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자 주: 본 글은 Huffington post의 Don’t blame it on the bible를 저자의 동의하에 번역한 글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성서를 근거로 자신들의 반대를 정당화 한다. 그런데 성서는 정말 동성애를 반대하는 걸까? 만약 진실을 안다면 매우 놀랄 것이다.
미국인들은 연방대법원은 올해3월말 판결이 내려질, 캘리포니아 주민발의 8 (미국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지시키려 하는 법안)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주요 여론조사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동성결혼에 대해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막강한 발언권과 재력을 보유한 극우 복음주의진영의 반대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벽이다. 왜 이들은 동성결혼을 이토록 반대할까? 그 이유는 성서의 많은 죄들중 가장 큰죄가 동성애라고 하는 오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성서는 정말로 동성애를 죄악시하는가? 아이러니 하게도 성서는 이런 결정적인 질문에 대해선 답한 바가 없다. 동성애를 악으로 규정하는 성서적 근거는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요인 조차도 없다. 미국문화와 법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들은 얼마 되지 않는 성서의 극히 일부 구절들에 기초하고 있다.
만약 진보주의자들이 미국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반대파들이 성서를 사용해 반대한다는 걸 인지해야 하고 이것이 생각보다 중대한 문제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항목들은 진보주의자들이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들로,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갖는 입장들을 정리한 것이다.
I.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가 쓰일 당시의 사람들이 정체성, 지향성 또는 삶의 모습으로서의 동성애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동성애(homosexuality)”라고 하는 단어는 19세기 중후반에서야 만들어졌다. “동성애(homosexual)” 이라는 단어를 처음사용 한 것도, 이와 유사한 단어로 성서를 번역한 것도 1946년 되어서야 RSV 성서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
성서에서 가장먼저 동성애를 정죄하는 부분은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다. 소돔에서 “항문성교 (sodomy)”, “sodomy law”라는 단어가 파생되었고, 이 단어는 성숙한 두 사람의 동성 성인이 서로의 동의하에 관계를 맺는 것 조차 범죄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한 무리의 남성들이 롯대신 롯의 집에 머무는 손님들을 끌어내어 성적으로 수치스럽게 하려 한다 (창세기 19:4-9). 성서를 겉핥기식으로 읽더라도 이 부분은 군중들에게 습격당한 남성들이 이성애자들이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언급되거나 암시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롯의 손님을 수치스럽게 하고 강간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이 무리들이 동성애자 남성이라는 것을 기정 사실화한 뒤, 동성애를 소돔과 연관 시켰다. 이런 잘못된 결론으로 인해, 소돔은 동성애라고 하는 “죄” 때문에 심판받고, 멸망했다는 잘못된 해석이 성서적 진리로써 오늘날까지 널리 퍼지고 수용되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사실 중세시대는 물론이고, 성서가 최종형태로 정경화 된 후인 1000년대에서 조차 보여지지 않는다.
성서는 오히려 이와 다른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군중들이 롯의 손님들을 범하려 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은 이미 소돔을 사악하다고 비난하셨다. 명백하게 모든 말씀들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대체 무엇이 때문에 소돔은 악하다고 낙인 찍힌 것일까? 에스겔은 소돔이 사악한 이유는 성적인 죄가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라고 증언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16:49-50)
예언자 예레미야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내가 사마리아 선지자들 가운데 우매함을 보았나니 그들은 바알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 그릇되게 하였고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 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23:13-14).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같은 이유를 제시한다.
“누구든지 너희도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도모가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태 10:14-15)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성서주석은 섹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데도 매우 반인륜적으로 성소수자들을 억압하는 데 압도적으로 사용된다. 명확한 결론은 동성애자를 향한 기호로서의 “sodomite”라고 하는 단어는 절대적로 성서적 근거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호모포비아들의 혐오발언이 몰이해 근거하며, 오늘날 세계를 비극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 군중들은 동성애자였고, 소돔이야기 전체는 문자적으로 사실이며, 문자적 해석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폭도들이 강간할수 있게 딸들을 넘겨주는 것 또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 할 수도 있다. 꼭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어선 안된다. 설령 나의 선입견이 성서구절에 어딘가와 들어맞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II.
