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예수님의 피라면서 왜 화이트 와인을 써요?”
가톨릭에서 와인(포도주)은 특별한 의미다.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가하는 것이라… 고 성당에 다니는 동료가 말했다. 그런데 왜 레드와인이 아니라 화이트 와인을 써요?
잘 모르는 세계의 음료 문화는 마시즘을 더 궁금하게 만든다. 성당에서 사용되는 와인이 바로 한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었다는 것. 그것도 교황청이 승인하고 40년이 넘도록 고정된 와인이라고 한다. 아니, 40년 역사를 가진 한국 와인이 있다고?
오늘은 국내 최장수 와인이자, 성당의 미사주 ‘마주앙’에 대한 이야기다.
국민주 개발정책: 쌀 대신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라
지난 <국회의사당 해태상 아래에는 와인이 묻혀있다>에서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는 ‘쌀 대신 포도로’ 만드는 국민주 개발정책이 추진되던 시기다. 이유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다른 나라의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마실 술이 없었다(소주를 줄 수는 없잖아). 또한 다른 전통주나 막걸리는 주로 쌀을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은 밥 먹기도 힘든데… 쌀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주류회사들에 내린 미션은 바로 ‘와인’을 만들라는 것. 많은 주류회사들은 국내에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유럽에서 포도 품종과 양조기술을 배워왔다. 동양맥주(OB맥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독일에서 와인 양조학을 배운 ‘이순주’씨를 중심으로 국산 와인 개발팀을 꾸렸다.
하지만 동네에서 자라는 포도는 와인을 만들기에는 부적합하고, 유럽산 포도들은 한국의 추운 겨울과 습한 더위, 그리고 긴 장마를 견디지 못했다…로 요즘 같으면 끝났을 텐데.
당시가 어떠한가. 당시 한국은 사막에도 63빌딩을 지을 기세의 근성의 나라였다. 기어코 강수량이 적고 일조량이 풍부한 곳을 찾았고, 포도 역시 한국 땅에서 자랄 수 있는 녀석들을 고르게 되었다.
그리고 70년대 한국에서 만든 와인들이 쏟아졌다. 해태주조의 ‘노블와인(국회의사당에 묻혀있다)’, 동양맥주의 ‘마주앙’이었다. 이외에도 진로의 ‘샤토 몽블르’, 금복주의 ‘두리랑’, 대선주조의 ‘그랑주아’까지. 와인이 나올 수 없다는 한국에서 뜻밖의 와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된다.
최초는 아니어도 최고령 마주앙의 탄생
‘국내 최초’의 타이틀을 걸고 와인을 생산하던 주류회사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해태주조의 ‘노블 와인’이지만, 현재까지 살아남아있는 것은 동양맥주(현재는 롯데칠성음료)의 ‘마주앙’이다. 마트에서 와인코너를 지나다녀봤으면 이름을 들었을 법한 그 녀석이 맞다.
‘마주앙’이라는 이름은 한국말이다. 당시 국세청에서 술 이름에 외래어를 표기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네이밍을 맡은 ‘이인구’ 카피라이터는 ‘마주 앉아 즐긴다’라는 뜻의 ‘마주안’을 제안했고, 끝을 ‘앙’으로 바꾸면서 프랑스 느낌이 나는 한국어 ‘마주앙’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문제는 마주앙이 독일 스타일의 와인이었다는 거지만, 뭐… 와인 하면 프랑스가 떠오르니까 패스…
그렇게 1977년 5월 마주앙이 출시된다(빨리 만드느라 코르크 마개가 아닌 스크루 마개를 택했다고). 최초라는 타이틀은 노블와인에게 빼앗겼지만, 매출액은 3배 이상 차이가 났다. 잘 나갈 때는 생산량이 7~8천 톤 남짓했다고 하니. 역시 마주앙… 아니 역시 술고래 한국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출시 다음 해에는 한국에 방문한 카터 미국 대통령의 선물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워싱턴포스트지에 ‘신비의 와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85년에는 독일의 와인 학술 세미나에서도 주목하는 와인이 되었다. 전설적인 와인은 아니어도, 동양의 와인 불모지에서 이 정도 수준의 와인을 냈다는 것이 주목받은 것이다.
탄탄대로는 길지 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 와인들의 수입이 개방되었다. 상대적으로 구하기 어려웠던 외국의 와인들이 값싸게 등장하자, 온갖 고생을 해서 만들었던 한국 와인들이 사라지게 된다. 주류회사 입장에서도 수입을 해서 파는 게 더욱 이익을 많이 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주앙’만은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누적 판매 1억 병을 돌파하고 만다. 어째서일까?
