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는 우리의 1,000명당 의사 수는 작지만, 의료 접근성이 높아 의사 수를 더 늘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측정 방식은 다양하지만 의료 접근성은 보통 의사 1인당 진료 회수로 측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접근성이 높다는 건 의사가 환자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의사 한 명이 하루에 환자 열 명을 보다, 스무 명을 진료하면 의료접근성이 높아지게 된다. 의사는 환자를 더 많이 진료하지만, 환자 개인은 병원을 더 자주 방문하는 것과 같다.
어느 페친이 링크해 놓은 어느 대형병원 원장의 건강 지키기 몇 가지 원칙을 읽었는데, 병원에 자주 가는 게 건강의 비결이란다. 그래선지 내 주위 어떤 사람은 몸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병원을 방문한다. 내가 보기엔 가벼운 감기 몸살 정도인데도 말이다. 뭔 주사인지 모르겠으나 갈 때마다 한 방씩 맞고 온다.
몇 년 전인가, 과외 알바로 돈을 잘 번다던 한 졸업생은 피곤하면 병원에 가 링거 주사를 맞으면서 두어 시간 병실에서 잠을 잔단다. 집에서 좀 쉬면 될 걸 왜 불필요하게 혈관에 주삿바늘을 자주 꽂느냐? 피로가 풀리리라는 기대와 함께 의사가 권유하기 때문이란다.
아내는 피아노로 평생 돈을 벌다 보니 손가락 관절이 아파, 어느 유명한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책을 써 유명해졌고, 그 처방을 따랐더니 허리가 많이 나았다. 하지만 손가락엔 그 처방이 잘 안 먹혀 조언을 얻고자 간 것이다. 아침 일찍 갔는데도 노인들이 스무 명 정도 이미 대기 중이었다. 서로서로 친구처럼 알고 지내고 있었다. 매일 출근한단다. 많이 나았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잘 모르겠지만 오면 안심이 된단다.
아내 차례가 되어 들어가 온 이유를 설명하자 버럭 소리를 지른다. ‘시킨 대로 하고, 안 되면 계속해라’. ‘시킨 대로 오랫동안 했는데, 전혀 차도가 없어요’. 말하기 싫다는 듯이 나가란다. 다음 분! 노인들은 모두 입 닫고 방을 출입하면서 병원을 출퇴근하고 있었다. 제법 많은 수의 노인들이 매일 습관적, 정기적으로 병원을 들락거린단다. 의료접근성, 정말 죽여 준다!
한 지인이 있다. 의사 일은 영 흥미가 없는지 다른 일에 더 매달린다. 한의사 일로 돈을 많이 벌었단다. 20년 전인가 싶은데, 들어보니 한 달 벌이가 당시 내 연봉이었다. 그 돈으로 구멍가게 하고 싶지 않아 이런저런 일로 바빴다. 병원엔 잠시만 머무른다. 워낙 이리저리 일을 벌이다 보니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벌어 놓은 돈 많이 까먹었다.
진료에 충실하기로 했지만 그 사이 고객관리를 못하고, 업종상황도 좋지 않아 수입이 이전만큼 못하다. 하지만 하루 스무명 정도만 규칙적으로 와도 먹고 살만하단다. 동네 할머니들이 안마기 등 이런저런 의료기구 활용하려 출근해 주니 고정 수입은 확보되어 있단다. 의료 접근성은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병원 자주 가면, 건강해지는가? 의료 접근성이 높으면 장땡인가? 나는 그게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1년에 병원 한 번도 안 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감기몸살로 아플 때도 있지만 병원에 가는 대신 나는 독일에서 유학할 때 ‘감기몸살 걸리면 따뜻한 물 많이 마시면서 쉬세요’라는 독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기억하고 그대로 따른다. 처음엔 한국처럼 주사 한방 주면 좋을 텐데라며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엄청 감사하고 있다. 스스로 몸살을 이겨내는 방법을 많이 훈련해왔기 때문이다. 몸살이 엄청 심할 때면 약국에서 사 놓은 몸살약 한 알만 먹어도 낫는다.
