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한국 사회의 사건 중 하나가 용산참사였고, 그다음이 최근의 인천공항공사 정규직화 사건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얻는 데는 페북에서 찰스 틸리(Charles Tilly)를 언급한 최성수 교수의 영향도 컸다. 초간단 정리를 미리 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은
- 구조적 사회이동의 기회가 줄어든 상황에서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경제성장률이 떨어졌다는 것),
- 기회 평등의 개선으로 상위계층의 세습이 어려워지고 전국민적 동질성으로 상위-하위계층 모두 동일한 지위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자,
- 상위계층의 지위독점과 계급세습을 재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배제 투쟁에 나섰는데,
- 그 방식은 공정을 매개로 한 기회 비축(opportunity hoarding)이다.
틸리의 논의에 따르면 ‘지속되는 불평등’은 범주 구분에 의한 불평등(categorical inequality)이고, 착취와 기회 비축(opportunity hoarding)으로 재생산된다. 한국 사회에서 착취는 이미 노동시장 분절화로 광범위하게 자행되지만, 기회 평등의 개선은 상위계층에게 후자(=기회 비축)를 위기에 빠뜨렸다. 게다가 범주 구분의 수가 줄어든다. 현재 성별만 확실한 기준으로 남았고, 과거에 크게 위력을 발휘하던 지역, 학벌의 영향력이 급감했다.
현재 벌어지는 일은 기득권층의 기회 독점을 위한 사회적 배제다. 시험에 접근하기 어려운 계층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제척하고 자신들만의 기회를 비축(opportunity hoarding)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부 20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상당한 크기의 코호트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벌어진다.
공정은 기회 비축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제이지, 실체적 기회 평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기회 평등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가족 배경이다. 공정 담론이 실체적 기회 평등으로 발전한다면, 가족 배경의 영향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논의는 가족 배경을 삭제하고 노력한 개인만 앞에 둔다.
교육 불평등이 커지고 기회 평등이 안 이루어져서가 아니다. 교육 불평등이 작아지고 기회가 평등해지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공정해졌지만, 구조적 이동의 저하로 상향사회 이동이 어려워지고 계급세습의 경로가 불분명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처한 독특성에 기반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불평등과 계층 재생산에서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도 겪지 않은 특이한 구조적 상황에 처해 있다. 역사적으로 기회가 평등해지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공정해진 과정이 폭발적 경제 성장기, 구조적 사회 이동이 활발한 시기에 일어났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 전반이 진보로 바뀌었다. 서로 반목하던 집단 간의 분화도 약화된다.
많은 서구 사회가 2차 대전 직후 역사적으로 이런 일을 경험했다. 북구 사회뿐 아니라 가장 보수적인 미국도 이 시기에 불평등이 줄어들고 복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회의 범주 구분도 약화했다. 사회학자인 리처드 알바(Richard Alba)는 그의 책에서 미국에서 한때 ‘하얀 깜둥이(화이트 니그로)’로 불렸던 아이리쉬(이태리인, 동유럽인)가 2차 대전 이후 주류 백인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알바는 현재의 소수인종도 IT 산업 혁명으로 구조적 사회이동이 활발해지면, 2차 대전 직후 벌어졌던 일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조적 사회이동은 경제가 발전하고 좋은 직업이 늘어나고 상위계층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다. 순수사회이동이란 그런 구조적 변동과 관계없이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랭킹이 바뀌는 것이다. 순수사회이동이 늘어나면 하위계층이 상위계층으로 올라가는 일도 늘어나지만, 상위계층이 중간이나 그 이하로 떨어지는 일도 늘어난다.
하지만 구조적 사회이동이 활발하다면 상대적으로 부모 세대 대비 자식 세대에서 랭킹은 낮아졌지만, 부모 세대 대비 자식 세대에서 절대적 경제 수준은 높아진다. 통시적으로는 상대적 비교에서 하향이동이더라도, 절대적 비교에서는 상향이동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순수사회이동의 증가가 사회적 갈등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통합을 촉진한다. 한국도 한강의 기적으로 이러한 사회이동을 경험했다.
위험한 상황은 구조적으로 하향사회이동의 확률이 높아지는데 “순수” 사회이동이 커지는 경우다. 불평등도 증가한다. 경제가 폭망한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면 칠레). IMF 직후의 한국 상황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모두가 하향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의 하항이동이 구조적 상황의 결과인지 순수사회이동의 결과인지 불명확하다. 계급투쟁보다는 각자도생이 더 부각되는 상황이다.
