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누적으로 1만 5천 명 이상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자주 나오는 질문과 내가 한 답변을 실어 본다. 강연 자체는 검증된 이론과 팩트에 기반하지만, 강연 후 질의에 대한 응답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된다. 본인 또는 자녀의 영어 때문에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리해 본다.
Q. 영국 발음으로? 아님 미국 발음으로? 우리 아이 발음은 어떻게 지도해야 하나요?
A. 중요한 얘기라 좀 길지만 다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머저리 같은 영국 사내가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바에서 맥주를 주문하면서 영국 발음을 구사하니까 미국 미녀들이 다 관심을 보이다 못해 함께 즐거운 밤을 보냅니다. 미국 사람들조차도 영어의 원조인 영국 발음을 멋있어한다는 내용을 영국 사람 입장에서 코믹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미국 발음을 선호(동경?)합니다. 소위 말하는 빠다 발음. 그러나 정작 미국인들은 영국 상류층 발음(Posh accent) 앞에서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아이가 유창한 미국식 발음(일명 빠다 발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본 옆집 엄마는 “어머, 아이가 어쩜 이렇게 영어를 잘해요~”라고 칭찬을 합니다. 엄마는 괜히 우쭐해지면서 아이가 자랑스럽습니다. 글로벌 스타가 된 한국 유명 스포츠인이 외신 기자의 인터뷰를 영어로 하는 것을 보면서,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발음만 듣고 “역시 외국인 코치와 훈련을 하더니만 영어를 잘하네.”라고 말하곤 합니다.
원어민=미국인이라는 인식이 강한 보통 한국인이라면 미국식 발음을 구사하면 할수록 영어를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어민이 들어도 영어를 잘한다고 할까요?
발음만 듣고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섣부른 판단일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 상대는 발음보다는 내용에 집중해서 듣기 때문입니다. 외신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세계적 스포츠 스타는 발음만 좋을 뿐 질문에 계속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이 질문을 왜 하는지 관점 획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였습니다.
가장 좋은 발음은 영국식도, 미국식도 아니다
영어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 도구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능력이 필요합니다.
- 어법에 맞게 구사하는 언어자각력
- 논리적으로 자기의 말을 풀어가는 사고력
-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관점획득력
이다음에 필요한 게 ‘4. 이해 가능한 발음’입니다. 4번에서도 원어민 수준의 발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 드러나는 발음입니다. 이왕이면 원어민(미국식) 발음이면 좋다고 얘기하기보다,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발음이라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개의 경우 미국식 발음을 수준 높은 발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영어를 구사하는 인구 중 미국인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식 발음을 동경하는 집단은 한, 중, 일 정도랄까요. 미국인조차도 오히려 정통 영국식 발음(포시 악센트, 퀸즈 잉글리시, 옥스퍼드 잉글리시)를 격이 높은 영어로 인정할 때가 많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이제부터 영국식 발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식이든 영국식이든 남의 나라 발음을 동경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 식 발음이 아니라 내용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위에 언급한 1) 언어자각력, 2) 사고력, 3) 관점획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발음만 좋은 사람만큼 무식하게 보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즉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 즉 콘텐츠가 명확하고 그것을 위의 1)~3) 번을 갖춘 상태에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TOEIC 같은 영어 공인 시험에서도 다양한 국적(미국, 영국, 호주 등)의 영어 발음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발음이 좋은 것일까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나는 발음이 가장 좋습니다. 즉, 나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외국어로써 습득했기 때문에 너네와 같은 수준의 어휘량과 발음을 갖추지는 못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발음. 상대방이 듣고 내 국적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더더욱 좋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보았나요? 우리가 CD에서 듣던 소위 ‘원어민’ 발음을 하는 사람을 흔히 보게 되던가요? 오히려 자신의 성장 배경, 문화, 교육 수준 등등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다양한’ 발음을 더 많이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원어민, 특히 미국인 발음을 흉내 내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감추려 하는가요?
원어민은 자신과 같은 발음을 하는 외국인을 볼 때에 더 어색해합니다. 이것은 마치 나와 똑같은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대할 때의 어색함과 같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정체성이 드러나는 발음을 할 때에, 그러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할 때에 그 사람과 그의 주장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싱가포르 사람, 인도 사람, 프랑스, 체코, 이탈리아, 브라질…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다 자기만의 특징적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인 흉내 내지 않습니다.
본질을 봐야 합니다, 빠다 얘기 그만하고
I’m sorry my English is not good. 원어민과 얘기할 때 이런 식으로 자신이 영어(발음)를 잘 못 한다고 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한국인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생각 있는 원어민이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No problem, my Korean is worse.
나는 너네 말 못 하는데 네가 우리말 못하는 게 뭐가 문제야?
그렇습니다. 한국인이 영어를 잘한다고 더 대단한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모자란 것도 아닙니다. 2개 국어 이상을 하는 사람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습니다.
영어 잘하는 게 벼슬도 아니고 못 한다고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모국어를 잘 못 하는 건 문제입니다. 무엇이 모국어를 잘하는 것일까요? 해당 언어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욕을 잘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1) 번~3) 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 시키거나 동의를 구해내거나 또는 설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왕이면 한국어와 영어로 싸울 수 있는 이중언어자가 된다면 사는 게 좀 더 편해지겠지요. 우리는 늘 본질을 봐야 합니다. 빠다 타령 그만하고. 관련하여 좋은 글을 발견하여 링크를 걸어둡니다.
원문: 김성윤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