남자와 남자가 섹스하는 것에 대한 구약에서의 직접적 언급은 두군데서 나타난다. 하나는 신명기고 다른 하나는 레위기다. (흥미롭게도 구약에서 레즈비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구약성서의 컨텍스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이주와 관련이 있는데, 가나안에는 이미 잘 갖추어진 종교관습들이 존재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롭게 이주해온 사람들이었기에 이미 잘 갖추어 뿌리내리고 있던 가나안 종교에 동화되는 것에 대한 상당한 압박감이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법과 명령들은 가나안 종교로 동화되는 것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성화 되었다.
종교 의식을 치르는 가나안의 남성제사장은 여신을 기리기 위해 여자처럼 옷을 입고,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어떤 경우엔 스스로 거세를 하기도 했다. 가나안의 종교의식에선 풍요의 신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매춘도 하였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종교로 부터 지키는 것은 중요한 중교적 실천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가나안의 종교의식으로 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키는 것은 성서 계명에 근거한 종교적 실천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행위들을 아주 강력하게 금했다. :
이스라엘 여자중에 창기(qedeshah : 문자적으로 거룩한 여성이란 뜻으로 성전에서 매춘하던 사람을 뜻한다)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qadesh 성전의 남성 매춘부)이 있지 못할 것이니 (신명기 23:17)
이런 배경속에서, 가나안 성전에서 행해지던 크로스 드레싱(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는 것)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금지되었다.(신명기 22:5) 다음의 명령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아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위기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이러한 선언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매우 강력한 외래 문화들로 부터의 유혹에서 지키기 위해 성서법으로 제정되었고, 신성화 되었다. 그러나 여기엔 인간 성(sexuality) 대한 복합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이 선언들의 본질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 신앙에 대한 확고함에 대한 것이었다. 아래의 본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종교, 본질적 목적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qadosh, 다른 사회의 종교적 행위들로 부터 “구별하다”)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1-2).
그러나 또 다시, 누군가가 이 성서구절들을 인용해 동성애자들을 비난한다면, 심지어 “남자와 눕는 남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면? 성서에 제시된 다른 명령들을 어긴 경우, 예컨데 불순종하는 아이들, 월경 중에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간통한 사람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성서의 명령, 그리고 도시에서 겁탈당한 여성들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명령은 어떠한가?
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너무나 고통스러워 할 것이기 때문에 구해주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문자주의를 고수하는 한 이들을 구해줄 다른 여지는 없다.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거나 아니거나 둘중 하나를 택할 뿐이다.
구약성서에서 동성간의 성관계에 대한 언급들은 이게 전부다. 잠언 혹은 시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도덕적 불의에 대해 비판했지, 누구도 동성애에 대해 말한적은 없다. 사실 구약성서에서는 동성간의 관계 보다도 간음, 근친상간, 수간이 더 많이 언급된다.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했을때, 구약성서 안에서 오늘날 동성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명백한 규범들을 찾아볼수가 없다. 레즈비언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남성인 다윗과 남성인 요나단의 사랑이야기는 성서에서 찾을 수가 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는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치 아니 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상 18:1-4).
다윗과 요나단이 사울로 인해 이별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사무엘상 20:14).
요나단이 요절하고, 다윗은 그를 보며 울부짖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사무엘하 1:26)
성서 안에는 두 남자의 위대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랑에 비해 덜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동성간의 사랑은 덜 아름다운 것인가, 혐오받거나 심지어 죽어야 할만큼 문제가 있는 걸까, 만약 요나단과 메시아로 추앙받던 다윗이 키스 이상의 신체적 관계를 가졌다면?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성서에 기록된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야기는 두 남성간의 사랑이 다른 이들의 사랑만큼이나 깊고 거룩하다는 걸 증명하기 때문이다.
III.
신약성서를 보면, 동성애를 비난하는 대부분의 구절들은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에서 나타난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길,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로마서 1:26-27).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해석과는 반대로, 여기서 바울은 동성애 관심하고 있는게 아니다. “부끄러운 일”, 탐욕, 욕정, 잘못되었다고 여긴 풍습들에 관심하고 있다. 바울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역리”를 “순리” 로 여기며 행동하는 이성애자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역리”에 타오른 음욕을 언급한것이다.
