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미 있는 토론을 위해서는 용어 정의를 합의하자’는 지당한 명제는, 사실은 꽤 험난한 관문을 열어제끼는 것인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약간만 진지한 사회적 고민으로 들어가면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념적’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다. 좌파 우파 보수 진보, 무척 지멋대로 쓰이는 호칭이면서도 어째서인지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규정이다.
생각난 김에 좌파우파라고 할 때 무슨 의미가 되는지 약간의 교통정리(움파룸파족을 떠올리신 당신은 센스쟁이). 좌파는 빨갱이 우파는 꼴통 뭐 그런거 말고 약간 좀 근본적인 이야기들인데, 얼추 대학 신입생 교양강좌용 강의노트 같은 느낌으로 읽기를 권장.
Q1. 좌파 우파 헷갈려 죽겠다. 도대체 뭐냐 그게?
A1. 혁명기 프랑스의 자코뱅당 어쩌고 그런 세계사 수업은 대충 건너뛰자. 기본적으로 좌우 구분은 기존 체제에 대한 입장에서 시작한다. 물론 여러가지 기준이 있고 혼란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동력이 되어준다는 측면에서 ‘nature vs nurture’에 대한 입장을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우선 좌파는, 사회적 힘을 통해서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있다. 덕분에 종종 개인의 각성과 변화에 대한 (종종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긍정적 시선을 보내며, 규제와 진흥을 통해서 인과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전제를 하곤 한다. 그에 비해서 우파는 의도적 변화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따라서 여하튼 굴러가고는 있는 현 체제에서 무언가를 해보자는 발상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사실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좌파적 성향을 지니는 것은 거의 직업병인 셈인데 – 사회의 힘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 분야를 공부할 이유조차 없으니까 – 동시에 공부할수록 그게 얼마나 단순하지 않은지를 알기 때문에 변화의 정도와 방식에 있어서 신중해진다(종종 그 과정에서 회색분자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다만 성향이라는 것은 현실을 모델링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에 포함되는 세부 내용들은 종종 바뀐다. 프랑스 혁명기의 자유평등박애 좌파들이 히피 미국의 생태주의 좌파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하튼 액면가로 놓고 보면 좌파는 자꾸 사회적 힘으로 뭔가를 하자는 쪽, 우파는 너무 건드리지 말자는 쪽으로 간다. 반면 좌파는 쓸만한데 자꾸 버리는 것, 우파는 버려야할만한데 자꾸 껴안고 버티는 것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진보가 좌파적 입장과, 보수가 우파적 입장과 종종 연동되는 것은 사실 꽤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두 기준이 항상 일치한다는 보장은 물론 없으며, 내역이 자꾸 바뀌기 때문에 일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아가, 좌파/우파는(그리고 뒤에 나올 진보/보수도) 종족특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파 성향의 정당 안에서 좌파 우파가 나누어진다든지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Q2. 그런데 그렇게 깔끔하게 나누기에는 좌파/우파라고 해놓고 전혀 이상한 짓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A2. 좌파-우파 같은 범주를 부여하는 것이 무척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많은 경우 사람들이 기본 전제를 잘못 이해하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많은 세상 속 사안에 대해서, 각 사안별로 취하는 입장들이 있다. 이런 입장들은 가족의 양육, 학교의 교육, 일부는 생물학적 요인 등 여러 변인에 의해서 형성되는데, 가능성의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그런 사안별 입장으로부터 어떤 러프한 방향성을 종합해내는 것이 바로 가치관이고 성향이다. 즉 하나의 통일된 이념으로부터 모든 것에 대한 생활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판단의 총합으로서 성향을 유추한다는 말이다. 멀리서보면 빨간색으로 보이는 모자이크도, 가까이서 보면 많은 색들이 섞여있을 수 있듯이. 물론 ‘이념’을 통해서 학습한 것으로 생활의 방향을 보강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순환적 과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념은 사회적 ‘모델링’이고, 모든 모델들이 그렇듯 단순화와 실제 이상의 논리성을 부여하면서 만들어진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쓸모 있는 것이다). A라고 경계선을 지어서 그 안에 모든 것을 밀어넣은 것이 아니라, 흩어져있는 것들 중 특정한 클러스터를 묘사하기 위해 A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식이다.
좀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좌파이기 때문에 모든 사안에서 A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내가 많은 사안들에서 A한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기에 편의상 좌파로 분류될 수 있다, 정도가 합당하다. 비유하자면 혈액형별 성격유형보다는 MBTI 테스트 쪽에 가깝다고나. 하지만 그런 상향식 범주화는 단순하고 선명하지 않은 만큼 사람들이 싫어한다.
Q3. 뭔가 점점 복잡해지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럼 진보 보수는 또 뭐냐?
