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플레이를 즐기는 성실한 선수” 그리고 “탁월한 분석이 돋보이는 해설위원”. 이영표 선수(43)는 2002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를 4강에 안착시킨 주역이다. 그는 이후 PSV 아인트호벤, 토트넘, 도르트문트,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세계 유명 리그의 그라운드를 누비며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축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레전드(전설)’로 불린다.
축구 팬들은 그의 영리한 플레이를 보며 ‘초롱이’라는 별명을 선사했고,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이후 족집게 예언이 빛나는 그에게 ‘문어 영표’라는 별명을 붙였다. 2010년 독일 월드컵에서 ‘펠레의 저주’를 떨치고 스페인이 우승할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던 독일의 ‘점쟁이 문어’에 빗댄 표현이다. 선수에서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그는 최근 방영한 MBC ‘안 싸우면 다행이야’에 안정환 해설위원과 함께 출연하면서 다시금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영표는 축구선수, 해설위원, 방송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소셜벤처 삭스업의 대표라는 생소한 직함도 갖고 있다. 축구 지도자 생활을 하거나 축구행정가의 길을 택하는 동료들과는 다른 행보다. 사연을 듣고 싶어 서울 성수동 삭스업 사무실을 찾아 이영표 대표를 만났다.
인간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어요.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이영표 대표는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젊은 시절 그는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기에 피나게 노력했다. 결국 꿈꿔왔던 태극마크를 달았고, 유럽 빅클럽에서 뛰며 온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 대표는 잠깐의 만족감을 얻었을 뿐, 행복이 지속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소유가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받아온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현역 시절 그는 주로 왼쪽 윙백(Left Wing-Back)을 책임졌다. 탄탄한 수비력으로 적의 공격을 차단하고, 공격수에게 공을 전달해 골을 돕는 역할을 도맡았다. 이 대표는 이번에도 골의 영광을 직접 차지하기보다는 킬패스로 다른 이들에게 영광을 전달하는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어떻게 도울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비영리재단을 설립하려고도 했지만 지속적인 도움을 줄 방법으로는 회사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직접 번 돈으로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셜벤처라면 가능하리라 판단해 삭스업을 창업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양말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가치가 생겨요. 내 삶도 마찬가지예요. 나의 가치를 내가 만들고 부여하면 나도 얼마든지 소중한 존재입니다.
삭스업은 양말, 신발 안창(인솔), 풋크림 등을 제작·판매한다. 사업 아이템으로 ‘발’을 고른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남을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출발했기에 사업 아이템은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발이라는 소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대표는 “발은 헌신적인 존재지만, 신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시당하곤 한다”면서 “발 입장에서는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하찮고 싼 물건이라고 여겨지는 양말에 의미를 부여해보자고 결심했다”고 아이템 선정의 이유를 설명했다.
삭스업이라는 브랜드 이름도 발에서 따왔다. ‘삭스업’(Socks up)에는 ‘양말을 끌어 올리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축구선수는 경기하다 넘어지면 일어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양말을 끌어 올린다. 프리킥이나 코너킥을 차기 전에도 양말을 쭉 잡아당긴다.
이 대표는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양말을 끌어 올리는 이 무의식적인 행위는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 행위와 같다”며 “삭스업이라는 기업명에는 쓰러져 좌절한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돕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좋은 양말 만들고 의미 있는 수익을 내서 누군가를 돕고 싶어”
삭스업은 최근 2020년 라인업을 출시했다. 러닝·골프·사이클링·축구 등 발에 땀이 많이 나는 운동을 즐기는 매니아와 프로선수들을 위해 제작된 ‘하이 퍼포먼스’ 양말이다.
내가 정말 원하던 양말입니다. 현역 선수 시절 삭스업의 양말을 신었으면 기량이 최소 15%는 올랐을 텐데요.
이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지하게 창업 철학을 얘기하던 그는 신제품 이야기가 나오자 능수능란하게 양말을 홍보하는 세일즈맨으로 변신했다.
이번 라인업의 ‘코어크루 삭스’는 일반적인 실이 아닌 바이오맥스(BioMax) 원사로 제작돼 통기성이 뛰어나다. 삭스업의 설명에 따르면, 장기간 운동으로 발이 땀에 젖었을 시 신발을 벗고 2~3분만 말려도 양말이 뽀송뽀송해질 정도로 속건 기능도 뛰어나다.
