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혈우병(Hemophilia B)의 보인자(Carrier)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죠. 혈우병은 X 염색체의 반성유전이고, 따라서 XX인 여자에게는 표현형이 잘 나타나지 않으나 보인자가 엄마인 아들에게는 1/2의 확률로… 그리하여 ‘유럽 왕가에 자손을 퍼뜨린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에게서 많은 혈우형 환자가 나왔습니다’라는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나와 있죠.
그렇다면 빅토리아 여왕은 어디서 혈우병의 보인자를 얻었을까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가계를 조사해봐야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돌연변이를 일으키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는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고, 어머니는 독일 작센코부르크고타가 왕실의 빅토리아 공주입니다.
에드워드 왕자는 왕의 네번째 아들이므로 왕위 계승권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50세까지 결혼을 안 하다가 늦장가를 갔죠. 어머니 빅토리아 공주는 재혼으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아들을 하나씩 두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빅토리아 여왕은 에드워드 왕자와 빅토리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아버지가 51세였던 1819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다음 해 죽었죠.
빅토리아 공주에게 보인자를 물려준 것으로 의심되는 에드워드 왕자.그런데 아버지 에드워드 왕자는 혈우병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보인자일까요?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언니, 오빠 둘은 둘 다 혈우병 환자가 아니었고, 그 자손 중에도 혈우병 환자의 기록은 없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보인자였으며 오빠나 언니에게는 혈우병 유전자를 운 좋게 물려주지 않았고, 빅토리아 여왕에게만 물려주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유력하게 생각되는 썰은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가 50세에 빅토리아를 임신시키는 과정에서 ‘드노보 뮤테이션’, 즉 아마도 아버지의 생식세포에 생긴(체세포에는 없는) 돌연변이가 혈우병을 유발했다는 가설입니다.
드노보 뮤테이션은 ‘나이 든 남자’일수록 많이 생긴다
실제로 최신 연구들에 따르면 남자의 경우 20세부터 시작하여 일 년에 평균적으로 1.3개 정도의 드노보 뮤테이션이 생식세포에 축적된다고 합니다. 45세가 되면 89개 정도에 달하죠. 반면에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보다 증가되는 속도가 느려서 0.4개 정도의 드노보 뮤테이션이 생긴다고 합니다.
“아니, 왜 남자가 더 많이 생겨?”라고 생각하신다면, 남녀 생식세포의 생성 차이를 생각해야 됩니다. 남자는 정원세포(Spermatogonia)가 일생 동안 분열하게 되고, 그 횟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 갑니다. 분열을 많이 할수록 DNA 복제를 많이 한다는 뜻이 되고, 복제를 하면 할수록 에러도 많이 생기죠.
반면 여자는 배아 발생 시부터 난자가 만들어집니다. 한정된 숫자의 난자는 더 이상 세포 주기 진행 없이 머물러 있게 되죠. 물론 노화에 따라서 난자의 노화도 같이 진행되니 여기서 돌연변이가 생길 수 있긴 합니다. 남자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마찬가지로 드노보 돌연변이 숫자는 생기기는 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성의 경우 더 큰 문제는 나이가 많을수록 감수분열의 실수로 염색체 배분에 실패하여 염색체 숫자가 증가하는 Aneuploidy의 위험성, 그리고 이로 인한 불임 및 다운증후군의 위험도가 증가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유럽 귀족·왕족이 고귀한 피 어쩌구 하면서 혈통을 중시했지만, 한순간 생긴 생식세포에서의 드노보 뮤테이션은 유럽 왕가에 혈우병을 만들어 부렀습니다. 이건 유전자 편집기술 어쩌구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부모의 체세포에는 없는 돌연변이니 정자 한 마리씩 DNA를 증폭해서 드노보 뮤테이션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검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수정을 할 때 쓸 정자가 업…
실제로 혈우병 같은 희귀질환이 아니더라도 많은 정신 지체,발달 장애 등은 생식세포에서 발생하는 드노보 뮤테이션에 기인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친의 연령 증가에 따라서 발생 빈도가 증가하고요. 그건 저보다도 옆동네(…)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가지고 있던 보인자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2008년에야 밝혀졌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고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왕자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니 Factor IX의 인트론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해서 splicing acceptor가 새롭게 만들어져 단백질 시퀀스가 바뀌었다고…)
PS.
그러므로 ㅍㅍㅅㅅ의 리수령도 늦장가 가서 애 낳으면 위험하니 빨리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