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득엔 ‘불로소득’과 ‘노동소득’이 있다. 불로소득은 노동하지 않고서도 얻은 소득이다. 도대체 뭘했기에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나? 강탈하면 그런 돈을 번다. 대기업이 하도급거래시 중소기업을 힘으로 눌러 불공정 거래를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배신해도 불로소득을 벌 수 있다. 계약금 떼먹거나 임금을 체불하거나 안 주면 된다.
이런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불로소득 획득이 가능하다. 간교한 계략, 곧 간계와 기만을 통한 돈벌이인데, 주식 투기, 부동산 투기, 펀드 투기 등 각종 투기가 그 유형에 속한다. 혹자는 이런 간계와 기만을 애써 ‘투자’로 승화하고 싶어 하지만 이건 명백히 타인의 노동 결과를 속임수로 분배해가는 ‘노름’행위다. 이런 불법적 불로소득은 법으로 엄단해야 하고 투기적 불로소득에 대해선 엄청난 세율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노동소득은 어떨까? 노동소득은 개인이 힘써 노력함으로써 얻어진 대가다. 그가 기울인 노력엔 육체적 노동뿐 아니라 축적된 숙련과 노하우의 노력, 그리고 창의적 지식을 낳은 고뇌가 포함된다. 이런 개인적 노력 없인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이런 노력을 경제적 혹은 비경제적으로 보상한다. 물론 기울인 노력의 양과 질을 고려해 차등적으로 보상한다.
하지만 그가 기울인 헌신이 아무리 갸륵하고, 지식으로 일군 그의 창조적 결과가 탁월하더라도 그가 사는 공동체를 벗어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사회가 오랜 세월 축적해 놓은 ‘사회적 지식’과 ‘사회적 제도’에 접속하지 않으면 그의 노력은 어떤 결과도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낳은 개인적 결과 중 대부분은 사회구성원이 일군 집단적 노력 덕분이다. 그 때문에 노동소득에 대해서도 소득세가 부과되고, 그 소득세에 누진세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소득에 대한 세율은 어느 정도여야 정의로울까? 극단적 좌파들은 세율을 100%로 높여 모든 개인의 결과를 사회에 환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회주의경제에서 적용되었지만 그런 사회는 실패하고 말았다. 왜 실패했을까? 개인이 기울인 노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깡그리 사회의 덕이다! 개인의 노력은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개인의 노력 없인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상당 부분이 사회에 빚을 지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결과의 적지 않은 부분이 개인적 노력 덕분인 것도 사실이다. 논리적 완결성이 낳는 미학에 매료되는 극단주의자들은 항상 현실을 외면하지만 모든 것은 사회와 개인이 ‘복잡하고 불확정적 논리 과정’을 거쳐 상호작용한 결과다.
이제 불법적 불로소득을 처벌하고, 투기적 불로소득에 중과세한 후 남은 노동소득 중 사회적 성분을 소득세로 납부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개인이 기울인 고역과 고뇌의 부분이 내 손에 쥐어진다. 이른바 “가처분소득”(disposable income)이다. 가처분소득은 내가 힘써 일하고 밤새워 연구한 결과며, 바로 맘껏 누리면서 간직할 수 있는 소득이다. ‘사적 소유’의 영역이란 말이다. 물론 우리의 현재 가처분소득이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의 과정이 정의롭다는 가정 아래 내린 결론일 뿐이다.
사적 소유를 언급하는 날 보고 사회주의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거나 실망한 나머지 또 친구 관계를 끊을 것이다. 상관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극단적 자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하고 자본주의 일반은 정부와 시민사회에 의해 적극적으로 관리되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공산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다.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전제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변화된 기술적 조건 아래서 진보진영은 새로운 대안적 체제를 기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 페친 중 19세기의 상상력에 매료되어 있는 분들이 정말 많다. 새로운 세대들은 아무도 거기에 감동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내 페친 중 20–30대 페친을 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그 축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해 20–30대 페친이 거의 없다.
옆길로 빠져 버렸지만 지금까지 이런저런 역사적 현실과 개인적 체험, 그리고 선각자들의 연구 결과를 참조해 보던 중 꼭 하고 싶은 얘기였다. 이제 사적 소유를 부각한 본론으로 돌아가자. 아무튼 가처분 소득으로 통장에 입금된 돈은 내 노력의 결과며 내 것이다.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그 귀한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 요긴한 곳에 써야 할 내 돈이다. 사실 나를 위해 쓸 데도 많다.
기부! 이 요긴하게 써야 할 귀한 내 돈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에게 주는 행위다. 우리는 헌신과 봉사, 이타적 행위에 감동한다. 그리고 찬사를 보내며 장려한다. 기부도 헌신과 희생이며 이타적 행위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기부는 희한하게도 힐난과 유희의 대상이다.
