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아이가 언젠가부터 신데렐라 동요를 부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친구들과 놀다가 배운 게 아닐까 싶다. 노래를 부르다 신데렐라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걸까? 진짜 신데렐라를 보여달란다. 책으로 읽어주는 것 말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신데렐라』 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화면 비율이 요즘 TV에 맞지 않게 4:3인 것만 빼고는 볼만한 화질이었다. 영화 길이는 74분. 어린아이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화면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어 가는 아이들 뒤편에 앉아 무심하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건성이었다. 신데렐라라니… 지금껏 수백 번은 보고 들은 뻔한 이야기 아닌가. 더구나 수많은 로맨스 드라마가 차용하고 있는 그 플롯의 원전이다. 책으로도 애들에게 몇 번이고 읽어주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내용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건 그저 나만의 착각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신데렐라를 본 적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950년 봄에 만들어진 디즈니의 열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를.
드라마, 책, 팬시상품… 수없이 많은 변주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집중해서 원작을 본 적은 없었다. 교과서에서 수없이 이름을 접해 마치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책들처럼, 신데렐라 역시 그런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제대로는 모르는’ 콘텐츠였던 게다.
(솔직히, 내가 어릴 때 찾아보기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애니메이션이었다. TV에서 틀어주는 것을 보거나 비디오 가게에 가서 골라 와야 겨우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던 예전에 신데렐라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렸다. 『피구왕 통키』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 비하면 더더욱.)
아이는 제 나이보다 육십 년도 더 전에 나온 애니메이션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요정이 나와서 ‘비비디 바비디 부!’를 외치며 생쥐들을 말로 변신시키는 장면에서는 신나게 손뼉을 쳤다. 공주님으로 변해 마차를 타고 왕자님 만나러 가는 게 저리 좋을까.
아이들은 봤던 것을 보고 또 본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애니메이션도 예외가 아니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이고 아이들과 함께 신데렐라를 봤다. 그런데 여러 번 신데렐라를 보던 와중에 점점 더 눈에 들어오는 캐릭터가 하나 있었다. 트리메인 부인. 신데렐라의 새엄마. 아이가 부르는 노랫말 속 그 ‘계모’.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신데렐라의 오프닝은 이렇다.
그곳 어느 조그만 성에 부인을 잃고 홀로 된 신사가 신데렐라라고 하는 귀여운 딸과 살고 있었어요. 그는 아주 친절하고 착한 사람으로 딸을 무척 사랑했지만 딸에게는 역시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새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좋은 가문 출신으로 신데렐라 또래의 딸이 둘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스타샤와 드리젤라였죠.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새엄마의 못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차갑고 난폭한 데다가 예쁘고 착한 신데렐라를 질투했습니다. 그리고는 데려온 두 딸만 위하는 것이었어요.
트리메인 부인은 전래 동화 속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악역, ‘못되고, 차갑고, 난폭한 새엄마’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신데렐라보다 트리메인 부인에게 감정이 이입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니… 나이 들고 애 키우면 설마 다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님 나만 그런 건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새엄마, 꽤나 불쌍한 캐릭터 아닌가.
이미 첫 번째 결혼에는 실패했다.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기 힘든 시대적 배경 속에서 독하게 마음먹고 재혼했는데, 새 남편이 또 세상을 떠났다. 딸 둘 키우기도 버거웠는데, 육아 동지는 홀로 떠나고 딸이 셋이 되었다. (아아아…)
나라면 멘붕이 올 것 같은데. 냉랭히 못됐다고 설명하는 내레이터가 야속해 보였다. 트리메인 부인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가 아니고 그저 보통의 욕망을 가진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면, 지금까지 관객들로부터 먹은 욕이 조금 지나친 건 아닐까 싶었다. 아이 셋을 홀로 키우는 엄마라… 전래동화와 애니메이션 속에서 고통받은 것도 모자라, 바다 건너 한 나라에서 아이들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신데렐라를 구박한 계모’로 손가락질받으며 끝없이 고통받고 있는 그녀가 일순간 조금은 가련해졌다.
70년 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전형적인 악역이었던 트리메인 부인을 보다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인물로 바꾸어 새롭게 만들어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싶었다. 2015년에 실사영화로 다시 만들어진 <신데렐라>에서도 새엄마가 주요 악역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
어쩌면, ‘계모는 무조건 나쁘다’는 또 하나의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켰던 콘텐츠가 재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집요할 정도로 신데렐라에게 학대를 일삼는, 동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어 온 전형적인 ‘나쁜 새엄마’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다층적인, 어쩌면 보다 현대적이고 전복적인 캐릭터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는지. 마치 뮤지컬 ‘위키드’에서의 엘파바나,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의 악역 말레피센트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다시 태어났던 것처럼. (물론, 2020년대의 새로운 트리메인은 1950년대에 만들어진 원래 캐릭터처럼 폭력이란 형태의 잘못된 권위를 행사하진 못할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이 안 좋아해서 흥행에 실패하려나? 애 키우며 울고 웃는 이들을 위한 웃픈 어른용 동화도 하나쯤 있으면 좋을까 싶어 해 보는 생각이다.
원문: 자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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