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여러 곳에 메일로 원고를 보내봤는데…”
김개똥 씨는 책을 내고 싶다. 지인 중에 출판 관계자가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턱대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는 일뿐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출판사 여러 곳의 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오십군데 이상 원고를 보냈는데, 메일함에 도착한 답장에는 Ctrl키와 V키를 동시에 눌러 활자뭉치를 뿌려댄 스멜이 농후하다, 다음과 같이.
안녕하십니까? 저희 출판사를 믿고 귀한 원고를 보내주신 데 대하여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선생님이 주신 원고를 읽고 다방면의 가능성을 검토, 토론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원고를 검토한 결과, 저희 회사의 출판 방향과 다소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 출판하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반려하게 되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번에는 기회가 닿지 않았으나 추후에 또 다른 아이디어, 제안, 원고가 있으시다면 다시 한 번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방면의 가능성을 검토, 토론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솔직히 의심스럽지 않은가. Ctrl키와 V키를 동시에 누른 흔적이 글의 곳곳에 선명한데 말이다. 하긴 김개똥 씨도 할 말 없다. 오십군데 메일 보낼 때 자신이 했던 짓이기도 하니. 그나마 저런 답장이라도 오면 다행이다. 분명 수신확인은 했다고 나오는데 답장이 없는 곳도 적지 않다.
출판사가 원고를 거절하는 두 가지 경우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했는데 거절당할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 책이 되기엔 내 원고가 함량미달인 경우다. 답장에는 ‘출판 방향과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했을 뿐이니 내 원고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뭐 정말 출판방향이 안 맞을 수도 있겠다. 나는 소설을 썼는데 아무 출판사에나 보내다가 실수로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에 보냈을 수도 있으니.
하지만 솔직히 대부분 함량미달 경우에 해당한다. 출판사는 잠재력 있는 좋은 원고를 다듬어 책으로 만들어 줄 수는 있으나, 없는 원고를 대신 써주는 곳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글이 함량미달인 경우는 솔직히 답 없다. 새로 써야 한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다. 내 원고가 책이 될 가치가 충분한데도 출판사에서 거절의 답장이 오는 경우다. 솔직히 이런 일 드물지 않다. 당장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조앤 롤링의 대표작 <해리 포터>가 떠오른다. 12차례나 출판사에서 퇴짜 맞고 13번째에 겨우 블룸스베리 출판사에서 초판 500부를 찍었는데 이것이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베스트셀러 <꿈꾸는 다락방>으로 유명한 자기계발서 작가 이지성 씨도 80군데 출판사에서 모조리 거절을 당해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왜 출판사는 내 원고가 책이 될 가치가 충분할 때도 거절을 할까? 왜 조앤 롤링과 이지성 씨는 출판사로부터 수많은 거절을 당했을까?
언론계만큼이나 마감이 중요한 곳이 출판계다. 마감에 맞추다보면 법정 근로시간(오전 9시~오후 6시)을 넘기거나 주말에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야근수당이나 휴일수당을 지급하는 출판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한 출판사에서 일하는 A씨는 “수당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좋은 일 하는데 왜 돈을 따지냐’는 식으로 말하는 출판사 사장도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출판계는 고강도 노동으로 유명하지만 연차 15일에 대한 인식도 낮다. 사회과학·인문학 서적을 주로 내는 ㅇ사는 연차가 5일 밖에 되지 않으며, 역시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ㄴ사나 인문 예술 분야 책을 펴내는 ㅎ사는 연차 자체가 없고 1년에 3일 혹은 5일의 휴가만 직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출판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라는 것이 출판계 종사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중략)
이런 노동 환경에서 종사자들이 받는 임금 역시 낮은 편이다. 출판협의회(준)가 지난 12일 공개한 임금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5년 8개월차 출판계 정규직 종사자들의 평균 연봉은 3354만원이다. 코스닥기업과 1000대 기업의 각각 5년차 평균연봉 3424만원, 3975만원보다 낮다.
