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서울의 한 투표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악수를 거부한 “사건”이 인터넷에서 한참 소란스러운 중이다. 이것에 관련된 기사를 읽으면서 두 가지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사건 하나. 악수를 거부당한 오바마의 진실
2012년경 미국의 인터넷 사용자를 중심으로 한 유투브 영상이 급속도로 퍼졌다.
오바마와의 악수를 생가는 러시아 관료?!
이 영상은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의 관료들에게 악수를 청했는데 그 관료들이 철저히 외면하여 무시를 받았다고 알려지면서 퍼지게 되었다.
이 영상이 특히 회자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로 특히 티파티와 공화당 일부 지지자 중에서 지독하게 오바마를 혐오하고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그를 깎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그들이 신봉하는 “미국이 세계 최고”라는 자신감이 오바마의 무능함과 유약함으로 인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불안감 조장”에 의한 것이었다.
둘째로는 냉전 이후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서 누려왔던 미국의 지위가 최근 중국과 러시아 등 다양한 강대국이 다시 재등장하면서 이와 동시에 이들에 대한 반감에 기반한 것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간에, 오바마가 러시아 관료들에게 악수를 청했다가 거절받는 것은 그의 정치적, 외교적 무능함과 동시에 유일한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믿음이 도전받으며 동시에 새롭게 등장하는 러시아에 대한 깊은 우려와 반감이 함께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거절받은 악수란 그의 정치적 능력이었고, 그와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었다.
얼마 뒤 이 영상과 관련되어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영상이 오바마를 폄훼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이라는 주장이었다. 편집된 영상이 아니라 TV에서 보도된 것을 원래 그대로 보면 이러한 주장이 허무맹랑한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에서는 아예 원래의 맥락을 삭제해버린 채, 새로운 맥락을 “창조”했다고 한다.
원래의 영상은 2009년 오바마의 러시아 방문시, 양국 대통령은 서로의 관료들을 소개하고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에서 “러시아 관료들”이라고 지칭되며 정작 얼굴은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미국의 관료들이었고, 오바마가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손등을 아래로 하여) 손으로 하나하나 미국의 각료들을 러시아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이에 러시아 대통령이 그 각료들과 악수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이었다.
사건 둘.
2003년 10월 13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 예산안 처리와 관련된 협조 요청 및 연설을 하기 위하여 국회에 방문한다. 대통령이 본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현재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상당수 기립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또,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 후 퇴장하는 자리에서 당시 한나라당 소속 윤두환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악수를 무시하고 옆에 있는 다른 동료 의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다소 논란이 있긴 했지만, 이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의 악수를 거절한 사건 만큼 크게 회자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2014년의 대통령 악수 거절 사건과 2003년의 악수 거절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악수 거절이라는 같은 맥락으로 놓일 수는 없다. 우선 그 자리는 단순히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라 국회라는 공간이었고, 개인 윤두환과 대통령 노무현이 만난 자리가 아니라 국회의원 윤두환과 대통령 노무현이 만난 자리였다. 쿠데타와 같이 헌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자리에 올라간 대통령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적 절차에 거쳐서 선출된 사람이었다.
대통령과 정치적인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그가 입장할 때 기립하지 않고 그냥 널부러져 앉아 있거나 악수를 거절하는 방식 보다는 “국회의원다운” 방식으로 정책에 대한 합리적 비판과 정치적 수단에 의거해야 했었다.
국회의원이라는 공적 지위를 가진 것에 대한 망각 혹은 사유화, 그리고 상대에 대한 혐오는 이처럼 저열한 방식의 “저항”을 만들었고, 아마 이것은 그토록 어처구니 없게 한 나라의 대통령을 자기 마음대로 탄핵을 해버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어처구니 상실”의 행보로 이어지게 된 근거였을 것이다.
