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종업계 사람들이 모이는 대나무 숲 같은 가상공간이 있다. 익명으로 이 바닥에서 밥벌이하며 사는 삶에 대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때로는 위로와 응원을 주고받는 곳이다. 어느 날, 그곳에 푸념 섞인 글 하나가 올라왔다.
현장에 블로퍼(Bloafer) 신고 왔다고 선배한테 한 소리 들었어요. 참나 하이힐을 신은 것도 아니고… 현장에 블로퍼 신고 오지 말란 법 있나요?
줄줄이 이어진 댓글은 다양한 맛의 이야기가 오갔다. 번잡스러운 현장에서 자칫 걸려 넘어질까 걱정된 마음에 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순한 맛부터 신발 신는 자유까지 빼앗는 꼰대 선배를 규탄하는 불닭맛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댓글들을 지켜보다 궁금증이 차올랐다. 만약 후배가 블로퍼를 신고 현장에 나타났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
그전에, 먼저 현장이란 곳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장이란 어떤 곳인가? 사무실에서처럼 조용히 앉아 노트북 키보드만 두드릴 수는 없는 곳이다. 고고한 백조가 아닌 부지런한 꿀벌의 자세가 제1덕목이다. 무엇보다 현장은 언제 어디서 ‘변수’라는 폭탄이 뻥뻥 터질지 모르는 곳이다. 머리는 현명한 판단, 몸은 재빠른 대처가 필요한 장소다. 몸과 머리가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그야말로 ‘업무 능력이라는 꽃‘이 만개하는 곳이다.
어쩌면 단순히 현장에 블로퍼를 신고 온 게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평소 마음이 잘 통하고 트러블이 없는 관계라면 블로퍼든, 짚신이든, 나막신이든 상관 안 한다. 뭘 신든 맡은 일을 잘 해내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겨우 신발 ‘하나로’ 지적을 받았다는 건, 겨우 신발 ‘하나도’ 그냥 못 넘어갈 만큼 신뢰가 깨졌거나 관계가 악화됐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삐거덕거리는 관계는 상대에 대한 호감/비호감 차이가 만든 결과다. 후배의 어떤 선택이든 믿지 못하는 선배, 선배의 말이 뭐든 잔소리로 해석하는 후배. 이 관계의 끝이 어떨지는 굳이 세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시점에 대다수 상급자들의 뼈에 새겨진 성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가짐까지 추측해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그 성향 말이다.
언젠가 시험을 앞두고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나를 본 엄마가 버럭 화를 냈다.
얘! 라디오를 이렇게 크게 틀어 놓고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거야? 공부할 자세가 안 됐네. 안 됐어.
사춘기의 반항심 가득한 소녀는 엄마의 고루한 생각에 숨이 콱 막혔다. 대체 공부할 자세란 뭐지? 공부랑 라디오 소리 크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분명 라디오를 그리 크게 틀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엄마의 그 한 마디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렇게 부모님 세대에게 공부하는 곳이란 자고로 절간이나 독서실처럼 개미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곳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일정 수준의 백색 소음은 집중력 향상에 효과적이라는 현대의 과학적 분석은 납득할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가 겪은 ‘경험의 한계’에 갇혀 산다. 쉽게 깨지지도 않고 또 깰 생각도 없는 그 한계. 나이를 먹을수록 그 ‘경험의 한계’는 견고해진다.
흔히 ‘인생은 낄낄빠빠’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낄낄빠빠’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란 뜻의 줄임말. 삶은 때와 장소, 타이밍만 잘 파악해도 성공이라는 의미다. 블로퍼가 끼어야 할 장소가 있고 빠져야 할 장소가 있다. 스니커즈가 필요한 장소에 블로퍼는 분명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신발에 대해 고나리를 했던 선배는 후배가 현장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할지 그 마음가짐을 블로퍼 하나로 짐작했을지 모른다. 선배 본인 기준에 블로퍼는 현장에 어울리는 활동적인 신발은 아닌 것이다. 블로퍼를 신고도 러닝화를 신은 듯 100m 전력 질주를 할 수 있는 능력자라면야 모를까. 그런 능력자를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 상위 0.000001%의 능력자가 이 후배일 수도 있다.
후배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보란 듯이 블로퍼를 신고도 러닝화를 신은 듯 날렵한 몸놀림과 빠릿빠릿한 일처리로 고나리를 내뱉던 선배의 입을 다물게 한다. 둘째, 신발 선택의 자유까지 빼앗는 꼰대와 일을 하지 않는다. 정답은 없다. 어떤 선택을 하건 분명 당사자, 본인의 몫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