병원 가면 우리는 쫓아내기가 바쁘다. 도무지 말 걸 기회를 주지 않는다. 피부가 가려워 설명하면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처방전만 갈긴다. 두드러기라며 처방해 준 약을 먹었는데, 더 심해져 다시 방문해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텃밭일을 하는데 혹시 풀독이 올랐지 않을까 생각한다니까 풀독 같다며 또 약을 처방하며 다시 내쫒는다. 밖에 피부미용을 바라는 환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의료접근성 지표는 높아만 간다!
하지만 독일에선 환자와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가지면서 자주 올 필요가 없게 만든다. 당시에는 젊을 때라 몸을 함부로 다루고, 학위논문 쓰느라 몸살과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학수고대하던 주사는 끝내 놔주지 않았다.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료의 질이 높았으며, 과잉진료도 없었다. 우리 나라 의사식으로 표현하면 의료접근성이 매우 낮았던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좀 더 건강해졌다.
우리나라의 높은 의료접근성은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의사들과 건강보험을 남용하는 무책임한 환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과잉진료의 다른 측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높아진 의료접근성으로 훌륭한 건강보험은 훼손되고 있다. 차라리 지금은 낭비적이고 불건강한 의료접근성을 낮출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의사가 더 필요하다. 의사공급은 더 늘어나야 한다.
나는 의사를 증오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작은 병 정도는 어느 정도 통제할 지 몰라도 큰병이나 정말 이상한 징후에 대해선 의사의 전문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로결석 걸렸을 때 의사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며, 눈수술 받고 광명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동료후배 들 중 친한 의사도 많다. 실력은 물론 인술을 베푸는 분들이다. 내 글은 결코 이런 분들을 향하지 않는다.
내 글은 대한민국 의사직군 전체의 평균적 모습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평균 값이기 때문에 그분들도 비켜나지 못할 내용도 있다. 누군가 대학교수의 문제점을 고발할 때 내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점이 있으면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은 없다.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의사집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위 ‘지식인’들의 글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의 분노만 들린다. 내가 살아 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항상 그랬다. 수능점수에 약코가 죽었던지, 공부 잘했던 사람들끼리 친구관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죽었거나 리그의 멤버이기 때문이거나!
20년 전 쯤인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하며 그때도 파업한 적이 있었다. 암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의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경악했고 분노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아무도 경악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다. 모두 분노를 감추거나 그 놀라운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듯했다.
보통 사람들은 비판할 엄두도 못 냈다. 나도 그럴 능력이 없어 가슴만 쳤다. 참 X같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일간지 신문에 실린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여성 기자였는지, 일반 칼럼니스트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의사들의 그 만행을 배배꼰 요설로 변호해 주고 있지 않는가! 아, 그들만의 리그가 있구나.
앞에 쓴 얘기의 일부는 이미 방송과, 앞에 게재된 방송원고에 들어 있다. 방송 원고라 소상히 설명할 수 없었고, 원고 안에는 여러 주제가 혼재되어 있어 주목하지도 못한다. 그 때문에 초점을 맞춰 다시 쓴다. 나머지 주제도 새롭게 써 올릴 계획이다. 이번에는 저 시험 기계들의 만행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리라. 그들의 요설을 좌시하지 않으리라. 보통 사람들의 저 한맺힌 분노에 작으나마 메아리로 답해 주리라.
마치며
좀 없어 뵈는 주장이지만, 우리 땐 자연계열의 의과대학과 인문계열의 상과대학 사이에 시험점수 차이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대생들이 고등학교 때 공부 더 잘했습니다(나 빼고).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고 나니 나도 영 지질해져 버렸지만, 이분들의 점수 프라이드가 너무 심해 언급해 봤습니다. 앞으론 이런 지질한 짓 다시 안 하겠습니다.
높은 의료 접근성 때문에 의사를 증원할 필요가 없다는 요설에 넘어가지 맙시다. ‘한국에서 높은 의료 접근성은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의사들과, 우리의 훌륭한 건강보험을 남용하는 무책임한 환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과잉 진료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오히려 의사 수를 늘려 탐욕과 불건강을 촉진하는 의료접근성을 낮춰야 한다.’
원문: 한성안의 좋은경제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