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논쟁을 지켜 보며.
지난 ‘퀴퍼 축복식’ 이후에 가까운 길벗들이 꽤나 피곤한 나날을 보냈었나 보다. 어떤 의미로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겪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세 가지 정도.
* 첫째. 취향과 지향.
기독교인 가운데 스스로 보수 또는 중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꾸 혼동하는 것 하나. ‘취향’과 ‘지향’.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서 ‘성소수자’나 ‘동성애’를 언급하며 자꾸 ‘취향’과 ‘지향’을 바꿔 쓴다.
이 부분은 간단 명료하게 말씀드린다. 내가 ‘2NE1’에 열광하고 좋아한다는 걸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게 ‘취향’이다. 그리고 이성애자의 이성애, 동성애자의 동성애, 양성애자의 양성애, 무성애자의 무성애를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게 ‘지향’이다. 자꾸 님들이 ‘지향’을 ‘취향’으로 혼동하니, 상대가 ‘존재에 대한 거부이자 모욕’으로 느끼는 거다.
또 하느님이 그토록 중요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성의 문제’를 ‘취향’정도의 문제로 가볍게 여기니, 사회와 교회 안팎에서 심각한 ‘성 왜곡과 폭력’의 문제가 숱하게 생기는 거다. 님들이 그토록 교조적으로 따르려는 성서에 이렇게 써있지 않던가.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 하겠느냐?” (마태오 7:4, 공동번역개정판)
그러니 먼저 ‘들보’부터 빼고 오세요. 동성애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사회와 교회 안팎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성애 왜곡과 폭력’의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세요. 물론 그때에도 의도적이든 아니든, ‘지향’과 ‘취향’은 헷갈리지 마시고요.
* 둘째. 성서를 어떻게 보는가. ‘담고 있다’ vs ‘그 자체다’.
스스로 보수 또는 중도라는 분들에게 ‘문자주의’나 ‘성서무오주의’를 따르냐고 물으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가끔 그렇다고 인정하시는 분들이 있긴 한데, 그분들도 ‘그럼에도 나는 합리적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문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란 걸 물씬 드러내면서 아니라면, 대체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문자와 단어의 의미를 중시해서 성서에 그 문자나 단어가 있는 지 목숨 거는 사람인데, 왜 ‘문자주의자’가 아니란 말인가. 최소한 어떤 문자나 단어가 성서에 있거나 없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 흐름에서 드러나는 ‘정신’과 ‘맥락’을 중시해야 그나마 문자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또 ‘성서무오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성서 외에는 ‘판단 근거’가 없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인데, 왜 ‘성서무오주의자’가 아니란 말인가. 최소한 성서에는 비본질적인 다양한 오류가 있고, 때로는 결정적인 오류도 있다는 정도는 말해줘야 ‘성서무오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성서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성공회 신자이자 신부다. 이건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서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에 문화적, 언어적, 시대적 한계도 있다는 거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많은 이들이, 그 맥락에서 성소수자 차별의 문제를 이해하고 싸우는 거다. 그렇게 흑인과 유색인종 차별, 여성 차별, 장애인 차별의 문제를 바로 잡아온 기독교의 역사를 기억하고 용기를 내는 거다. 그런데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를, 성서를 ‘구원 그 자체’로 배워왔고 받아들이는 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니 당연히 다르게, 심지어는 틀리게 느껴질 수밖에.
그러니 ‘성서를 어떻게 보는가’는 토론이나 논쟁의 대상이지, 당신은 절대적으로 옳고 나는 절대적으로 틀린 게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고. 성공회-복음주의자는 이 정도는 안다.
* 셋째. 죄와 죄인(?)을 구분하자.
그나마 나는, 이런 입장을 가진 보수나 중도적 기독교인들과 대화나 토론을 시작한다. 이 입장이 그쪽 동네에서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입장은 그냥 합리적이라고 믿는 근대적 인간으로 느껴진다. 물론, 분명 다르다. 중세 천주교의 교황을 대체한 ‘작은 교황들’인 이 땅의 큰 목사님들.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중세적 인간보다는 진일보된 분들이다.