하지만 이 결과가 공개된 서울경기출판분회 온라인카페에는 “수치가 너무 높게 나온 것 같다”는 댓글이 여러 건 달렸다. 임금 체불 사례도 심심치 않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서를 만드는 ㄱ사에 다니던 한 편집자는 임금 체불 끝에 이직을 결정했다. – <미디어오늘> 2013년 4월 29일자 기사 중
당신이 기사에 나온 것처럼 빡센 업무환경에서 박봉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당장 작업하는 책 원고의 오탈자 잡고 문장 다듬는 것도 버거워 팔꿈치에 고인 고름 짜내며 야근하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메일로 원고지 1,000장짜리 책 원고를 보내서 검토해달라고 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원고를 꼼꼼하고 읽고 제대로 검토할 수 있겠는가. 출판사에는 이런 식의 묻지마 투고가 하루가 멀다고 들어올 텐데.
원고를 보낼 때는 ‘편집자 입장’을 고려하라
실제 친분이 있는 편집자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메일로 들어온 묻지마 투고가 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나에게 털어 놓았다. 이렇듯 활자라면 치가 떨리는 편집자들의 눈을 그나마 사로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투고를 해야 할까?
패트릭 G. 라일리가 쓴 기획서 작성 관련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읽어 보자. 이 글에서 과도한 업무와 박봉에 시달리는 편집자의 충혈된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이 미팅을 청한 이유는 내게 무척 중요한, 따라서 당신에게도 매우 중요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요. 바로 1 Page Proposal을 쓰는 방법이오.”
그의 몇 마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기획서에 심각한 실수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충격이었다. 다른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늘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하고 완벽하게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을 공부해 왔다. 50쪽 짜리 기획서가 너무 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카쇼기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중략)
“1 Page Proposal은 나의 성공 비결 중 하나요. 당신에게도 매우 귀중한 성공 비결이 될 수 있소. 거래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한 쪽 이상의 분량을 읽을 만큼 시간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문 법이오.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소.”
그의 메시지는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도 명확하게 귀에 꽂혔다. 내가 준비했던 기획서는 카쇼기 같은 사람에게 적당하지 않았다. 내용이 완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간결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가 제출한 기획서는 관행에 충실하게 회사 소개, 사업 설명, 위험 요소, 시장 조사, 자본 평가, 재정, 경영, 최근 상황, 법적 사항, 참조 등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또한 10여 개의 도표, 차트, 지도가 그려저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인 ‘자료를 읽을 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카쇼기는 우리의 세밀한 기획서를 읽고 결정을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일과는 시간 단위가 아니라 분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틀에 박힌 사업 기획서에 비하면 너무나 간결한 50쪽짜리 기획서였지만, 아침 식사 전에 사업체를 매매하고 전 세계의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너무 분량이 많았던 것이다.
당신이 묻지마 투고를 하며 메일에 무턱대고 원고지 1,000장짜리 문서파일을 첨부할 때, 정작 그 원고를 읽을 편집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카쇼기는 의 저자 패트릭 G. 라일리에게 기획서를 1장으로 써야 한다고 충고한다. 마찬가지다. 출판사에 투고할 때는 1,000짜리 묵직한 원고와 별도로 1장짜리 개요서를 함께 보내야 한다.
개요서는 어떻게 작성해야 할까?
개요서에는 자기소개, 책제목, 책을 쓰게 된 배경과 경위, 책의 주제와 내용, 목차 정도의 내용을 간략하게 적는다. 간혹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소개 안하고 덜컥 원고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 출판사는 해당 원고를 쓴 필자가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마련이다.
자기소개를 적을 때 의욕에 넘쳐 자서전을 써내려가듯 백화점식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약장수나 사기꾼처럼 보인다. 차라리 원고 내용과 관련된 분야에서 자신이 어떤 경력과 전문성을 쌓아왔는지를 솔직담백하게 피력하는 것이 좋다. 책제목은 너무 고심해서 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책의 내용만 잘 담아내면 된다. 어차피 일이 잘 풀려 출판사와 작업을 하게 되면 책을 인쇄하기 직전까지 ‘진짜’ 책제목 가지고 고심하게 된다. 지금 당신이 개요서에 쓴 제목은 출판사도 ‘잠정적’ 제목으로 취급한다. 책을 쓰게 된 배경과 경위는 말 그대로 책을 쓰게 된 계기나 고민을 솔직하고 간결하게 쓴다. 책의 주제와 내용 역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테다.
