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한 번에 울컥하는 흔한 40대
느지막히 일어나 투표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있나, 투표들은 잘 했나, 궁금해서 페북을 열었다. 담벼락에 인증샷을 올려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재작년 대선도, 그전 총선도 그랬듯이, 다소 상기된 얼굴들로 조금은 희망에 차서 소풍가기 전날의 국민학생의 얼굴들을 하고서.
근데 이번 지방선거는 뭔가 확실히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은 설명하지 못하겠는데, 투표장에 걸어가는 나의 발걸음의 묘한 무거움이나, 사람으로 북적이는 투표소내의 어떤 적막함… 신혼부부로 보이는 손잡고 온 커플도 가끔 눈을 마주칠 때를 제외하곤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다들 되새김질하는 초식동물처럼 머릿속에 무언가를 되새김질하듯이 묵묵히 투표소에 줄을 서 있었다.
이런 위화감을 떨치지 못하고 투표용지를 받아서 꾹꾹꾹 도장을 찍었다. 다시 용지를 받아 들고 도장을 찍고… 아, 참 손등에도 한 장 찍어야지… 하고 손등에 도장을 누르고 나왔다.
그런데 왜인지 자세히는 설명 못하겠는데 명치께부터 주먹만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와 울컥해졌다. 보통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 않나? 덤덤한 마음에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기묘한 부조화가 난감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이 참 맑았다. 이틀 비가 왔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기억에 선명할 만큼 맑은 하늘이었다.
한때 축제였던, 이제는 생존게임이 되어버린 민주주의
회사로 걸어오면서 손등을 봤다. 투표한지 이십 분이 지났는데도 손등에 찍은 대롱의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한 순간에 이 모든 위화감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랐다.
87년 중1때 대통령 직선제가 된 탓인지, 내가 투표라는 것을 인식할 나이가 되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에게 투표는 곧 축제였다.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민주주의의 꽃이 마치 상상 속의 과일이었던 바나나처럼 눈앞에 있었다.
노태우 유세차량 앞에서 노태우가 좋다며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보통 아줌마의 해맑은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넌 누구 뽑을 거야?”, “누가 좋아?” 하고 웃으며 묻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뽑는다 해도 “아하” 하고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마치 난 두산을 좋아하는데 넌 넥센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저마다 그리는 좋은 미래를 위해 그다지 소중할 것도 없는 한 표를 소중하다 생각하며 스스로 자그마한 축제들을 소소하게 벌여 왔다. 운동회의 400미터 계주선수들이 모든 영예를 가져갈 것을 알면서도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초등학교 3학년생처럼.
그런데 조금씩 그게 아니라는걸 깨달아 버렸다. 더 이상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게 누구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짜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그런 기운을 감지했다.
너네 반이 이기건, 우리 반이 이기건, 도장 찍힌 공책 몇 권과 연필 몇 자루 받는 그런 운동회가 아니라, 진 놈은 평생 화장실청소나 하며 살아가는 그런 생존의 게임이 되어 있었다.
냉정하지만, 그랬기에 여전히 소중한 민주주의
축제의 시절은 갔다. 한번 만난 적도 없는 민주주의를 만났지만 영화 속 주인공과 실제 배우의 거리감만큼이나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냉정했다.
그래서 다들 조용히 숨죽이고 조용히 투표를 한 것 같다. 말 없이 꾸욱 꾸욱… 그렇게 의식한 건 아니었지만 행여 약하게 찍어 잉크가 흐리게 묻어나오면 어쩌나, 그래서 한번 더 찍었다가 무효표라도 되면 어쩌나…
“여러분의 한 표는 소중합니다”라는 도식적인 문장. “열차가 도착하오니 안전선 밖으로 한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만큼의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이 문장의 의미를 비로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투표 부스에서 투표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찬찬히 봤다. 어깨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기표구를 누르고 있었다. 체중을 실어 기표구를 누르는 것이다. 마치 흐리게 나오지 말아달라는 듯이, 각자 자신의 한 표의 무게를 확인하듯이. 모두의 등이 말하고 있었다. 나의 한표는 소중하다, 고.
페북에서, 또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증샷이 올라왔다. 예전만큼 많지 않지만, 그래도 올린 사진들을 보면 하나같이 빨간 기호 주위로 선명하게 대롱의 자국이 보인다. 기표소에서 힘주어 누른 그대로 손등에 누른 것이었다.
나의 조그마한 축제는 끝났다. 어떤 희망도 없고 떨림도 없다. 그냥 나에게는 청소하고 설거지 하듯이 해야 할 일들일 뿐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뭉클해지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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