보수파 앞에서 기부를 입 밖에 내면 죽일 듯이 덤벼든다. “왜 그런 말을 내 앞에서 꼭 해야 하느냐? 네 좋아서 하는 일이니 혼자 조용히 해라.” “기부 때문에 가정불화로 난리” 기부를 검색하면 조선일보에서 인기 있는 기사들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가장 인색한 보수우파가 가장 즐겨 쓰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는 분명히 지극히 이타주의적 의미로 쓴 말인데도 말이다.
제 것 남 주기를 싫어하며, 남의 것 편취하길 좋아하는 보수우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이미 예상한 바지만, 이른바 진보좌파마저 기부를 조롱할 땐 기가 막힌다. 진보가 기부를 조롱하는 이유엔 몇 가지가 있다. 너무 추상적이면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이번 정부 재난지원금을 염두에 두면서 검토해 보자.
첫째, 사회주의 담론이다. 뭔 말인고? 기부하면 국가가 할 일을 개인이 떠맡게 되어 분배가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국가의 사회보장정책이 지연된다는 추측은 입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부문화가 확산되면, 그 문화의 ‘계몽적 역할’ 때문에 사회보장정책의 동력이 형성된다. Culture matters!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은 절대 피지 않는다.
둘째, 막 써줘야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케인지언 담론이다. 분배에 관한 한 포스트케인지언이 내 경제학의 기초가 되니 그것도 맞다. 소비해 주지 않으니 영세상공업자들이 문을 닫을 지경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재난지원금을 받아 막 써야 한다. 특히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던 실업자와 특수고용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써야 당연하다. 이들에겐 소비는 경제 활성화 이전에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기는 일도 있다. 있는 자들도 ‘막써 운동’에 합류한다고 자랑질이다. 경제 활성화에 그토록 무거운 책무를 느꼈다면 제 돈으로 썼어야 했다.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통장에 다량 저축되어 있는 정기예금과 비자금으로 말이다. “막 써버린 돈”은 “간신히 맞춰 쓸 수밖에 없는” 하위 70%에게 기부했어야 했다. 우리의 힘든 이웃들이 비록 막 쓰지는 못해도 적어도 ‘인간답게 살 정도로’ 쓰도록 말이다.
깨어 있는 시민은 소비하며 막 쓰는 소비자가 아니다. 사익을 포기하고 공익(public interest)을 고양하는 시민이며, 개인을 희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해 헌신하는 시민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길 바라는 민주시민이다. 소비지상주의적 케인지언 소비자는 기부를 혐오할지 모르나 공익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민주시민이라면 기부를 조롱하며 희화화할 리가 없다.
셋째, 균형재정 담론도 기부를 조롱하는 이유 중 하나다. 기부자들은 적자재정을 혐오하는 우파경제학자들의 졸개라는 말이다. 여보세요, 누가 균형재정 하쟀나? 기부한 돈으로 균형재정 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더 긴급한 민초들에게 추가로 지급하자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적자재정이 더 적극적으로 편성되어야 한다. 균형재정에 항복? 그거 다 핑계다.
3.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 이 정도로 그쳐야겠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기부를 그토록 조롱하고 희화화했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바란다. 기부하면 복지문화가 확산되고, 나보다 훨씬 힘든 가장은 식구들에게 외식 한번 더해 가오 잡을 수 있다. 이건 보수경제학자의 균형재정담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물론 받는 사람의 입장에선 수치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도 아닌 장삼이사들이 제 것을 타인에게 조건 없이 건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도 인간다움 중 하나리라. 제 돈 안 아까운 놈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몇몇 분들이 기부소식을 공지하다 요즘 그런 글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기부문화가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희화화되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동선에 헌신하며 깨어 있는 민주시민은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대신 신고전주의 호모에코노미쿠스와 케인지언 소비지상주의자만 우글거리는 세상은 끔찍하지 않나? 우리가 과연 그런 인간이며, 우리가 그런 사회를 위해 싸워왔는가?
며칠 전 기부를 결정했다는 한 페친의 포스트를 읽었다. 자주 교류해 그 분의 소득수준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지원금 받아 막 써야 할 분이다. 아, 기부하면 안 되는데! 정작 막 써야 할 사람은 기부하고, 제돈으로 써야 할 사람이 재난지원금으로 막 써는 세상을 과연 진보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도 기부했습니다. 여러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내 월급이 상위 30% 안에 드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마음 변할까 봐 눈 찔끔 감고 질렀습니다. 그리고 욕 먹을 각오하고 알립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게 하라! 그래야 사회는 진보한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