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걱정을 잘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다. 잘 살고 싶으면 제대로 된 걱정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걱정거리가 생겼다’고 말하며 걱정을 수동적으로 대한다. 마치 걱정거리가 하늘에서 우리를 덮친 듯이 표현한다. 내 눈앞에 놓인 걱정에 대한 고찰 없이 그저 온몸으로 걱정을 대하려고만 한다. 걱정거리라는 것이 눈앞에 갑작스럽게 닥치면 본능적으로 어떻게 이 걱정을 해결할까 고민부터 한다.
먼저 해야 할 것은 걱정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이게 진짜 나에게 필요한 걱정인지, 이게 유의미한 걱정인지, 걱정할 가치가 있는 걱정인지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2.
가끔씩 학교 후배를 만나면 학벌이 걱정이라고 한다. 별 볼 일 없는 학교를 나와서 사회에 나가면 불리할 거 같다고 걱정을 토로한다. 그 후배를 보며 나는 “걱정할 걸 걱정해라” 고 꼰대처럼 쏘아붙였다.
내가 봤을 때, 그 후배는 잘못된 걱정을 선택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전혀 도움 되지 않는 걱정이다. 고3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학교를 위조할 수도 없으니, 사실 그런 걱정을 걱정거리로 선택하면 안 된다.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학벌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실력으로 서울대생과 붙었을 때, 내가 서울대생을 이길 수 있을까? 서울대생을 이기기 위해 실력을 늘리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이것을 고민하는 게 좋은 걱정거리다.
걱정의 퀄리티를 높여야 한다. 걱정은 부정적인 게 아니다. 나쁜 걱정이 부정적일 뿐이며, 좋은 걱정은 생산적이다. 좋은 걱정 프레임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고 나쁜 걱정 프레임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며 자신을 갉아먹는다. 나쁜 걱정거리에는 신경을 꺼야 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버리듯이 걱정도 흘러 보내면 된다.
3.
걱정에 수동적으로 당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생산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타자는 자기가 치기 좋은 공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다. 야구 해설자들은 이걸 선구안이 좋다고 한다.
타자가 투수의 공을 치지 않고 거른다고 해서 수동적인 게 아니다. 그건 능동적인 모습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공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건 자기에게 맞는 좋은 공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과 같다. 투수가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개발하듯이, 타자는 자기가 치기 좋은 공을 선택하는 것이 곧 생산이다.
우리도 나쁜 걱정은 걸러내고 좋은 걱정거리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사실 이건 타자가 많은 타석에 들어서야 선구안이 좋아지듯이, 수많은 걱정을 지나야지만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나쁜 걱정에 배트를 휘두르지 말자. 좋은 걱정을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하고 피곤한 인생이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삶을 갉아먹는다면, 그건 100% 자신의 손해다.
원문: 고로케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