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말은 ‘기본’이라지만 실제로는 복잡하다. labor/work/action을 구분한 한나 아렌트의 생각과 소스타인 베블런의 다중본능론, 여기에 제도경제학의 연구 방법으로 기본소득에 접근해보았다. 21세기 기본소득논의를 19세기 경제학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소득 없인 생활이 안 된다. 시장경제에서 소득은 대체로 노동의 대가로 들어온다. 제법 근사하게 살자면 소득이 높아야 하지만, 그리 근사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사람답게 살고자만 해도 얼마간 돈이 필요하다. 이런 돈을 보통 최저생계비로 표현하는데, 이런 돈은 빈곤층이나 저임금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지급된다. 반면 기본소득이란 저임금노동자와 빈곤층은 물론 중산층, 부유층 가릴 것 없이 모든 국민에게 지급된다. 또, 받고 나서 일하든 말든 무조건 지급된다. 곧 ‘보편성’과 ‘무조건성’이 기본소득의 핵심 내용이다.
척 들어보면 재원 조달 문제와 무임승차 문제가 예상되는데도 왜 이런 논의가 촉발됐을까? 기술 발전으로 현장에서 노동력이 점점 필요 없게 됐다. 기술적 실업이 급증하는 것이다. 더욱이 비정규직은 물론 특수고용직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가 자꾸 증가해 이 계층이 노동자 중 거의 절반에 이르게 됐다. 이들의 고용은 불안해 소득이 일정치 않고 매우 낮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 불평등 심화! 이게 바로 21세기 성장의 실제 모습이다.
이런 장기적 추세에 코로나19가 기름을 부었다. 이 와중에서 기본소득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핀란드와 네덜란드에서 각각 2,000명과 200명을, 캐나다에서는 특정 주를 대상으로 각 나라 평균임금의 16.4%, 24.8%, 24.6%에 해당하는 기본소득을 지급해 보았다. 그 필요성에도 극소수 나라에서 소규모 집단에 소액을 지급하는 실험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정은 어떤가? OECD 국가들의 사회보장제도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하지만, 한국도 기본소득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제도가 몇몇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일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과 노년층에 치중된 것이 문제다. 예컨대 고용보험은 실직자를 위한 보험이기에 취업조차 못 해 본 청년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보험가입조차 못 해봤으니 당연히 고용보험혜택을 못 받는다.
조기퇴직자가 늘면서 장기간 실업 상태에 빠진 중장년은 고용보험은 물론 노년층에 지급되는 국민연금에서도 배제된다. 청년층과 중장년층의 사회안전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보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청년층·중장년층의 사회안전망이 전무한 우리 현실 탓에 기본소득제도 도입 필요성은 역설적으로 선진국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여러모로 필요하지만, 재원조달문제는 기본소득제에 가로놓인 첫 번째 장벽이다. 1인당 매월 50만 원씩만 줘도 310조 이상이 든다. 올해 국가 예산이 대략 512조 원이니 한해 살림살이의 60%에 이르는 만만찮은 장벽임엔 틀림없다. 모두에게 주는 보편성 원칙이 문제라는 말이다.
무조건성은 두 번째 장벽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한테도 주면 나태하고 무료해져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타락하기 쉽다. 보수경제학이 강조한 이 본성은 숨길 수 없는 인간의 한 모습이다. 하지만 기술 변화로 인해 취업해 직장에서 임금을 받을 기회가 없어지는 데도 기본소득을 받았으니 계속 취직하라고 채근하면 그것도 모순이다.
겨울이 돼서 감은 다 떨어져 없는데도 계속 감 따 오라는 것과 같다. 낙과 말고 담아올 게 없고, 그런 감은 가져와 본들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지금 자영업자 상황이 그렇고 청년 노동시장이 그런 형국이다.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 활동에 속한 유급노동만 유용하고 가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자. 예컨대 배우는 활동, 탐구하는 활동, 예술 창작, 문화, 스포츠, 정치 참여 활동, 봉사, 돌봄, 가사, 텃밭가꾸기를 보자. 이건 ‘노동’(labor)과 다른 ‘일’(work)이다. 이런 것은 시장 밖에 존재하면서도 개인 덕성을 함양하고, 사회적으로도 유익하다. 사실 이야말로 인간이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 활동이다. 인간은 도덕본능과 제작본능을 갖춘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수경제학이 전제하듯 인간은 부도덕하고 나태하지만은 않다. 인공지능기술로 노동이 점점 필요 없어지는 시대에 이런 활동을 하는 조건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비용도 줄이면서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도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다면적 이해와 ‘비시장적 일’에 대한 주목! 보편성과 무조건성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기본소득제를 채택할 수 있는 방안이다.
원문: 한성안의 좋은경제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