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사망 이후 전두환과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등 유신잔당 퇴진’을 결의하고 거리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5월 14일 전남대와 전남도청 일대 등 광주에서도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으로 계엄령을 확대했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계엄군의 진압은 ‘학살’이라고도 말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계엄군은 나이와 성별, 시위 가담 여부를 가리지 않고 광주 시민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1980년 5월, 첫 희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
김경철 씨는 어려서 뇌막염을 앓아 청력을 잃은 장애인이었습니다. 김경철 씨는 같은 청각장애인이자 친구였던 황종호, 박인갑 씨와 함께 광주 시내 다방이나 가게를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거나 수리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제화공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오후에도 세 사람은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일감을 찾았습니다. 충장로 부근을 지나던 세 사람은 시민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을 목격합니다.
친구들은 도망쳤지만 듣지 못하는 김경철 씨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잡혀 곤봉으로 뒤통수 등에 매질을 당합니다. 김경철 씨는 장애인증을 보이며 손짓발짓으로 자신이 청각장애인임을 밝혔지만, 오히려 벙어리 흉내를 낸다며 더 심하게 구타를 당합니다. 겁에 질려 몸을 피했던 황종호, 박인갑 씨도 계엄군에게 붙잡혀 소총 개머리판으로 맞고 군홧발로 짓밟혔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김경철 씨를 적십자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동 중에도 말을 하라며 구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가 19일 새벽 3시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검시 보고서에 나온 사망 원인은 구타
광주지검과 군 당국이 합동으로 작성한 김경철 씨의 사망자 검시서를 보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후두부 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입니다. 검시 내용을 자세히 보면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좌안상검부 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검시 보고서만 봐도 김 씨는 뒤통수와 왼쪽 눈, 오른팔과 왼쪽 어깨, 허벅지와 엉덩이가 깨지고 부서지고 으깨지는 등 온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는 “사인을 타박사로 맞아서 죽었다고 쓸 정도로 심했다”라고 밝혔습니다.
5·18 첫 사망자가 경찰? 왜곡된 주장들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침투해 소요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극우 단체들은 첫 사망자가 김경철 씨가 아닌 경찰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경찰관 4명은 5월 20일 시대위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사망했고, 김경철 씨는 19일 새벽 3시 사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김경철 씨 사망 후 다음 날에 경찰관들이 숨졌습니다.
蔡검사=공수부대원들이 그날 금남로에서 시위를 해산하며 강경 진압을 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周피고인=19일 밤에 들었습니다.
1996년 12,12와 5·18 관련 7차 공판에서도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김경철 씨가 최초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19일 밤에 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극우 단체들이 경찰관들을 광주 첫 사망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계엄군의 발포와 폭력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자위권 차원에서 어쩔 수 없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합니다.
김경철 씨의 국립 5·18민주묘지 묘역번호는 1-1입니다. 김경철 씨는 1980년 5월 18일 딸 김혜정 씨의 백일잔치 가족 모임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원문: 아이엠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