미국(과 다른 서구) 사회는 근래에 구조적 사회이동이 줄었지만, 순수사회이동은 변화가 없고, 계급화가 완성되어 있다. 불평등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기회 불평등이 워낙 심해서 하위계층은 상위계층과 동일한 경쟁을 하지 않는다. 계급이동이 없어서 오히려 안정된 사회다. 많은 서구사회가 순수사회이동에 변화가 없고 안정되어 있다. 사회적 계급의 격차가 크고 계급세습이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회가 안정된 계급세습 경향을 보이는 것을 두고 나온 사회학의 유명한 테제가 세대 간 사회 이동의 끊임없는 유동성(constant fluidity)다. 계층론 공부하는 사회학자면 누구나 아는 존 골드소프(John Goldthorpe) 등이 정리한 논의다. 구조적 변동을 통제하고 나면, 대부분의 서구사회가 국가 간 비교를 해도, 국가 내 통시적 비교를 해도, 순수 계급이동은 비슷하다는 거다. 이게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가 겪었던 경험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위에서 언급한 일반적 역사적 경험과 다르다. 경제가 안정된 상황에서, 구조적 사회이동은 줄지만, 순수 사회이동이 늘어난다. 끊임없는 유동성 테제에서 규명한 특징이 한국 사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박현준 교수의 RSSM 논문도 있다.
상위 50% 내부의 불평등이 커지지 않고, 하위계층이 대거 대학에 진학하는 등 기회 평등이 개선되었다. 상위계층부터 중하위계층까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며 교육, 미래의 비젼을 공유하고 동일한 지위를 노린다. 그 결과로 순수사회이동이 늘어나면 상위계층의 하향이동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리고 상위계층의 입장에서 그 원인도 명확히 인식된다. 구조적 상황의 악화로 하향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균등으로 독점적 기회를 상실하고 경쟁에서 밀려서 하향이동하는 것이다. 계급세습구조의 고착화를 통한 안정적 재생산 욕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전 포스팅에서 보여주었듯 한국 사회에서 IMF 이후 늘어난 불평등도 상층과 나머지의 분리가 아니다. 상위 1/2 내지 2/3가 큰 불평등의 증가 없이 같이 간다. 상위 50%에서 불평등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최하위 계층을 배제했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계층이 불평등의 증가에도 배제되지 않고 경쟁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과거에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던 중하층도 사교육의 보편화로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교육 경쟁은 더 격화했다. 몇 번의 포스팅에서 얘기했듯, 교육 기회 불평등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었다.
이러한 기회 평등과 달리 노동시장은 분절되어 있고 불안정이 크다. (교육) 기회의 측면에서 계층 간의 격차는 모호해지는 데 반해, (노동시장) 결과의 측면에서 격차는 명확하다. 특히 정규직-비정규직, 고용 안정성의 차이가 크다. 이러한 안정된 고소득 직업의 기회를 배타적으로 향유하고 싶은 유혹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세대 내에서 학력 간 소득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논문 작업 중). 분절된 노동시장에서 특정 계층이 우월적 지위를 독점하면, 학력 간 소득 격차도 늘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는 상위계층의 노동시장 독점이 약화했다는 신호다. 현대 사회에서 계급 재생산의 가장 명확한 통로가 교육을 통한 재생산인데, 한국은 교육의 기회는 평등해지고, 교육을 받은 후의 학력 간 노동시장 격차는 줄어들었다. 계급을 재생산하겠다는 관점에서 보면 현대 사회 계급 재생산의 가장 중요한 통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정을 명분으로, 노동시장 기회를 배타적으로 비축하겠다고 나섰다. 공정 담론이 ‘지균충’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등 주로 하위계층을 공격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공정은 분절되어 있는 노동시장에서 경쟁에 들어오는 하위계층(내지는 사회적 약자)의 기회를 배제하는 기능을 하는 담론이다.
교육, 노동 시장에서 ‘점수’로 줄 세우기 해서 계층의 순위를 명확히 하고, 이 순위에 따라 상층에게 기회가 배타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공정 담론이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연대 대나무숲의 글은 그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노오력을 기울여 점수를 확보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카테고리를 만든다. 동질성이 특성인 한국 사회에 균열을 발생 시켜 이질성을 확대하고 계층 재생산을 안정화(=고착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경제성장률, 노동시장 불평등 변화, 교육 불평등 변화, 세대 간 사회이동 변화, 담론의 변화가 모두 일관성 있게 설명된다.
어떤 결과가 기다릴까?
- 4차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구조적 이동 확대. (모두가 해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 미국(서구)모델의 이식. 즉 이질성을 확대하고 기회 평등을 약화해, 불평등과 계층 재생산 안정화.
- 노동시장 분절구조 타파, 복지향상으로 기회 평등과 결과 평등 동시 확대.
결국 2와 3의 전선이다. 어떤 연대로 3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청년층도 노조도 2에 천착한 상황에서 희망적일까?
원문: SOVI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