목차는 책의 전체 설계도와 같기 때문에 신경 써서 작성해야 한다. 출판사가 매우 유심히 들여다보는 지점이 바로 목차다. 건축업자들은 설계도만 들여다봐도 집의 모습이 훤하게 그려지듯이 편집자들은 목차만 봐도 전체 책의 모양새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떻게 목차만 보고도 알 수 있냐고, 안 믿긴다고? 에 나오는 카쇼기가 어떻게 기획서 1장만 보고도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을까? 그는 관련 분야에서 수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작성한 기획서 1장만으로도 작성자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출판 편집자는 책의 전문가다. 당신이 쓴 개요서와 목차만으로도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1장짜리 개요서에 심혈을 기울여라. 물론 2장짜리 개요서도 괜찮다. 하지만 10장은 곤란하다.
2011년에 12월에 출간된 나의 책 <글쓰기 클리닉>은 비즈니스북스 출판사와 작업했다. 비즈니스북스 출판사와 계약할 때 아예 원고를 하나도 안 쓰고 목차만 가지고 계약했다. 물론 당시 비즈니스북스의 편집자가 나와 잘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책이 출간되기 위해서는 출판사 대표의 승인이 필요하다. 일면식도 없는 비즈니스북스 출판사 대표는 내 저자로서의 프로필과 책의 목차만으로도 계약을 해볼만 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2011년 4월 4일에 내가 비즈니스북스 측에 보냈던 메일을 그대로 옮긴다.
출판사에 보낸 목차 예시
안녕하세요. 임승수입니다. 주말 잘 보내셨나요?
3월 31일에 이사하느라고 최근에 계속 좀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일요일 오후에 급하게 목차를 짰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목적을 달성하는) 글쓰기 클리닉
프롤로그 – 글치 공학도, 인문사회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다
■ 글쓰기가 두려운 그대에게
글쓰기가 정말 싫습니다. 글을 안 쓰고 사는 방법은 없나요?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요?
저는 제 글이 잘 쓴 것 같은데 남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뭐가 문제죠?
머릿속에는 생각이 많은데 글로 쓰려면 안 되네요.
어떻게 A4용지 10장이 넘는 긴 글을 쓸 수가 있죠?
맞춤법을 많이 틀려서 자신감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글을 읽으면서 웃고 울 수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글로 감동을 줄 수 있죠?
내가 쓴 글이 맘에 안 들어서 글쓰기가 두렵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이럴 땐 이렇게 써라
기획서 쓰기
보고서 쓰기
자기소개서 쓰기
업무 이메일 쓰기
연애편지 쓰기
프리젠테이션
기사 쓰기
책 쓰기
논문 쓰기
칼럼(주장글) 쓰기
발표글 쓰기■ 문장강화 TIP
간결한 문장이 좋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이다
주어와 서술어가 일치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구어체는 좋지 않다
단락을 잘 구분해야 한다
수동형보다 능동형이 좋다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중제를 적절히 활용한다
과감하게 삭제하라
적절한 인용구는 글에 신뢰를 더한다
소리 내서 읽어보면 글이 어떤지 잘 알 수 있다에필로그
목차는 같이 협의하면서 수정 보완할 수 있습니다.
■ 글쓰기가 두려운 그대에게
■ 이럴 땐 이렇게 써라
■ 문장강화 TIP이렇게 크게 세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글쓰기가 두려운 그대에게’ 는 글의 상담(카운셀링)의 형태로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얘기하는 내용이고요. ‘이럴 땐 이렇게 써라’는 상황에 맞는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담은 내용입니다. ‘문장강화 TIP’은 그야말로 매끄러운 문장을 쓰기 위한 테크닉에 관한 것이죠.
