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때였나. 딱 한 번 동기 여자애랑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내가 미아리에 반지하 전세방을 얻어 독립하자 축하해 준답시고 같은 과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온 날이었다. 삼겹살에 라면에 늦게까지 소주도 진탕 마셨다. 그러다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어느 순간 그 애랑 나랑 둘만 남게 되었다. 자정을 넘겨 막차도 끊긴 시간이었다.
너, 택시 탈 거지?
이렇게 물었더니
우리 집은 머니까 여기 잠깐 있다가 새벽에 첫차로 갈게.
아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첫차라니. 지가 무슨 서울시스터즈도 아니고. 갑자기 왜 새벽안개를 헤치고 첫차를. 하다가 멈칫, 했다. 잠깐만. 지금 내 방에서 잔다는 얘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연이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나 먼저 잘게”라고.
아닌 밤중에 신데렐라는 아니지만 12시가 넘었으면 집엘 가야지. 왜 남의 집에서 자겠다는 건지. 얘가 무슨 꿍꿍이가 있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어디 살갑지 않은 친척집에 온 손님마냥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대뜸 자리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쓴 주연이가 눈만 빼꼼히 내밀더니 “너는 안 자?” 하고 물었다. 어어, 자야지. 나도 자야지.
오히려 내가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까 싶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옆에 누웠다. 동기 여자애랑 한 방에 누워서 잠을 자는 것쯤이야 뭐 별일도 아니지, 라는 몸짓으로. 하지만 잠이 올 턱이 있나.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첫차라면 뭘 타고 간단 거지, 버스일까, 지하철일까. 그러다가, 새벽에 일어나면 라면이라도 끓여줘야 하나 어쩌나, 또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당시의 나는 한번 잠들면 곯아떨어졌는데 그날은 형광등을 켜놓고 누워서인지 잠귀가 예민해졌던 모양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얘가 화장실에라도 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실눈을 뜨고 보니 가방을 뒤지고 있길래 마음이 바뀌어서 집에 갈 차비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고 지갑 속에 지폐를 꺼내더니 그걸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왜 그걸 정리한단 말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일어나서 물어보려니 봉창도 이런 봉창이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쯤이려나. 벽시계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아 그만, 주연이랑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깼어? 미안.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지금 막 잠에서 깬 연기를 하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너 뭐하냐.” 결국 묻고 말았다. 그러자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된다고 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주연이가 말한 ‘이렇게 하면’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매일 밤 자기 전에 지갑 속에 든 지폐를 전부 뺀다.
- 천원은 천원끼리 만원은 만원끼리 같은 권종으로 분류.
- 분류한 돈을 오름차순으로 배열한다.
- 이때 중요한 것은 지폐 속 인물이 같은 방향으로 포개져야 함.
이걸 매일매일 해왔는데 깜빡 하고 자다가 꿈속에서 엄마가 채근하는 바람에 깼단다. 꿈속에서 엄마가?
그때 불현듯, 주연이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언니랑 둘이 살았다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며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늘 바쁘고. 오늘도 택시비를 아끼느라 우리 집에서 잤던 거고. 나는, 비로소 납득했다.
지금쯤 주연이는 바라던 대로 부자가 되어 있으려나. 아쉽게도 이제 알 길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부자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한다. 부자가 돼서 돈으로 행복도 사고 책도 사고 어느 순간 북스피어 책도 사서 읽다가 판권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한 번쯤 연락해 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연락이 되면 친구야, 나랑 책 한 권 쓰자. 부자가 되는 법에 관한 책. 제목은 『더 리무빙(The Removing)-새벽안개 헤치고 부의 첫차에 올라타는 법』 정도면 어떨까. 틀림없이 『더 해빙(The Having)』을 능가하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판권에 자세히 보면 출판사 연락처도 있으니까 친구야, 연락 한번 주렴.
이상, 오늘따라 지갑에 지폐가 왜 이리 많은지 따져보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려 버린 마포 김 사장 드림.
원문: 북스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