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온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사람들이 학교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학교는 교육 문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학교나 교육 부문에서 찾을 때가 많으며, 그때마다 학교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대변하는 모순의 대명사가 된다.
사람들은 학교에 없는 게 많다고 말한다. 학교에는 재미가 없다. 열정이 없고 상상력이 없으며 창의성이 없다. 공정과 정의, 배려가 없다. 인간다움이 없다. 우리는 이 밖에도 학교에 없는 것의 목록에 다른 단어들을 더 많이 늘어놓을 수 있다. 그것들은 저 문장들 속의 재미나 배려 같은 말처럼 틀림없이 사람들 대부분이 좋아하고 아끼는 소중한 가치를 품고 있을 것이다. 없는 게 많은 학교는 우리에게 희망보다 절망을 안겨준다.
미안하지만, 교사인 나는 저 문장들이 진부한 상투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주 목에 힘을 주며 학교에 없는 것들의 목록에 한사코 학교에만 있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멋진 말을 늘어놓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런 말들을 워낙 자주 들어 학교라는 장소가 원래 그런 곳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말기에는 학교를 향한 비난과 혐오의 말들이 너무 거칠다. 학교가 정말 그런 곳이라면 우리는 교육을 하는 대신 학교를 없애야 한다.
나는 가끔 학교가 너무 많은 일을 해 주기를 바라거나, 학교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얻어 내려고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학교가 학생들의 인성과 실력을 동시에 길러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인성을 강조하면서 생활지도를 원칙적이고 엄격하게 실시하면 실력 키우는 일에나 신경을 쓰라며 신경질적으로 견제한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모험심과 도전정신과 창의성을 길러줘야 하지만, 그것들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아이들은 모험심과 도전정신과 창의성을 모험과 도전과 창의라는 언어로만 경험한다.
교사들은 학교 본연의 일이라는 교육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한편에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를 기르는 일을 강조할수록 다른 한편에서 학생들이 자기애로 뭉친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들은 각자의 눈을 서로 전혀 다른 쪽에 맞추면서 자기들이 그리는 학교와 교육이 세상의 등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학교와 교육에서 희망을 구하려고 할수록 학교와 교육이 절망의 산실이 되었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 철학자와 정치인, 경제 전문가와 교육학자,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등 온갖 사람들의 요구 사항들을 받아 안은 학교는 학교인 듯 학교 아닌 학교 같은 ‘가짜’ 학교가 되었다. 학교를 학교로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학교가 지극히 교육적인 목표를 등대 삼아 언어가 아니라 실제 삶과 행동으로 교육을 수행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최근 학교에 대한 관점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책 한 권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벨기에 루벤 가톨릭 대학교 교육사회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얀 마스켈라인와 마틴 시몬스가 함께 쓴, ‘스콜라스틱 교육’이라는 부제가 달린 『학교를 변론하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학교가 학교 본연의 일에 충실할 때 이루어지는 교육이 스콜라스틱 교육이다. 본연의 상태에 가까운 학교는 어떤 곳인가. 저자들은 학교를 학교이게 하는 주요한 역할이 “자연적이라는 불평등한 질서를 지연시키기”에 있다고 말한다. 학교는 비생산적인 시간, 곧 누군가에게는 출신 성분과 사회적 지위로 인해 요구할 수 없었던 시간인 자유시간을 평등하게 부여한다. 저자들은 학교의 발명을 자유시간의 민주화라는 말로 정의했다.
학교의 시간은 유예된 시간이다. 스콜라스틱 교육의 시간, 학생들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시간은 학교에 있는 책상 위에 항상 무언가가 올려져 있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학교 밖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기술, 목표는 실제의 지식, 기술, 목표가 아니라 수업 시간에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지식, 기술, 목표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학교가 사회 속으로 들어와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기능주의적 학교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시각이다.
지난 학기 우리 학교에서는 온라인 비대면 수업과 등교 대면 수업을 혼합한 방식으로 학사 시스템을 운영했다. 학기 후반에는 학년별로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격주로 운용했는데, 전면 등교 체제를 실시하기를 바라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돌봄과 양육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강했던 학부모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라면 질색부터 하는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학생들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이 원래 학교란 현재 있는 그곳에 지금 모습처럼 존재해야 하며, 바로 그곳에서 수업을 해야 진짜 수업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스콜라스틱 교육의 저자들이 보여준 시선을 빌리면, 학생들은 집과 사회에서 격리된 공간, 세상의 시간으로부터 유예된 공간에서 평등한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을 때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는 없는 게 많지만 학교에만 있는 것도 많다. 학교에 없다는 재미도 학교에서만 찾을 수 있는 재미로 바꿔 즐기면 어떨까. 학교는 다른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선생님들을 통해 과거에 알지 못했던 지식을 만나고,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선생님들 각자의 지식 전달과 이해 방법을 경험하며, 그런 경험의 과정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재미가 있다. 내 감정이나 뜻이나 의지를 꺾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또 다른 각별한 재미를 줄 수 있다. 사람들이 학교에 없는 것들에 대해 비난하기 전에 학교에만 있는 것들을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