마주앙, 교황이 승인한 한국의 미사주
마주앙이 출시된 1977년, 로마 교황청에 마주앙 견본이 가게 된다. 바로 한국에 있는 성당들의 미사주로 마주앙을 사용하고 싶다는 것. 1970년대 이전의 성당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미사주를 구입해서 사용했는데, 당시의 와인은 비쌌을뿐더러, 배송 중에 상하거나 깨지는 일들이 잦았다. 이에 한국에서 생산된 와인을 한국의 미사에 사용하기 위해 견본을 보낸 것.
미사주의 조건은 ‘포도에서 제조된(첨가물을 넣지 않은) 천연의 와인’이다. 다행히도 마주앙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추가로 아시아 최초 ‘미사주’가 되는 영광도 얻었다. 마주앙이 생산되던 초창기에는 경북에 있는 수도회 수사들이 꾸준히 공장을 방문하여 품질관리를 했다고 한다. 역시 수도원이 함께 해야 술은 맛이 나는 법이니까.
미사주로 사용되는 마주앙은 우리가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마주앙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미사주에만 사용되는 전용 농장을 두어 국내산 포도만을 사용한다. 숙성시키는 과정이나 생산 역시 신경을 더욱 쓴다고. 동양맥주에 이어 마주앙을 생산하는 롯데칠성음료는 미사용 마주앙은 이익을 남기지 않고, 자존심으로 제작을 한다고.
매년 이맘때쯤 햇포도가 수확될 때는 성당의 신부와 공장 관계자, 생산 농가들이 모여 포도 축복식 미사를 드린다고 한다. 그야말로 홀리한 음료.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왔을 때도 이 미사용 마주앙이 쓰였다. 화려하진 않아도 균형감이 좋은 와인이라고. 물론 마시즘이 마시려면 신부가 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게 함정.
성당에는 미사주로, 애주가에게는 가성비로
모든 술이 그렇지만, 와인은 시간이 함께하는 술이다. 단기간에 맛이 있어질 수 없을뿐더러, 맛만으로 그 와인의 모든 것을 판별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잡고 있는 ‘마주앙’은 한국 와인이 가야 할 하나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볼 수 있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아주 맛 좋은 음료도 좋지만, 우리 가까이의 음료들이 점점 맛있고 멋있어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생각하며 썼는데. 그래도 마주앙 미사주(…) 안 되겠지. 안될 거야 아마.
번외: 그러나 왜 화이트 와인을 쓰는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성당에 다니는 동료는 그게 수건으로 잔을 닦는 일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 예측을 했다. 정말 열심히 찾아봤는데. 그것이 맞았다(…). 규정에는 와인의 색깔이 명시되지는 않았으며, 미사 때 레드와인이 튀거나 흘리면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이주호의 와인오딧세이, 식량부족 계기 탄생한 마주앙’ 매일경제, 1999.3.5, 이주호
- 미사용 포도주 독해진다, 동아일보, 1998.7.20, 이기홍
- 국내생산 와인, 어디까지 마셔봤니, 이나윤, 시사와인, 2017.717
- 와인은 어렵다? 마주앙은 쉽다! 한국 와인의 자존심, 롯데주류 ‘마주앙’이야기, 롯데공식블로그, 2013.10.18
- 1억 병 돌파한 마주앙의 장수 비결은? 한국경제, 2017.3.8
- 천주교 미사주 – 거룩한 백포도주, 첫맛은 새콤 뒷맛은 달콤, 박경은, 경향신문, 2017.3.30
- 77년 탄생한 ‘마주앙’이 대표적, 문화일보, 2004.3.10
- 대한민국 최장수 와인 ‘마주앙’을 아시나요, 김동현, 뉴시스, 2020.9.6
- 마주앉아 함께 ‘마주앙’…와인 불모지 개척하다, 이성웅, 이데일리, 2020.1.16
- 김대중-김정일 마주 앉아 마셨다···’亞 최초 미사주’ 국산와인, 곽재민, 중앙일보, 2020.2.15
- 천주교 모든 미사주는 어디서 생산될까?, 박진관, 영남일보, 2012.7.6
- 예수의 피는 붉은데 ‘마주앙 미사주’는 왜 화이트 와인일까, 김성실, 한국일보, 2019.5.15
- 둘때가 되어버린 첫째 마주앙 BI, 코리아디자인헤리티지, 2019.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