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5년 전 쯤 난 문창극의 팬이었다. 당시엔 우파였던 내 정치적 스탠스에 맞게 “시원스럽구로” 잘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간지 주필 중엔 그와 강병태 정도가 제일 나았고 조선일보 김대중은 이름값을 못하는 느낌이었음). 신문을 끊은 지난 10여년 동안 뭐하고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 그 추억의 문창극이 갑자기 총리 후보가 되어 나타나 처음엔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앞날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는다. 역사관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창극이 내세우는 논리
사실 문창극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문창극 혼자인 것은 아니다. 온건한 축에 속하는 ‘식민지배 불가피론’부터 아예 하나님의 ‘뜻’ 정도가 아니라 ‘축복’이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배 축복론’까지, 옹호론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그 지지자들도 적지 않다. 사회 전반의 반일 정서-뭘 해도 용서받을 듯했던 이미지의 조영남조차 한방에 보내버리는- 때문에 공개적 발언을 자제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는 대강 이렇다: “조선은 미개한 나라였고, 청의 속국이었으며, 백성은 가렴주구에 시달렸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조선왕조가 무너진 것이 전혀 아쉬울 것이 없고, 500년동안 정체되어있던 많은 분야에서 일본에 의해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선진해양세력에 편입되어 현재의 번영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으므로, 식민지배는 정당하며 오히려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
읽기만 해도 짜증이 나겠지만, 더 짜증나는 건 저게 말짱 개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름의 ‘팩트’에 기반한 얘기들이다. 어떤 기준에서도, 특히 말기의 조선이 “훌룡한 나라”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며, 일제 치하 동안, 그 의도를 따질 순 있겠지만, 산업적 발전이 이루어졌음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민중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조정의 탐관오리나 왜나라 나카무라나 그놈이 그놈이란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얘기다.
자,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잘못된 역사관을 주입당해왔던 것일까? 고마운 일본에 배은망덕을 저질렀던 것일까? 이제라도 뉘우치고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하는 것일까?
모든 역사는 ‘정치적 문학’이다
바로 세우러 광화문으로 뛰쳐 나가기 전에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신은 역사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기계적으로 수집하여 나열한 것이 아님을 배웠을 것이다. 역사란 어제 일어난 일들이 오늘에 갖는 의미를 추출하는 ‘해석’의 영역이기도 함 역시 배웠을 것이다. 해석이란 건 결국 관점의 문제다.
한명의 사람조차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데, 수억, 수십억의 사람들 사이에서 수십년에서 수백년동안 이루어진 상호작용을 관점의 선택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예로 들어보자. 아주 어릴 때 만화로 처음 접한 삼국지에선 유비가 주인공이었고, 그가 의리의 장비, 관우와 함께 잔인하고 악독한 조조를 물리치는 것이 바로 삼국지 스토리의 뼈대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삼국지 연의>의 내러티브이다.
중학교때 쯤에야 다른 버전의 삼국지가 있음을 알게되었는데, 거기선 조조가 주인공이었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유비에 비해 냉철하고 카리스마적인 리더로 묘사된다. <정사 삼국지>는 이쪽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차이는 결국 ‘촉한정통론’이라는 정치적 관점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연의와 정사를 어찌 비교하느냐고? 사실 모든 역사는 일종의 ‘정치적 문학’이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를 우리가 하필 “그렇게” 배우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의 국제적 지배권을 가진 이들이 선택한 관점이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한 수많은 관점 중 하필 “악의 제국 나찌 독일을 미국이 물리친 전쟁”이라는 관점을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것이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 미국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합국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 아예 독일이 이겼다면 우린 어떤 역사를 배웠을까? 2차대전 뿐이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정신의 초석이 된 프랑스 대혁명이 실패했다면 그에 대해선 어떻게 배웠을까? 볼셰비키 혁명은? 소련연방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중국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이겼다면? 6.25는? 민주화가 되지 않아 아직도 군부통치 중이라면? 그랬다면 전두환은 오늘날처럼 조롱을 받고 있을까?
이 모든 가정들이 말하는 것은, 역사는 고정불변의 팩트가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끝없이 변할 수 있는 생물과 같은 것이란 점이다. 이것은 물론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하거나,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하는 날조와 왜곡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사실과 거짓이라는 까망과 하양 사이엔 언제나 드넓은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바로 그곳이 관점이 개입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관점은 흑과 백보다 더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역사적 관점은 반드시 현재에 복무하며, 미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친일 옹호론’ ‘식민지배 옹호론’이 우리시대의 지배적 관점이 되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 점에서 명백해 진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미래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넘게 계속되고 있는 동복아시아의 평화는 이 지역의 수천년 역사에서 볼때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이라는, 그전까지 없던 외부 변수로 인한 것이다. 6자 사이에 복잡다단하게 얽힌 모든 갈등을 억누르던 Pax Americana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그 억지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불과 수십년 전 지금의 선진 대한민국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듯, 얼마후 동아시아에 다시 전화가 피어오르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
중국은 화평굴기(和平崛起)에서 주동작위(主動作爲)로 이동하고 있으며, 일본은 ‘자학사관’을 버리고 일본인의 긍지를 뒤찾자며 거의 날조에 가까운 역사교과서들을 채택하고 있다. ‘정한론’이 대두되던 19세기말과 유사한 흐름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민족은 없다”느니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느니 겉멋 부리는 동안 이들 나라의 민족주의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나라들이 모인 동북아에서 이번 세기안에 충돌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기적일 것이다.
식민지배 옹호론을 펴는 이들조차 이 땅에 또다시 그런 비극이 벌어지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세력의 흉한 과거를 윤색하기 위해 식민지배와 친일 정당화에까지 나아가는 건 지나친 것이다(과거를 상쇄할 공이 있지 않은가) 그런 역사관을 가진 집단이 언젠가 다시 국가가 위기에 몰릴 때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거지같은 나라여서 친일이 정당했다면, 누군가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한다며 간첩이 되고 국가기밀 넘기는 행위는 왜 정당화될 수 없는가.
그리고 과잉민족주의에 대한 반발심으로, 혹은 그냥 좀 똑똑해 보이기 위해서 괜히 조선이 어쨌네 저쨌네 해대는 이들에겐 조금이라도 독립운동사를 공부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 또한 ‘팩트’인데, 굳이 간지나는 독립투사들의 팩트가 아니라 비겁한 친일노예들의 팩트를 자기 역사관의 기준으로 삼아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문창극 한 사람이 낙마하고 말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류의 역사관, 반쪽짜리 팩트에 근거한 식민사관이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는 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윈스턴 처칠이 했던 말로, 식민지배와 친일 옹호가 어느때보다 당당해지는 요즘 더욱 그 무게가 느껴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것이며, 그러므로 미래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덧. “문창극 꺼져”이 한마디 하려다 왜 이렇게 길어진 건지는 나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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