이 정도면 구색이 맞춰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책의 판형은 일반 책보다 좀 작게 해서… 핸드북 같다는 느낌을 주면 어떨까 싶고요. 분량은 너무 욕심내지 말고 원고지 700장 전후로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600장 정도도 괜찮을 것 같고요.
그러면 내부에서 얘기해보시고 의견 부탁드립니다.
미리 유사 도서가 있는지 확인도 필수
실제 책이 나왔을 때 이 목차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초기에 짠 목차가 완성도가 높고 탄탄했다는 뜻이다. 비즈니스북스 출판사 측에서는 내가 짠 목차만 보고도 이 저자가 얼마만큼 구체적으로 책의 내용을 고민하고 있는지 읽어낸 것이다. 그러니 목차만으로 계약을 진행했을 테고. 그런 이유로 꼭 책의 원고를 다 써야만 출판사와 계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쓴 개요서에 적절한 분량의 샘플원고만으로도 충분히 출판사와의 계약을 이끌어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원고를 다 쓴 상태로 계약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원고를 다 쓴 상태로 출판사와 계약하면 편집 작업을 하면서 갈아엎을 곳이 많아 생고생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책 원고 및 개요서를 작성하기 전에 내가 쓰려는 주제의 책이 기존에 출간됐는지를 확인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쓸 주제에 관한 책이 이미 많이 출간됐다면 그 책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에 출간된 유사도서가 있는데 판매가 무척 부진했다면 출판사들이 계약을 주저하거나 꺼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열정으로 무턱대고 써내려가는 것보다는 내가 쓸 주제와 관련해서 차분하게 출판시장의 현황을 조사해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하더라도 내 원고가 꼭 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보장은 없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때가 있고 운이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당신의 원고가 책이 될 확률이 극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생이란 알고 보면 확률게임 아닌가.
■ 그동안 제가 ㅍㅍㅅㅅ에 ‘책쓰기’를 주제로 연재(?)했던 글들에 관심과 성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번에 책쓰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를 출간했습니다. 아래에는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의 ‘들어가는 글’을 옮겼습니다. 책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제 책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들어가는 글
대한민국에서 인문사회 책을 쓰는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은 애초에 부자로 살기는 거의 글러먹었다는 얘기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지난 1년간 인문사회 책을 과연 1권이라도 샀는지 생각해보라. 그런데 바로 내가 그 인문사회 분야의 작가다. 뭐 이렇다 보니 가끔씩 동네 문방구에서 로또를 산다. 재수 좋으면 내 책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을 로또가 대신 해결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 번은 로또를 사놓고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지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있다. 우선 구입한지 30년이 넘어 낡았다기보다 늙었다는 표현이 더 맞는 영창피아노, 외양뿐만 아니라 소리조차 노화된 그놈을 수천만 원 대의 세계 최고 명품 피아노 스타인웨이로 교체한다. 내 귀도 이제는 호강 좀 해야 하니까. 그래, 이참에 엉덩이도 호강 좀 하자. 북유럽 빈티지 가구 전시회에서 봤던 그 1,000만 원짜리 의자 말이다. 평일 낮 한적한 전시장에서 직원의 눈을 피해 잠시 엉덩이에게 누리게 했던 그 1,000만 원짜리 호사를 매일 집에서 누릴 수 있을 테다. 이렇게 로또에 당첨됐다는 망상을 따라가니 내 주변의 물건들이 하나씩 어마어마한 명품으로 바뀐다.
주변 물건들을 바꾸며 끊임없이 자라난 망상은 내 삶의 영역까지 옮아오며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더 이상 책을 쓰지 않을 것인가?’ 솔직히, 대답하는데 아무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책은 계속 쓸 거야’ 머릿속 망상은 재차 질문했다. ‘그렇다면 로또 1등에 당첨되면 강의는 더 이상 안 할 것인가?’ 역시 즉시 대답했다. ‘무슨 소리? 계속 해야지’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로또 1등에 당첨돼 내 주변에 있는 물건들은 죄다 최고급품으로 바뀌는데도 내 삶은 로또 당첨 전과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 주변에 무슨 물건이 있든 상관없이 이미 책 쓰고 강의하는 내 삶은 최고급품이라는 사실 말이다. 피아노로 치면 스타인웨이급이랄까? 물론 로또 1등 당첨은 실패했다. 하지만 로또 구매에 쓴 5,000원 치고는 꽤 큰 가르침을 얻었으니 엄청 남는 장사다.