또한 이탈리아 편직기로 정교하게 제작된 심리스(Seamless) 양말로 착용감도 일반 양말보다 우수하다고 자부한다. 이 대표는 “저를 비롯한 삭스업 팀원들이 서울숲과 한강을 달리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며 “오늘도 이 양말을 신고 10km 뛰고 왔다”고 말했다.
현재 판매 중인 제품은 ‘코어크루 삭스’와 ‘로우 삭스’ 두 종으로 각각 1켤레에 3만 4,000원과 2만 6,000원이다. 일반적으로 양말은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지만, 삭스업의 제품은 좀 비싸다. 그러나 이 대표는 “보잘것없는 양말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건의 가치는 가격이 결정하곤 합니다. 삭스업은 양말에도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오랜 시간 질 좋은 양말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좋은 양말을 판매한 수익으로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많은 이에게 ‘삭스업 모먼트’를 선사하고 싶습니다”
삭스업은 양말 판매 수익금으로 ‘삭스업 모먼트 프로젝트(Socksup Moment Project)’를 진행한다. ‘삭스업 모먼트’란 삶 속에서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정신을 발휘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 프로젝트는 삭스업이 매년 진행하는 행사로, ‘셀럽(유명인)’을 인터뷰해 그들의 메시지를 새겨넣은 양말을 판매해 의미를 전달하는 작업이다.
이영표 대표는 자신 역시 타인의 배려와 믿음으로 얻은 기회 덕분에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삭스업 모먼트로 2000년 당시 처음으로 올림픽 대표팀 테스트를 받으러 갔던 시절의 일화를 꼽았다.
올림픽대표팀 첫 연습경기 전반전이 제 실책으로 골을 먹힌 채 전반이 끝났어요. 저는 좌절했어요. 이걸로 내 기회는 끝장났다고 생각했죠.
하프타임에 당시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던 허정무 감독이 자포자기하는 그에게 한 마디 던졌다. “너 안 들어가?”. 이 대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이 리셋되는 걸 느꼈다”며 “후반전에서 골도 넣고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이후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한 그는 맘껏 기량을 뽐낸다.
그는 “물론 자신이 잘해서 기회를 잡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의 배려, 믿음을 통해 기회를 얻곤 한다”며 “나는 내 삶에서 많은 사람로부터 기회, 즉 ‘삭스업 모먼트’를 받았다. 이제는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로서의 삶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8년 첫 번째 삭스업 모먼트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개그우먼 송은이 씨였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웃음에 희망을 담아 날린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그의 메시지는 ’천사 날개 양말’에 담겼다. 양말 판매는 1켤레 구입하면 또 다른 1켤레가 빈곤지역에 자동기부되는 ‘BUY1, GIVE 1 캠페인’으로 진행됐다. 7월 현재, 일부 사이즈를 제외하곤 모두 품절되는 등 성황리에 판매된다.
작년에는 프로듀서 겸 래퍼 코드쿤스트가 참여했다. 그는 ‘기회’라는 메시지를 양말에 담았다. 삭스업은 양말 판매 수익금으로 힙합 프로듀서 지망생 50명을 초청해 ‘코드쿤스트 원데이클래스’를 열었다. 코드쿤스트 양말 역시 빠르게 품절됐다.
이영표 대표는 “코드쿤스트는 미국 유명래퍼 조이 배드애스로부터 받았던 기회를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며 “이것이 삭스업 모먼트 프로젝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언급했다. 코로나19로 미뤄졌지만, 올해도 삭스업 모먼트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삭스업에게 양말 사업은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스포츠, 건강, 행복한 삶과 관련한 사업으로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이 대표는 “우리의 비즈니스는 수입을 늘리는 게 주목표는 아니”라며 “더욱 많은 이들의 동기 부여를 돕고 기회를 제공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라는 포부를 밝혔다.
이영표 대표는 매일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하루하루의 삶을 ‘점’에 비유한 그는 “열심히 살아오며 매일 찍은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은 방향이 된다”며 “내 삶의 모습이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표현했다. 비즈니스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이영표 대표와 5명의 삭스업 직원들. 그들이 찍은 점이 모여 커다란 희망이 되는 날까지 힘차게 달리기를 기원한다.
글. 진재성 이로운넷 인턴 기자
원문: 이로운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