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미술품 경매 가격 가운데 최고가는 얼마일까. 물론 예술작품에 화폐가치를 들이미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일인지는 알아. 그래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핑계로 그 액수를 들춰 보면 2007년 미술품 경매에 등장한 47억 5천만원이라는 금액일 거야. 이 어마무시한 금액의 주인공은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였어. 그런데 이 작품은 위작이라는 설이 제기돼 주변 사람들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만들지. 경매 회사가 위작설을 제기한 잡지사를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그런데 박수근 화백이 기록한 ‘국내 최고’는 그게 최초가 아니었어. 2006년 말 그의 작품 <노상>이 10억원을 돌파해 ‘국내 최고’를 기록했고 이건 불과 석 달만에 작품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을 가뿐히 넘어 또 한 번 국내 최고의 타이틀을 휘감았다. 그 뒤 또 47억 5천만원이 등장했으니 이 추세라면 그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등장한다면 100억원이 어른거릴지도 몰라.
그 가족들은 떼돈을 벌었겠다고? 글쎄 그렇지는 못한 게 워낙 어려웠던 시절 그 그림들을 싼값에 팔아 치워야 했기 때문에 엄한 사람만 돈벼락을 맞았다지.
가세가 기운 천재 작가
박수근은 “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서민 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고 평가되는 사람이야. 단순한 선묘를 이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거친 화강암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다는 평을 듣지. 대체 무슨 그림인데? 검색해 보면 알 거고 그 그림의 예술적 가치와 화풍, 그림의 깊은 뜻 같은 건 나한테 묻지 마라.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예술가로서의 재능이나 국내 최고의 경매 금액 등등도 그렇지만 박수근은 또 다른 이야기를전해 준다. 바로 그의 아내 김복순과의 러브 스토리지.
그는 강원도 양구에서 위로 누나가 셋 있는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어. 그야말로 귀남이 그 자체였지만 귀한 팔자는 오래 가지 못해.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어머니도 일찍 돌아갔거든. 나이 열 두 살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번갯불에 맞은 듯 감동하고 나도 화가가 되리라 결심한 그이고 일본인 교장이 감탄할만큼의 재능을 발휘하고 상도 여러 번 탔지만 기울어버린 가세는 그에게 큰 짐이 됐지.
천생연분 김복순과의 만남과 역대급 연애편지
아버지는 계모와 함께 춘천에 시계 수리점을 차린다. 역시 춘천에 있던 박수근이 아버지 집에 다니러 왔던 어느 날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번갯불에 맞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고 말아. 이웃집의 나이 열 일곱 살 처자를 봤기 때문이었지. 그녀는 행세깨나 하는 집의 장녀였고 역시 어머니를 일찍 여읜 처지였어. 박수근의 계모도 이 처자를 좋게 봐서 은근히 밀어 줬는데 유심히 이 처자 김복순을 지켜보던 박수근 역시 자신의 평생 배필로 김복순을 점찍게 돼.
사람을 아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다고 하지. 고스톱을 쳐 보면 안다고도 하고 술을 먹어 보라고도 하고. 나는 어려운 방법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연애 편지를 보면 사람을 대번에 알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본의아니게 훔쳐보거나 합법적으로 봤던 연애편지들은 쓴 사람의 성격과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박수근이 쓴 연애 편지 한 번 볼까?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어떠냐? 다른 건 몰라도 참 솔직하고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니? 천생연분이 있다는 건 말이야 글쎄 이 부잣집의 장녀 역시 불과 열 두 살에 “이담에 커서 제가 시집을 갈 때에는 우리처럼 부잣집으로 시집보내지 마시고, 하루 세끼 조죽을 끓여 먹어도 좋으니 예수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집으로 시집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다지 뭐야.
가난뱅이집 ‘환쟁이’가 딸을 넘본다는 걸 안 김복순의 아버지는 당장 다른 집에 시집보내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박수근에게 딸을 내주고 말지. 무척이나 방탕했다는 장인도 딸을 보내면서는 펑펑 울었대나.
그 울음은 딸이 겪게 될 고생을 예감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박수근 부부는 전쟁과 가난 와중에 아들 둘을 잃었고 박수근이 예술적 자존심을 꺾고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연명했고 후일 수십억 가치가 될 그림들을 몇 끼니의 쌀값으로 내 주기도 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치 않았던 건 저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연애 편지를 쓴 박수근이라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었지. 아내 김복순은 박수근에게 그저 알파이자 오메가였고 최고의 여신이자 최상의 모델이었고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었지.
닭살이라 믿지 않을 법한 부부의 일화들
떨어져 살 때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써서 부치는 통에 우체부로부터 “편지를 이렇게 매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디 있소?” 하는 불평을 들었던 이 부부의 사랑은 사실 비슷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 태평양 전쟁 말기에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아내가 젖먹이 아들을 들처업고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 하던 시절, 갑자기 박수근이 양산을 들고 나타난다. 당신 꺼라며.
끼니도 잇기 힘든 판에 웬 양산이냐 이게 어찌 된 거냐고 캐묻는 아내 앞에서 박수근의 맥없는 대답. “당신이 뙤약볕에서 너무 힘들게 오가는 게 가슴 아파서…. 어느 상점에서…. 훔쳐 온 거요.”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남편이 돌아간 뒤에도 아내가 “그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고 술회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 않냐.
아들의 회고를 들으면 그 부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얼마나 서로를 즐겁게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는 노래를 못하신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진다. 어머니는 이런 표정을 재미있어 한다. 성화에 못이겨 하모니카로 노래를 대신한다. 뻐꾹 왈츠서부터 신나게 서너곡 불어 젖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음악 소녀가 된다. 정말 아버지의 뻐꾹 왈츠는 신나는 곡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은 엄마 닮으면 어여쁜 앵무새가 되고 아버지를 닮으면 총대 없는 뻐꾸기 병정이 되곤 한다.”
노래를 못한다며 타박을 하면 씰룩거리면서 인상 구기는 남편. 그걸 보며 깔깔대는 아내. 우쒸 하면서 하모니카를 꺼내서는 신나게 불어대면 또 거기에 맞춰 종달새처럼 노래하는 아내.
박수근의 유언은 이것이었다지.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그래 보통 사람들은 죽음에 임하면 반대로 말하지. 천국이 먼 줄 알았는데 가깝다고….. 박수근이 그렇게 얘기한 것은 아내와의 한평생이 비록 힘들고 맵고 버거운 시대에 걸쳐 있었다 해도 그럴 수 없이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게 천국이었던 게 아닐까. 1965년 5월 6일 박수근은 그렇게 지상의 천국을 떠나 천상의 천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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