최소한의 움직임조차 박탈 당하는 약자들의 저항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개인”일 때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는 것이다.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국가 권력 시스템에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와 수단이 별달리 없고 단지 선거 때만 존중 받는 것 같은 “단 한 표”를 갖고 있는 개인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기반한 조금 다른 “저항”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이처럼 악수를 거절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이번 선거 기간 동안 춘천의 지하상가 화장실에 갑작스럽게 등장했던 그리고 이보다도 훨씬 더 빈번히 매일 같이 인터넷 공간에서의 희화와 조롱, 그리고 풍자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이런 저항의 형태를 가르켜 인류학자 제임스 스캇의 관점으로 보자면 “약자의 무기”였을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농장주들에 대한 농민들이 부당한 상황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태업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또 급격하게 축소되는 이 상황에서 풍자와 조롱 그리고 악수 거부는 한국 사회의 권력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이 취하는 약자의 무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대한민국의 정치 권력들은 이러한 약자의 무기까지 독점하고 박탈해버리려는 시도를 한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희화화 하면 구속을 시켜버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독점한 약자의 무기로 자신들의 권력을 재생산하는데 사용해버린다. 2004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벌인, 폭언과 욕설로 점칠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풍자극”은 이러한 권력에 의해 독점된 약자의 무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익숙하게도 이렇게 약자의 무기가 권력에 의해 박탈되고 독점된 사회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먼 나라를 가지 않더라도 바로 위의 북한이 그러하고, 그 상황 속에서 “약자”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란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너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본다면 세월호 사건 이후 인터넷에서 엄청나게 공유된 한 패션잡지의 칼럼 “문득,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가 왜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러 이유들 중 한 단면을 짐작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적 맥락 없이 혐오로 소비되는 악수 거부
다시 악수 거부로 돌아가자면 결국 악수 거부는 개인의 위생 개념이나 개인적 취향을 벗어나 정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반오바마 진영이 미국의 각료들을 소개하는 오바마의 손을 “러시아에 거부당한 훼손된 미국의 자존심”으로 읽혀버렸던 것처럼, 여러가지 맥락들과 제거된 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신념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혐오를 재확인 시켜버리고 편견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악수 거부는 이처럼, 한쪽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싸가지 없는 진보 새끼들”이라는 편견을 재강화시키는 사건으로 “소비되어 버린다.” 물론 이전에 아마도 자신들이 지지했던 세력이었던 곳에 있었던 공적인 장소의 공적인 정치 업무를 수행해야할 사람이 자행했었던, 그러기에 오히려 더욱 문제가 되었어야했었을 악수 거부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말이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장난스레 몇 가지 연상들이 떠올랐다. 악수를 받는 대신에 손이 거의 으스러질 정도로 쎄게 악수를 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악수를 하면서, 소수의 한국 남성이 상습적으로 하듯이 상대방 손바닥을 검지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이 둘에 비하면 단순히 그냥 악수를 거부한 것은 폭력적이지도 성추행적이지도 않고 가장 정중하게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함께 이 뉴스를 보고 있던 친구는 보도 사진을 보면서 아주 깜짝 놀라 한마디 던진다. “아니 딱 그냥 봐도 자기랑 악수 안하게 생겼는데 왜 굳이 가서 악수를 하려고 했대?” 사진속의 김한울씨의 앉아 있는 포즈와 표정 등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몸으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당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였다. 왜 굳이 악수를 하려고 갔을까? 당연히 벌떡 일어나 영광스럽게 악수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읽는 눈과 촉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건가…
이 자유연상은 결국 “이렇게 사람보는 눈이 떨어지고 자신이 하려는 게 당연히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초반부터 여러 차례의 인사 실패를 거듭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이곳은 과연 민주 사회인가?
“싸가지 없는 진보 새끼들”과 “자신의 신념에 기반하여 저항한 소영웅”이라는 극단적 평가들 사이에서 이 사건의 진실은 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대한민국이 북한과 다를 수 있는 것은 권력자에 대해서 힘없는 일개의 소시민이라 할 지라도 개인이 저항을 할 수 있다는 것 – 최소한 자신의 몸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과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런 사건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라면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에서 정치에서 거부된 악수가 무엇을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지, 그 약자의 무기가 무엇을 표현하는지를듣지 않은 채 약자의 무기를 제거하고 박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고립된 권력과 피폐한 삶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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