A3. 진보 보수 구분은 심지어 좌우 구분보다도 더 애매하게 쓰여온 성향 구분이다. 왜냐하면, 사회변혁의 방향성과 변화의 속도가 같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무척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아직 겪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이론적 이상향에 의해 판단할 때 더 나을 것이라 사료되는 어떤 사회로 가자는 방향성을 ‘전진방향’, 이전에 있던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후진방향’으로 가정해 보자.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열망이 있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무언가를 지향하고, 변화에 문제가 있어보이거나 단순히 변화하는 것 자체가 피곤해서 자신들이 더 편했던 어떤 상황으로 되돌리고 싶다면 이전에 있던 것으로 돌아가고 싶다.
다른 척도인 변화의 속도를 이해하려면, 러프하게 말해서 조그셔틀을 생각해보자. ‘진보‘는 2배속 플레이, ‘혁명‘은 앞으로 빨리감기 정도에 비유할 수 있다. ‘수구‘는 2배속 뒤로 플레이, ‘반동(실생활에서는 ‘수구’로 부르곤 한다)’은 빨리 되감기 정도다. 여기에 비해서 ‘보수‘라는 말은 좀 더 미묘한데, 보수는 ‘쪼끔씩만 움직인다‘ 의 틀로 설명된다. 그 안에서 합리적 보수는 0.5배속 앞으로 플레이, 꼴보수는 0.5배속 뒤로 플레이 쯤이 되어준다.
그런데 문제는 뒤로 가는 꼴보수가(혹은 심지어는 수구, 나아가 자기가 수구라는 것조차 모르는 단순한 머저리들이) 종종 스스로를 앞으로 가는 합리적 보수라고 개구라를 치곤 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로 보자면 ‘합리적 보수’와 ‘진보’ 사이에 있는 어디쯤인가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발전의 방향과 페이스일터. 기계적 중립이나 정지상태가 아니라, 여하튼 발전을 하고 싶다면 그 정도라는 말이다.
그럼 또 흔히 이야기되는 ‘개혁‘은 또 뭔가. 개혁이란 말은 나야말로 궁극의 딱 맞는 1배속 플레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때 종종 쓰는 용어다. 하지만 실상 어느 방향으로든지 간에(!) 뭔가 홱홱 바꾸는 행위 자체만 있으면 흔히들 개혁을 자처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헷갈리게 만들기 쉽다… 에에 여튼 이 이야기의 교훈은, 속도와 방향 두가지를 같이 봐야한다는 것.
Q4. 개념설명은 그냥 건너가고, 그래서 진보좌파는 뭘 주장하고 보수우파는 뭘 주장한다는거냐?
A4. 벌써 대립항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보이지? 같은 속도 다른 방향을 놓고 볼 때 진보의 반대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방향은 어떻든 변화의 속도에 초점을 맞출 때 진보와 보수는 대립항이 될 수 있지만, 그것도 사회발전을 전제로 하는 합리적 보수인 경우여야 한다. 게다가 사안별로 다르기도 해서, 개인적 좌우와 경제적 좌우를 합쳐서 2차원으로 나타내는 것이 옳다는 이론도 있다(‘놀런 차트’).
여튼 2000년대 한국의 보편적인 정치지형도라는 시공간적 맥락에 고정시켜놓고 볼 때, 좌파는 경제적 분배 정책, 노동권 보장, 개인의 각종 자유권 옹호 등에 초점을 맞추고, 우파는 성장 정책, 사회 질서, 자유 무역, 역사적 정통성 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 같은 개념에 있어서는 좌우 모두 좀 뒤섞여 있고, 북한에 대한 시각까지 개입되면 이성적인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해진다.
특히 구분이 난감해지는 것의 최고봉은 바로 ‘자유’라는 개념인데, 다음 문답으로 패쓰. 사실 양 방향 모두 나름대로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지지자를 지니는 것인 만큼, 좌든 우든 얼마나 정밀하고 합리적인 입장인가는 바로 자기 반대 방향 진영이 초점을 맞추는 요소들의 필요성을 얼마나 덜 무시하는가에 달려있다. 물론 “나는 나라에 대한 자긍심 너는 비루한 자학사관” 운운하는 식의 천박함은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지만.
Q5. 그러고보니 너도나도 자유라는데, 이상하다. 미국 자유주의는 좌파인데 한국 자유주의는 극우인가? 신자유주의는 또 어째서 ‘신’까지 붙었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A5. 우선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자유’라는 말이 너무 간지가 새끈해서 그렇다… 너도나도 유용하게 써먹고 싶어지지 않나. 하지만 ‘무엇의 자유’인가가 구분의 핵심이다. 얼추 영미권 전통으로만 먼저 설명해보자면 이런 식이다: 원래의 ‘자유주의’는 순수하게, 정부는 개입하지마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는 소위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한다. 왕정에 저항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던 당시에는, 무려 이것이 ‘좌파’였다.