이는 이성애자들에게는 순리에 어긋나는 “역리”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게이들에게는 동성과 성적 친밀감을 갖는 것은 “역리”가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고대에 살았단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동성애자들의 성 정체성 혹은 성적 지향성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의 세계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다른 개념들은 부재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이해하지 못한 성정체성과 관련한 오르가즘에 대해 그리고 이성애자들의 욕정어린 성행위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순리에 어긋난 욕정”에 대해 비난한 것은 동성간의 사랑과 친밀함에 대한 성서적 비판이 될수 없다. 실제로 바울은 사랑에 대해선 전혀 묘사한바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무엇이 순리이고 무엇이 순리가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했다는 것이다. 만일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주장한 순리에 대해서 수용한다면, 왜 이들은 성 정체성이 어린 시절에 이루어진다고 하는 현대 과학의 최근 결과들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가, 어떤 동성애자들의 경우 유전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
고린도전서 6:9-10 바울은 더 나아가 이렇게 기록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malakoi)나 남색하는 자(arsenokoita)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male prostitute 남창” 으로 번역되는 단어 Malakos 는 “부드러운” 혹은 “여성적인” 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이 단어가 매우 드물게 자발적으로 남창의 역할을 하는 어린 아이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혹은 소아성애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있다. “sodomite 남성간 항문성교”, “변태 성욕자”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 arsenokoitai 는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지는 않지만, 착취적인 형태로서의 몇몇 동성애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마도 여기서 쓰인 malakoi 는 성적으로 이용되었던 어린아이들을 나타내고, arsenokoita 는 이 아이들을 이용하던 남자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나 확신할 수 는 없다.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누구도 확실하게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이 정말로 뜻한 것을 말할수 없다는 것이다.
IV.
마지막으로 복음서를 한번 살펴보자. 예수가 동성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어디에도 없다. 예수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두가지 계명만을 말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
내 이웃의 행복, 이들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것, 배우자로서 서로 연을 맺을 수 있는 성스러운 기회를 박탈하려 하는데 어떻게 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수 있을까?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그가 그러했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가치로서 각자의 선택이 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친밀하게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살았는가, 궁핍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섬기기위해 노력했는가, 이 땅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는가로 심판받는 다는게 마태에서 예수가 주장한 바다. 침실에서 이루어진 사생활 때문에 누군가가 심판받아야 한다는 그런말을 예수는 전혀 한적이 없다.
V.
“전통적인 결혼”이란 말은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단어로써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성서는 다양한 형태의 결혼관계에 대해 말할때 어떠한 명령도, “전통적”이라는 어떠한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다. 성서에는 일부다처제가 언급되어 있다. 사라의 요청으로 아브라함은 종이었던 하갈을 임신시킨다. 야곱은 누이인 라헬, 레아와 결혼했고, 각각 임신시켰다. 남편이 아이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맡형과 성관계를 맺고 임신하게 하는 레비레이트혼을 예수는 비판하지 않았고, 심판 섞인 말도 하지 않았다.
만일 맏형이 이 여인에게 아이를 안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바로 아래 남동생에게 갔다. 이 규율은 이 여인이 임신을 하거나 형제들로 부터 도망가야만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결혼제도에 대해서 성서는 비난하지도 예외를 두지도 않는다. 이러한 다양한 결혼제도는 “전통적”이란 수식어가 붙은 단 하나의 성서적 결혼제도와는 상반된다. 물론 여러사회에 따라 전통적인 결혼이라고 하는 문화적 개념들이 있지만 그것은 문화적 전통이지 성서적 전통은 아니다.
성서는 정말로 동성애를 비난하는가? 동성결혼은 죄인가?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동성애, 동성결혼을 비난할 만한 근거들은 너무나 애매모호하고 희박하여, 그 누구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동성애자 시민들에게 다른 시민들과 동등하게 합법적인 권리들을 부여하는 걸 성서로 거부할 수 없는, 거부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럼에도 성서를 통해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하면 이것이야 말로 반헌법적일 뿐 아니라 성서적인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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