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가장 골을 많이 넣은 선수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위에 있는 사진으로 보신 것처럼) 차범근(67)입니다. 차범근은 1972년부터 1986년까지 15년 동안 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A매치 136경기에 출전해 58골을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축구 발상지‘ 중국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선수는 누구일까요? 당장 이름은 알지 못해도 이 선수가 중국 축구 팬들 사이에서 얼마나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을지는 짐작할 수 있으실 겁니다. 일단 정답은 하오하이둥(郝海東·50)입니다.
하오하이둥은 A매치에 총 115번 나서 41골을 넣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오하이둥이 중국 축구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한국 축구에서 차범근보다 대단한지도 모릅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하오하이둥의 전성기 때 전 세계 최고 스포츠 스타는 마이클 조던(57)이었다. 그리고 하오하이둥은 10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의 조던이었다”고 평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틀 동안 중국 인터넷에서 하오하이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작은 팔로워가 700만 명이 넘었던 그의 웨이보(微博)가 폐쇄된 것. 웨이보는 흔히 중국판 트위터라고 설명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입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에서 ‘郝海东’을 찾아봐도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갑자기 왜 이 축구 영웅을 지우려고 하는 걸까요? 그가 중국 공산당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하오하이둥은 4일 ‘신(新) 중국 연맹 선언’이라는 23분짜리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이 영상을 통해 하오하이둥은 “중국 공산당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법치를 위반하는 테러 조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삼권분립 체제와 1인 1표에 근거한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홍콩과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씨장(西藏) 티베트 자치구, 대만 등의 자치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모두 중국 정부가 아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날은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31주년 기념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오하이둥은 중국이 텐안먼 시위 진압 과정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혔습니다.
또 중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스포츠 선수 가운데는 외국인이 느끼기에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중화사상에 찌든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축구 영웅은 어쩌다 이렇게 반정부 인사가 된 걸까요?
군(軍) 팀인 바이(八一) 축구단에서 뛰던 하오하이둥은 1996년 다롄(大連) 완다(萬達)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새 팀에 합류하자마자 갑급 A리그(현 슈퍼리그) 3연패(1996~1998)를 일궈냈습니다. 1999년 팀 주인이 스더(實德) 그룹으로 바뀐 뒤에도 또 한 번 3연패(2000~2002년)에 성공했습니다.
이 시절 다롄 스더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바로 보시라이(薄熙來·71) 당시 다롄시 시장이었습니다. 시민구단이던 다롄 FC에 완다 그룹이 투자하게 만든 것도, 왕젠린(王健林·66) 완다 그룹 회장과 사이가 틀어지자 스더 그룹에 인수를 권유한 것도 모두 보 전 시장이었습니다.
보 전 시장은 이후 다롄시가 속한 랴오닝(遼寧)성 성장, 상무부 부장(장관), 충칭(重慶)시 당 서기를 거치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차기 대권주자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2년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62) 씨가 살인을 저지르면서 급속하게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2011년 11월 충칭의 한 호텔에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이듬해 2월 왕리쥔(王立軍) 당시 충칭시 공안국장이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소재 미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기도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두 사건은 모두 구카이라이와 연관이 있었다. 수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구카이라이는 사업 문제로 갈등하던 끝에 헤이우드를 독살했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이 구카이라이의 살인 행각을 보고하자 왕리쥔을 공안국장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의 측근들을 암암리에 수사했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주하자 그의 신병을 확보하려고 무장경력을 동원해 쓰촨성의 무장경력과 대치하기도 했다.
태자당과 상하이방, 공산주의청년단 등 당내 주요 계파들이 2012년 당대회를 앞두고 자기 사람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집어넣으려 경쟁을 벌이던 와중에 벌어진 이 사건은 정국을 시계제로의 상태로 몰고 갔다.
…
보시라이는 지난해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이 유력시됐던 인물이다. 35살에 다롄(大連)시 부시장에 임명된 뒤 다롄시장과 랴오닝성 성장, 상무부장 등을 거쳐 2007년 수뇌부인 정치국에 진입했다. 특히 충칭시 당서기를 지내면서 ‘범죄와의 전쟁’, 혁명가요 부르기 캠페인, 분배정책 등을 전개하며 신좌파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중국 안팎에서는 보시라이 사법처리는 당내 권력투쟁의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의혹이 무성했다.
─ 연합뉴스 「‘처절한 몰락’으로 끝난 보시라이사건 전말」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보 전 서기 ‘자금줄’로 통하던 쉬밍(徐明·당시 44) 회장이 2015년 12월 4일 수감 중이던 교도소에서 심근경색으로 숨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쉬 회장은 보 전 서기 가족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2013년 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입을 막으려고 고위층이 살인을 사주한 것 아닌가“라는 의혹이 일었습니다. 쉬 회장이 이끌던 회사가 바로 스더 그룹이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후원자를 모두 잃은 프로 스포츠팀이 온전할 수 있을까요? 스더 그룹 주가가 떨어지면서 다롄 스더 역시 경영난을 겪게 됐습니다. 그리고 2012년 11월 3일 시즌 최종전을 마지막으로 리그 최다(8회) 우승 기록을 자랑하던 다롄 스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또 겪으면서 하오하이둥은 현재 중국 국가 시스템에 회의가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는 하오하이둥의 이번 주장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관영 매체 티탄스포츠(體壇周報)에서 “저의를 가진 정치 세력이 스포츠 스타를 조종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오하이둥이 인터넷 공간에서 사라지면서 이제는 이 논평도 우주 공간 저 멀리 사라진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