그렇다. 내 삶은 책을 쓰기 전과 후로 나뉜다. 학창시절 글치 공학도로 A4 한 장 쓰기도 버거워했으며,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연구원으로 월급 받으며 책 쓰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았던 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2006년에 베네수엘라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진보적인 사회변화를 이끈 차베스 대통령의 삶을 다룬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썼다. 이 책이 맺어준 인연으로 베네수엘라 정부 공식 초청을 받아 내 수입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최고급 호텔에서 하루 500만 원짜리 방에 묵으며 외교부 직원의 안내로 베네수엘라 이곳저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돈 주고도 못 하는 경험이다. 2008년에는 마르크스 자본론을 쉽게 풀어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썼는데 이 책은 무척 반응이 좋아 바다 건너 중국에서도 출간됐고, 덕분에 이따금 중국 독자들에게 메일을 받는다.
한편 저자가 된 2006년부터 지금까지 했던 강연 횟수는 1,000회가 훌쩍 넘었다. 전문 강사 중에서도 나만큼 강의를 많이 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수백 명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강연 내용에 맞춰 천연덕스럽게 오른쪽 신발을 벗어 오른손에 쥐고 흔들며 강의를 한다.
2014년 1월부터 국민라디오에서 <임승수의 좌변기>라는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팟캐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덕분에 길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방송 잘 듣고 있다’는 연예인이나 들을 법한 덕담을 듣기도 한다. 이런 일들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내가 네이버 인물검색에 나오고 있다.
단언컨대, 이 모든 일은 내가 책을 쓴 덕분에 가능했다. 예부터 좋은 것은 이웃과 나누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이 책에 로또 1등 당첨에도 바뀌지 않는 ‘최고급’의 삶, 바로 책을 쓰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담아냈다.
우선 글치 공학도였던 내가 경향신문이 선정한 뉴 파워라이터 20인에 들 수 있게 된 실전 글쓰기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담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법, 책 한 권이라는 긴 글을 쓰는 방법, 남과는 다른 나만의 개성 있는 글을 쓰는 방법, 문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출판사에 투고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제 출판계약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내 삶의 어떤 것이 책의 소재가 될 수 있는지, 목차는 어떻게 짜야 하는지, 책 제목은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실제 책이 나온 이후 저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 책 쓰기에 대해서 내가 아는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다뤘다.
또한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픔을 책 쓰기로 치유하고 이겨낸 은수연(가명) 씨, 세계 일주 경험을 책으로 펴낸 뒤 자신의 인생진로까지 바뀐 고은초 씨, 수학 전공자로서 역사에는 문외한이었는데 고조선 전문 역사서까지 낸 김상태 씨 등 책을 쓴 것을 계기로 자신의 삶이 180도 달라진 이들을 직접 인터뷰한 생생한 내용을 담고있다. 저자로서 지금껏 경험한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연료가 한정된 차를 몰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누구나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곧장 차를 몰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인생은 ‘시간’이라는 한정된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아닌가. 묻겠다. 왜 유독 인생이라는 차를 운전할 때는 가고 싶은 곳으로 곧장 가지 않는가? 심지어는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같은 궤도만 뱅글뱅글 돌고 있지는 않은지.
나이가 마흔이 넘으니 연료가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다는 조바심이 부쩍 든다. 그렇다면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차를 멈춰 더욱 더 원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돈에 시간을 팔지 않으면서부터 행복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책 쓰기’가 바로 그런 삶이다. 모쪼록 이 책이 당신에게 무한궤도를 벗어나 원하는 곳으로 직진할 수 있는 용기와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14년 5월, 비 온 다음 날 어느 새벽에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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