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글쓰기가 꾸준히 되지 않아요!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깊은 공감을 한다.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감당 가능한 도전이지만, 막상 글을 쓰려 책상 앞에 앉으면 막막하기만 하다. 하염없이 앉아 있다 보면 열심히 글쓰기로 결심한 열정과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야심 차게 계획했더라도 이 막연함 앞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 무너짐의 과정은 참혹하다. 내 열정의 온도가 이것밖에 안되는가. 내 끈기와 꾸준함은 여기까지인가. 충만한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돌아오는 건 자괴감일 뿐. 새벽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던 버릇을 돌이켜, 의지를 다지기 위해 글쓰기를 뒤로 하고 자기계발서를 뒤적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과정은 어느 누구의 예가 아닌 나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는 또한 어느 누구의 예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 종합적인 막막함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것들, 그리고 이겨내야 할 것들
‘내 탓이오’란 말이 있다. 주위를 탓하기 전에 자신을 둘러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아무리 상대가 의도적인 아픔을 주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내가 그 관계에 엮여 있는 것이고 상처는 오롯이 내 것이며 극복해야 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즉 ‘내 탓이오’란 말은 자책감을 위한 말이 아니라 원인을 내가 찾아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확실하고도 주도적인 읊조림이다. 그렇기에 ‘내 탓이오’는 글쓰기에도 적용이 된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건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이고, 다시 글쓰기를 이어 나가야 하는 것도 나다. 그렇다면 글쓰기를 가로막는 내 마음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 내 안의 자기 검열관.
- 과도한 목표와 조급함.
- 소재가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
나의 글쓰기 초기를 돌아보면, 주춤했던 그때 이 세 가지가 나를 가장 옭아매었다는 기억이 생생하다. 이 세 가지를 이겨내야 글쓰기는 이어진다. 그러나 이겨낸다는 의미가 이것들을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연스러운 감정과 두려움은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 이유를 들어주고 달래며 함께 가야 한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 세 가지 마음은 결국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는 또 다른 형태의 마음이니까.
1. 자기 검열관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글쓰기의 조언자로 함께
평소엔 보이지 않다가, 글의 첫 문장을 쓰면 여지없이 나타난다. 잘 써야 한다, 길게 써야 한다, 필력이 이것밖에 안 되냐, 사람들이 이 글을 읽겠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검열관은 하나가 아니다. 인정사정없이 다양한 형태로 튀어나오는 통에, 글쓰기는 주춤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검열관은 글을 잘 쓰기 위한 힌트를 주는 것이다. 자기 검열관의 목소리를 공격이 아닌 조언으로 들어보면 어떨까.
글을 쓸 땐 잘 써야 하고, 길이가 적당해야 하며, 가능한 표현을 풍부하게 해서 필력을 키우고, 사람들이 읽을만한 가치 있는 글을 썼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그 목소리는 나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라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단번에 이루려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하나 개선해 나아가자고 다시 마음을 잡으면 충분히 자기 검열관과 함께 내가 원하는 좋은 글을 써 나갈 수 있다. 자기 검열관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글쓰기의 조언자로 함께 가야 한다.
2.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는 목표는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순기능이 있다. 목표를 세울 때의 설렘, 의지. 그리고 무언가가 구체화된다는 안정감. 그것을 이룰 때의 성취감. 나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목표다.
그러나 역기능도 있다. 이 역기능이 좀 더 세서 문제다. 모든 걸 목표로 환산하고 구체화하려는 사회의 정서가 개인의 마음으로도 들어와 ‘목적’과 ‘목표’를 헷갈릴게 하고 끝내 이 둘을 전도시키고 만다. ‘목적’은 방향이고, ‘목표’는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목표에 대한 집착으로 목표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목표 자체가 목적이 되면 사람은 조급해진다. 그리고 방향을 잃는다. 방향을 잃는다는 건 그 어떤 목표도 필요 없단 이야기다. 예를 들어 글쓰기가 목적이라면 목표는 글쓰기의 실행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실행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 목표를 너무 ‘산술적’으로만 표기하려 한다. ‘하루에 글 한 개, 일주일에 글 열 개, 일 년에 책 한 권 내기’ 등으로 말이다.
글쓰기를 마음먹었다면 당장의 목표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 글쓰기라는 목적은 기억하되, 글쓰기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말고 내어 놓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단 한 줄이라도, 단 한 문장과 문단을 썼더라도 스스로를 칭찬하고 응원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글쓰기를 꾸준하게 이어가는 방법이다.
3. 글쓰기 소재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다
브런치에서 공동 매거진을 운영한다. 공동 매거진은 하나의 매거진에 여러 작가들이 참여하는 형태를 말한다. 일주일에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10여 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글을 쓴다.
이 과정은 나에게 놀라운 전율을 안겨준다. 하나의 주제로 다양한 글이 나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참여하신 작가들이 자신의 일상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주제를 받아 들고는 글을 쓰기 위해 일상을 전에 없이 유심히 관찰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한다는 것.
나는 이것이 글쓰기의 매력이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흔히 우리는 특별한 소재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더 쉬운 길이긴 하다. 그러나, 소재에 기대다 보면 글쓰기는 단기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소재를 소비하면 글쓰기는 이어지지 않게 되니까.
그러나, 만약 소재를 생산한다면? 매일매일이 ‘글 요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글의 소재는 특별하기만 할 필요가 없고, 내 주위의 일상과 당연하게 보던 것을 한 번쯤은 당연하지 않게 보는 시야에서 나온다는 걸 알아채야 한다. 글을 쓰면 일상이 달리 보이고, 일상이 달리 보이면 소재가 생겨나고, 생겨난 소재로 글을 쓰고. 나는 이것을 글쓰기의 선순환이라 한다.
글쓰기는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야 하는 것
꾸준하지 않더라도 계속 이어 나가는 것. 잠시 꾸준하지 못하더라도 자책하지 말고, 계속 앞을 바라보며 긴 호흡으로 써 나가는 것. 글쓰기는 의무나 숙제가 아니다. 글쓰기를 결심하고 뒤를 돌아볼 때, 그 누구도 나와 당신의 등을 떠민 사람은 없다. 내 선택이며, 내 바람이며, 내 욕구인 글쓰기는 그래서 억지로 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일상의 선물이자 축복, 그리고 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재정의 할 때 우리는 자기 검열관과 함께 걷고, 목표에 조급해하지 않으며, 글의 소재를 일상에서 마구마구 찾아낼 것이다. 우리의 행복한 삶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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