그게 좀 더 극단적으로 가서 절대 개입하지마의 자유지상주의, 즉 ‘리버테리아니즘‘까지 갔다. 그런데 여러모로 시행착오를 겪은 후, 사회적으로는 경제 등에 있어서 다소간 개입을 해서 판을 짜주지만 윤리 도덕 문화에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가자고 입장을 정리한 ‘리베럴‘ 입장이 나왔다(미국의 경우 이것이 ‘좌파’적 입장이다… 그런 상황을 2-30년대부터 전통을 가꿔온 ‘진보’ 진영에서는 가끔 고깝게 생각하지만).
그런데 경제부문에서 고전적 자유주의 내지 사실상 리버테리아니즘에 가까운 일련의 논리들을 다시 새 시대의 환경에 맞추어 개조해서 들고온 이들이 네오리베럴 즉 신자유주의라는 딱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은 리베럴에게는 방종과 국가통제의 이미지를 씌워주어 차별화를 시도하고 말이다. 즉 너도나도 자유를 찾고(자꾸 듣다보면 원조국밥집, 진짜원조국밥집, 새원조국밥집 뭐 그런 느낌도 든다) 이름에 집어 넣는데 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골 때리는 과정이 약간 더 있는데, 바로 공산독재에 대한 반정립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해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반공 지상의 와중에서도 진짜 이념적 사회적 지향으로서의 공산주의도 아니라 그저 현존하는 북한체제에 대한 반대였다. 그러다 보니 자유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특별히 사회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에 대한 전체주의적 충성 같은 것에 별다른 거부감도 없고… 즉 자유에 대한 특별한 합의도 뭣도 없이 이름만 깔쌈하게 자유주의로 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미권의 네오리베럴 사상을 들여오면서 그걸 기존의 반공자유주의에 접목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냥 리베럴도 한국말로 번역할때도 또 자유주의라고 써먹곤 하다보니 이거 일대 혼란이다. 뭐, 원래부터 헷갈리라고 이런 식으로 용어들을 만들어 온 것이기는 하지만.
여튼 좀 요약하자면, 어휘의 가치 덕분에 여러 성향에서 자유라는 말을 붙이지만, 본질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을 추구하기 십상이다. 혹은 내용적 맥락 없이는 큰 의미 없는 용어라는 말이기도 하다. 워낙 다들 많이 쓰고 있으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결국 뭐 맥락에 따라서,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면서 잘 알아들어야 할 수 밖에.
Q6. 결국 이번 문답도 딱 이거다 해답을 안내려줘서, 나한테 도움된 것이 없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쩌자는거냐.
A6. 뭐 몇 가지로 압축하자면 이런 거다.
1) 우선, 좌파 우파, 진보 보수 그런 범주로 상대를 욕하기 위해 규정할 때는 최소한 10초만 더 생각하자. 아마도 당신이 욕하고 싶은 그 분은, 우파라서가 아니라 단지 사리사욕이 무엇보다 강한데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고 멍청해서 사고를 친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혹은 좌파라서가 아니라, 사이비 숭배심에 빠지고 현실개념이 저능해서 삽짓을 하고 있는 것일터. “우파/좌파라서 그래”라고 하는 순간, 구체적인 문제 해결책에 대한 궁리는 5083.38km쯤 멀어진다.
2) 내 정체성이 좌파/우파이기 때문에 상대 ‘진영’을 비웃는다는 것은 좀 웃기는 이야기다. 본래 남의 말 콧등으로도 안듣고 고집 피우기는 극우/수구의 전유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좌파라도 도그마에 빠지면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머저리들은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할 지능이 없고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우익화되기 쉽다고는 하지만, 머저리가 유사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좌파지망생이 되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다.
양비론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언제라도 꼴통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는 합리적 좌파는 우파의 문제의식들을 오롯이 안아줘야 하며, 변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 합리적 우파는 좌파의 방향성과 에너지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중립’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면서 유연하게 흡수하라는 이야기다. 그게 안되는 사람은 아무리 똑똑한 척 하고 나름대로 자료들을 트럭으로 퍼오곤 하더라도 여전히 찌질한 민폐다.
3) 진짜 필요한 것은 선명성도 기계적 중립도 아니라 바로 사안별 정밀함이다. 이 사안에서는 누가/무엇이 얼만큼 피해를 보고 누가/무엇이 얼만큼 이득을 보는가? 소요되는 사회적/금전적 재원은? 다른 정책이나 사회적 규범과의 영향관계는? 지속성은? 이념적 성향은 판단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결정타가 되어주기에는 보통은 너무나 고려할 변인들이 많다.
!@#… 한 줄 요약: 좌빨우꼴 낙인말고 개념질을 대접하세.
PS. 더 자세히 관심 기울이시고 싶으신 분들은… 촘스키든 레이코프든 기든스든 고전 이론가들이든 뭐든 알아서들 공부하시길. 자료야 너무 많아서 문제지, 결코 부족함이 없을겁니…;;;
원문: capcold님의 블로그님
louis vuitton online shopGreat Opportunity for Lingerie Deal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