그러나 성서는 법전이 아니다. 과학책도, 철학책도, 사회과학책은 더욱 아니다. 그러니 항상 ‘합리적이고 타당’해야 할 필요가 없다. 법전이나 과학책이나 철학책 또는 사회과학책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서는 ‘사랑에 눈 먼 사람들과 하느님’이 주고 받은 연서(戀書), 즉 연애편지에 가깝다. 그러니 연애편지를 읽듯이, ‘사랑’에 근거해서 시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헌데 성서를 이렇게 이해하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은 하느님의 숨결에 의존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하느님의 숨결에 바탕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고, 이것이 바로 최고의 복, ‘원복’(Original Blessing)이다. 이에 바탕한 것이 ‘창조 영성’이다.
간혹 보수 개혁주의 쪽 사람들이 이를 현대에 ‘발명’된 것처럼 오도하거나,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은 ‘뉴에이지’ 운운하며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고대 기독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현대적인 신앙 언어로 ‘다시 말하기’한 것일 뿐이다. 이 ‘창조 영성’에서 인간은 ‘죄와 죄인’으로 일도양단될 수 없다. 그렇게 딱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거다. 누구 말대로, 말이면 다 되는 게 아니란 거다.
이를 무모할 정도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숨결’에 바탕해서 존재하고 살아간다. 그 창조된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숨결’에 맞춰 살아가는 게,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 안팎에 충만한 하느님의 숨결을 인정하듯이 당신 안팎에 충만한 하느님의 숨결을 인정하는 삶이, 바로 ‘상호존중’이며 ‘함께 사는 삶’이다. 이렇게 창조 질서를 보존하며 재구성하여 후대의 사람들과도 ‘함께 사는 삶’이, 바로 ‘창조 영성’에 순응하며 사는 삶이란 거다.
죄? 죄인? 우리들의 하느님이 우리들 안팎에 불어 넣어주신 ‘창조 영성’을 거슬러, ‘특정한 개인’이나 ‘일부 족속’의 뜻과 욕망을 중심으로 사는 것. 우리들의 하느님이 아닌, 그들 뜻대로 창조 세계와 그 창조 세계에 바탕한 이 세상을 재구성해서 사는 게, 바로 죄이고 죄인인 것이다.
이렇게 성서와 창조 세계 그리고 죄와 죄인을 이해하며 살고 있는 사람에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성서 구절을 문자적으로 들이대지 마라. 그 죄가 그 죄가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다.
* 덧붙임. 그저 함께 살려는 노력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온라인 언론과 인터뷰할 때에 말했던 것처럼, 성소수자 차별의 문제 앞에서 시혜적 태도를 가질 수 없다. 과거에 일부 기독교인들이 여성차별이나 흑인, 장애인 차별과 싸웠다고 해서, 그들이 고마워할 이유가 없지 않나.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가르쳐, 그런 차별을 만들어 낸 것이 ‘같으나 다른’ 일부 기독교인들이니 말이다.
지금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 함께 살려고 하는 것 뿐이다. ‘기억과 연대’의 마음과 태도로 함께 싸울 뿐이다. 그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호흡 안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삶으로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 회상.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 채플.
십년 전, 하느님의 속삭임 앞에 모든 것을 멈췄다. 그리고 한국의 오순절-성령운동의 산실이라 불리던 학교와 교회에서 성공회로 옮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과거의 모든 것이 있던 곳에서, 아무 것도 없는 낯선 반대편으로 ‘떠났다.’
그 하느님의 속삭임을 되묻기 위해서 찾아 왔던 성.미가엘 채플. 십년 만에, 그 옛날 고개 숙여 기도하던 자리에서 바라본 채플 풍경. 하느님의 속삭임을 따라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 믿는다.
지금 당신도 당신 안팎에 충만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당신 안에서 뛰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통해 하느님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라. 지금 당신이 있는 그 ‘저주와 혐오, 정죄와 배제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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