
축구 종가라고 거드름피우는 잉글랜드를 7대1로 대파하여 그 코를 뭉개기도 했고 49년 동구권 대회에서는 북한이 헝가리한테 9대1로 깨진 적도 있었다. 그때 북한팀 선수로 뛰었던 박일갑이 해 준 얘기가 한국팀이 헝가리를 아는 전부였다. 그 팀에는 피렌체 푸스카스라는 전설의 인물이 있었다. “왼발의 달인”이라면 우리는 하석주를 떠올리지만 세계 축구사에서 왼발의 달인이라면 푸스카스를 든다.
지쳐서 뛸 기운도 없는 한국 선수들과 전설적인 왼발의 달인 푸스카스가 이끄는 마자르 군단의 만남. 말할 것도 볼 것도 없는 경기였다. 9대 0이었다. 선수 교체가 없던 시절, 후반 나절에는 선수 4명이 나가 떨어져 7명이 11명을 상대하는 장관(?)을 연출했으니 9대0도 기적적인 스코어였다. 실제로 헝가리팀은 동구권의 소국 알바니아를 12대0으로 날려 버린 적이 있었다.
그 공훈은 마땅히 골키퍼 홍덕영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푸스카스를 위시한 헝가리 선수들의 슛을 온몸을 던져 막아낸 홍덕영 골키퍼의 가슴에는 멍이 들었고 나중에는 발을 들 수조차 없는 근육 경련에 시달렸다. 9대0으로 졌지만 그만하면 선방이었다. 한국은 이어 터키에 7대 0으로 지고 짐을 싼다. 한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8강 탈락한 팀과는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라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헝가리는 대진운이 좋지 않았다. 특히 브라질과의 대결에서는 경기가 끝난 후 난투극까지 벌이며 기력을 소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독도 절치부심 결승전까지 진출한다. 그래도 헝가리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서독 골문을 여덟 번이나 뚫었던 예선을 보았지 않은가.
이 시절 서독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헤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쟁과 패전의 상처는 온국민의 트라우마였다. 한 예로 서독 대표팀을 이끈 주장 프리츠 발터는 한사코 비행기 탑승을 거부했다. 축구 선수의 우수한 신체 덕분에 나치 독일군의 공수부대에 차출되었던 그는 공중 강하 직후 소련군의 저격을 받아 동료들이 피를 튀기며 즉사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심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그 가족 중에 전쟁통에 죽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전란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서독 전체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결승에 진출했다.
‘독일병정’들은 독일병정들이었다. 선수 입장시 독일 선수들은 부동자세로 도열했고 프리츠 발터는 뒷짐을 지고 입장한다. 헝가리 선수들은 이걸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독일팀은헤어베르거 감독과 주장 발터 아래 일치단결, 경기에 나선다. 이 경기에서 독일팀은 베른의 기적을 일군다. 푸스카스가 이끈 마자르군단에게 4년만에 패배를 안긴 것이다. 결승골을 넣은 헬무트 란은 기뻐 날뛰며 발터를 끌어안고, 독일 아나운서는 “벨트마이스터!” 즉 세계챔피언 독일을 외쳤다.
가까운 스위스로 응원왔던 독일 응원단은 목메어 노래를 불렀다. 독일 국가. 하지만 전쟁 후 10년이 지났어도 그 국가는 여러 사람에게 악몽이었다. 스위스 라디오 방송국은 중계를 중단해 버린다.
어떻든 독일인들에게는,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발터에게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우린 안될 거야 망연자실하고 있던 독일 국민들에게는 그 경기는 “베른의 기적”이었다.
“독일에게 있어 그 경기는 독일인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도 같았다. 어떤 관점에서는 독일 공화국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독일의 사학자 요아킴 페스트)
그 프리츠 발터가 2002년 6월 17일, 신생국 한국이 헝가리에게 작살이 나던 꼭 48년 뒤 세상을 뜬다. 며칠 뒤 열린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 선수들은 검은 완장을 두르고 경기에 임한다. 하필이면 그 월드컵이 열린 장소는 48년 전 백넘버도 없는 유니폼을 입고 와서 백넘버를 자기들이 꿰매고 출전했던, 경기 전날에야 겨우 현지에 도착해서 시차적응 따위는 필요도 없이 뛰었던 어느 비참했던 나라의 한 도시, 울산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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