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적 거리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3월 중순부터 엄마는 가게 문을 닫았다. 엄마는 그냥 별볼일 없는 자영업자였다. 통계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뉴스는 ‘재난이 사회적 취약층을 먼저 덮쳤다’고 말했다.
엄마는 5월까지 쭉 영업을 쉬었다. 모두가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자영업자는 더하다. 수입이 0원이 아니라 마이너스가 된다. 가게세 등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이 2~300정도 되었다. 여기에 생활비를 더하면 매월 500씩 빠져나갔다. 코로나 때문에 벌지 못하는 돈은 별개로 쳐도 두달 동안 거의 천만원 가까이 까먹은 셈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재난이라서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2.
정부는 뒤늦게 대책을 냈다. 수익이 감소한 소상공인에게 긴급 금융지원을 1000만원씩 해주기로 했다. 신청을 열자마자 자영업자들이 줄을 길게 선 모습이 뉴스에 비쳤다. 지자체별로 세금을 감면해주거나 긴급 생활자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상에서 엄마는 빠졌다. 내가 봤을때 별볼일 없는 자영업자였던 엄마는 나라의 입장에서는 유흥업에 종사하는 ‘지원이 불필요한 자영업자’였다. 엄마는 술파는 노래방을 했다.
있는대로 엄마에게 돈을 부쳐주었다. 별 도움은 안되겠지만 심리적 위안이라도 삼으라는 생각이었다. 엄마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5월이 되고 드디어 가게문을 열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가 퍼지고 그게 노래방까지 확산되자 엄마는 또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정부가 집합금지 명령을 내린 업종에 엄마의 가게가 포함되었다. 기약은 없었다. 엄마는 문을 닫은지 석 달 여가 되어간다. 마이너스 통장은 이제 한도가 거의 다 찼다.
3.
며칠 전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하는 내내 전화기에 대고 정부 욕을 했다. 진짜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수입도 없고 빚만 늘어가는데 세금은 내야 한단다. 종소세, 부가세 등등 각종 세금 납부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엄마가 낼 세금은 2019년 소득 기준인데 당장 2020년에 번 게 없는데 어떻게 내냐는 거였다. 대출도 새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정부지원 대출은 커녕 일반대출조차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가게는 가게대로 문을 못열게 하면서 유흥업이라고 아무런 지원도 안해주면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였다.
엄마는 재난지원금도 싫다고 하셨다. 자기는 정말 죽을 것 같은데 왜 공무원이나 군인들처럼 먹고 살 만한 사람들에게도 돈을 다 주냐며 못마땅해 했다. 그깟 40만원으로 가게세도 못내는 데 뭘 하겠냐는 거다. 있는 사람들은 소고기 사먹고 와인을 쟁여놓는다는데 엄마는 지금 당장 세금부터 걱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재난지원금으로 소상공인 숨통이 조금 트였다는 보도가 났지만 그 돈도 유흥업과는 무관한 돈이었다. 생존의 기로에 선 엄마한테 차마 재난지원금의 유익성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왜 엄마가 유흥업소를 했냐고 물으면 사연은 있다. 우리집은 정말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제한적이다. 엄마는 식당일과 공장일, 남의 집 살림을 대신해주는 일을 전전하다가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 내가 대학 들어갈 나이가 된 뒤에 나라에서 들어오던 30만원의 생활지원금은 끊겼다. 나는 그걸 그때 그렇게 해석했다. 나라는 나에게 대학같은거 꿈도 꾸지 말고 돈이나 벌라고. 이렇게 해서는 애 둘을 대학보낼 수 없단 걸 깨달은 엄마는 업종을 바꾸었다.
유흥업이란 걸 나라에서 장려할 필요는 없단 걸 알고 있다. 재난지원금에 유흥업이 포함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한다. 하지만 엄마도 그렇게 일을 하게 된 사정이란 게 있었고 또 누군가도 사정이란 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모두 재난에 직면한 사람들이란 거다. 재난은 공평할지 모르지만 그 피해는 불공평하다. 선한 일을 해야만 재난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건 종교의 가르침이지 국가가 가야 할 방향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