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대가 가장 기피하는 인간 유형이 있다면 ‘답정너’일 것이다. 답정너는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인데, 그런 태도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오직 긍정적인 피드백만 바라며 자기가 쓴 글이나 작품을 보여주는 사람, 잘생겼거나 예쁘다는 대답만을 바라며 자기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 내가 잘못되지 않고 옳다는 대답만을 바라며 질문하는 사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태도는 일종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으로 질문하기보다는 그저 눈치 빠르게 내 기분을 맞춰주고, 내가 맞다고 말해달라는 응석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일이야 그런 식의 응석, 자기 자랑, 자기 확신을 얻고 싶은 때도 있기 마련이니, 친한 사이라면 몇 번이면 받아줄 법도 하다. 그러나 대화나 질문이 항상 그런 식이라면, 당연히 듣는 입장에서는 짜증도 날 법하고, 때론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 답정너가 비난받는 방식을 보면, 대개 이들은 고도의 합리화를 끊임없이 해나가고, 그런 자기 합리화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룬다. 비윤리적인 짓을 저질렀는데 괜찮지 않느냐면서 계속해 말을 늘어놓는다든지, 내가 생각할 땐 이게 맞는 것 같은데 다들 아니라면서 비판을 하지만 사실 내가 맞지 않느냐라든지, 대개 답정너들은 상식과 어긋나는 자기 고집을 가진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상식의 배반자들이자 불통의 아이콘들이고, 요즘 세대는 그들에 대한 비난 의식이 무척 극에 달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근래 세대가 소통의 의미에 대해 꽤나 예민한 것도 큰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맥락에서, 젊은 세대가 가장 혐오하는 것 중 하나가 ‘꼰대’이고, 꼰대는 불통의 상징이라고도 할 법하다. 답정너 또한 어찌 보면 소통할 의지가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이고, 답답하게도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만을 추구하고, 진정으로 타인과 소통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들은 자기 안에 철저히 갇혀 있길 바라고, 타인에 대한 질문, 타인과의 대화도 그저 그런 자기 세계를 강화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려고 하는 이들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답정너’라는 존재에 대한 감각이 그 자체로 상당히 가치 있는 감수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답정너가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문제라는 것, 나아가 진정한 소통과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들 세대는 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것이 ‘상식에서 어긋나는 이들에 대한 공격 의식’이자 ‘집단적 상식과 선입관에 대한 수호 의지’의 현상 같은 식으로 비판할 만한 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로 불통의 폭력에 대한 저항 의식,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진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세대적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런 감각의 발달에는 연결과 소통, 관계에 무척 다방면으로 열려 있고 예민한 세대적 특성이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상명하복과 갑을관계, 위계질서의 소통구조에 익숙했던 과거와 달리, 수평적인 인터넷 소통 관계 등은 확실히 소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켰을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온통 혐오적인 발언, 집단적 비난 같은 폭력적 소통 방식에만 익숙하다는 식의 인상이 결코 전부는 아닌 셈이다. 여기에는 분명 더 좋은 세상을 맞이할 만한 씨앗 같은 감각들도 있으리라고 믿어본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