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가 많은 요즘입니다.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이래저래 감정적으로 좀 격해지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럴 때는 역시 기분 전환을 위해서 수천 년 전으로 잠깐 다녀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가치 판단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시공간 속으로 말이죠.
그래서 제가 소개해드리려는 유물은 이름하여 ‘게벨 엘-아라크의 단도’. 이 유물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실에 있는 만큼, 유물을 살펴보시면 파리에 다녀오시는 느낌도 날테니 1석2조라 할 수 있습니다.
게벨 엘-아라크의 단도는 관람을 시작하시는 지점에 따라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실의 거의 맨 끝 혹은 거의 맨 처음에서 만나시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발견하시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치시게 되는 경우가 많을 듯 합니다. 그러나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또 아주 오래전 유물이기도 한 만큼, 언젠가 루브르를 찾게 되신다면 좀 여유를 갖고 자세하게 살펴보시는 것을 저는 추천드립니다.
높이가 25.5센치미터 정도 되는 이 부싯돌 돌칼은 ‘선왕조 시대 나카다(IId)기’의 유물로 여겨집니다. 원래 고고학자들은 특정한 문화형식에 해당되는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 이름에다가 이런저런 숫자나 알파벳을 붙여서 시대명을 짓기도 합니다.
‘나카타IId기’는, 그러니깐 나카다라는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을 표준 유물로 삼는 ‘나카다 시대’에서도 II기, 그 가운데서도 d기에 해당되는 시기라는 뜻이지요. 이 시기는 대략 기원전 3300년경입니다.
이 돌칼은 조지 베네디트라는 프랑스인 이집트학자가 루브르 박물관을 위해서 1914년에 카이로의 한 고미술상에게 구입했습니다. 유물을 판매한 고미술상에 따르면, 돌칼은 게벨 엘-아라크라는 지역에서 입수된 것이라고 하는데, ‘게벨 엘-아라크의 단도’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게벨 엘-아라크에서는 현재까지 중요한 이집트 유적-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현대의 학자들은 이 유물이 원래는 아비도스(Abydos)의 움 엘-캅(Umm el-Qaab)에서 출토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건 초기왕조 시대의 왕묘나 선왕조 시대 지배계층의 무덤이 이 지역에 많고, 그러다 보니 화려하고 정교한 유물들도 이 동네에서는 자주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석한 일이지만, 현재 서구의 주요 박물관들에서 소장-전시되고 있는 이집트 유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돌칼처럼 출토 맥락은 물론이고 대략의 출토지 조차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 대부분은 도굴되었거나 우연히 입수된 유물들이 이집트 현지의 고미술상을 통해서 서양인 수집가들에게 넘어간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고유물의 판매 및 구입은 현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그 대부분은 19세기~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돌칼의 칼날 부분은 매우 질 좋은 황색 부싯돌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부싯돌은 보다 전문적으로는 처트(chert), 일반적으로는 규질암이나 수석(燧石)이라고도 불리는데 나일강 유역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노란색 석재로는 의례용으로 구분되는 돌칼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아마도 이 색상이 금속의 색상(예컨대 구리)과 비슷한 색상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게벨 엘-아라크의 단도에서는 사용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즉 실제로는 사용되지는 않았던 칼이라는 이야기죠. 그런 만큼 이 칼은 아마도 순전히 의례용이나 상징물로 제작된 것 같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해도 충분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습니다.
아마 석기에 관심이 많으신 선사시대 고고학 전공자들은 무진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칼날 부분을 보고 흥분들 하시겠지만(실제로 제 주변의 선사 고고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집트 고고학자인 만큼 이 손잡이 부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이 손잡이 부분도 칼날 부분 못지않게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코끼리 상아로 만들어진 손잡이의 한쪽 면에는 전쟁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슬링 같은 몸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무엇인가 도구를 사용해서 상대를 타격하고 있는 장면도 있는데,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하단부에 묘사된 ‘수전’ 장면입니다.
이건 분명히 나일강에서 벌어진 어떤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전투의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인구밀도가 높은 취락이 나일강변에 형성되었고, 그러다 보니 각 지역 간의 교류도 주로 나일강을 통해서 이뤄졌을 것이고, 반대로 충돌과 갈등 역시도 나일강을 통해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선왕조 시대 동안 ‘나일강 전투’는 그리 드문 사건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선왕조 시대 말기의 상이집트에서는 아비도스, 나카다, 히에라콘 폴리스, 이렇게 3지역이 지역 내 패권을 놓고 격렬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손잡이의 다른 면에는 많은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자가 사냥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이 장면들은 보통 ‘사냥 장면’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장면이 손잡이 상단부에 있습니다. 바로 한 남성이 두 마리의 사자를 제압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 속의 남성은 보통은 ‘백수의 제왕(Master of Animal)’이라 불리는데, 이 모티브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우루크(Uruk) 시대 후기(기원전 4000-3000년경)에 자주 사용되던 모티브인 만큼, 이 돌칼에서의 묘사는 메소포타미아의 모티브가 직수입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남성이 입고 있는 의복이나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스타일입니다.
이 면의 중앙에는 돌출부가 있는데, 이건 끈을 묶을 수 있게끔 만든 장치입니다. 게벨 엘-아라크의 단도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다른 유물들, 예컨대 미국 브루클린 박물관 소장품인 석도나, ‘피트리버스의 단도’라고 불리는 영국 박물관 소장품에도 유사하게 끈을 묶을 수 있는 장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칼날의 경부(혹은 슴베, 영어로는 tang)와 연결이 되어 있었을 손잡이의 최하단부는 아마 조금 유실된 것 같습니다. 유물을 입수한 베네디트의 기록에 따르면 손잡이 최하단부에는 칼날과 연결하는데 사용되었을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치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현재는 유실되어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