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마시는 집에서 끓인 보리차일까? 지방에 사는 큰언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투명한 유리병에 가득 담긴 보리차였다. 먼 길을 온 탓에 갈증이 났던 난 언니가 건넨 보리차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구수한 향이 코에 닿았고, 끝으로 갈수록 살짝 달달한 맛이 혀 끝에 스쳤다. 탄수화물과 수분의 콜라보 덕분일까? 갈증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고, 배도 든든해졌다.
가게를 운영하는 언니는 하루의 대부분을 가게에서 지낸다. 그래서 가게에 정수기를 놓고, 잠만 자는 집에선 추운 계절에는 직접 끓인 보리차, 더운 계절에는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사서 마신다고 했다. 굳이 두 개의 정수기가 필요 없는 싱글족의 합리적 선택이었다. 지난밤, 언니가 끓여 놓은 보리차를 마시니 보리차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몄다.
어쩌다 직접 끓인 보리차를 내주는 식당에 가면 왠지 손님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정수기 물을 내준다고 손님 대접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 컵의 보리차가 완성되기까지의 그 수고를 알기에 보리차 한 잔에서 손님을 생각하는 주인의 마음을 느낀다.
보리차는 버튼만 누르면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정수기와 차원이 다르다. 한 잔의 보리차가 탄생하기까지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 주전자에 가득 물을 담아 볶은 보리알을 넣고 팔팔 끓인다. 다시 그 물을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관리가 소홀하면 쉽게 상하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고, 남은 보리 찌꺼기를 거르고 치우는 일까지 마쳐야 비로소 ‘보리차’가 완성된다.
그해 여름, 보리차 한 잔 마시고 누워 하늘을 보았던
정수기도 생수도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보리차를 끓여 먹는 건 평범한 가정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여섯이나 되는 가족들이 먹을 보리차를 끓이려면 거의 내 몸통만 한 주전자가 출동해야 했다.
추운 겨울에는 보리차 한 주전자를 끓이는 것만으로도 난방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작은 집안을 후끈해졌다. 학교를 가기 전, 엄마는 갓 끓인 보리차를 두꺼운 컵에 담아 주셨다. 그 한 컵을 다 마셔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뜨거운 보리차 한잔을 호호 불어 마시면 금방 속이 뜨끈해졌다. 그 시절, 한 컵의 따끈한 보리차는 겨울바람을 뚫고 학교를 가야 했던 어린 딸, 아들에게 엄마가 건넨 ‘마시는 핫팩’이었다.
물을 많이 마시는 여름엔 보리차 지옥이 펼쳐지곤 했다. 보리차를 끓인 열기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보리차를 끓이는 악순환. 그냥 수돗물을 먹을 순 없었으니 보리차가 내뿜는 수증기로 한여름에 사우나를 하는 건 감수해야 했다.
하루 종일 땡볕 아래에서 뻘뻘 땀을 흘리며 놀다 지치면 그제야 텅 빈 집으로 향한다. 신발주머니를 내팽개치듯 던져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냉장고부터 연다. 그 안에는 주스병을 재활용한 두툼한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가 차갑게 잠자고 있다. 작은 단풍잎 같은 손으로 조심조심 보리차를 컵에 따른다. 보통 흘리는 게 반이다. 겨우 따른 시원한 보리차를 허겁지겁 마시고 나면 찬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는다. 오늘 하루, 잘 놀았다는 뿌듯함과 아직 내게는 해야 할 숙제가 있다는 압박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보리차와 거실 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뜨거웠던 내 몸을 어느 정도 식혀 주면 그제야 몸을 털고 일어나 숙제를 시작했다. 그 시절, 한 컵의 차가운 보리차는 놀이 모드의 몸과 마음을 공부 모드로 바꾸는 ‘스위치’였다.
집에 정수기가 들어온 후 다시 집에서 끓인 보리차를 먹는다는 건 별로 좋은 신호는 아니다. 배탈이나 장염 같은 속병이 생겼을 때, 의사 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생수 대신 미지근한 보리차로 꾸준히 수분을 보충해야 했다. 죽을 제외 하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보리차만 마시다 보면 이런저런 먹고 싶은 음식들이 떠오른다. 식탐이 많은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식을 먹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탈이 났다. 당연히 ‘보리차 복용 기간’도 재연장된다. 그때, 한 컵의 미지근한 보리차는 불안정한 몸과 마음의 불순물들을 쓸어내리는 ‘빗자루’였다.
살다 보면 ‘보리차가 필요한 날’이 온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사소한 것 하나로 상대방에게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언젠가 시끄럽고 분주한 현장에서 정신없이 준비를 하던 내 어깨를 누군가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니, 팀의 막내 K였다.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는 각양각색의 음료들이 가득했다. 더위에 지친 팀원들을 위해 클라이언트가 하사(?)한 법카로 K가 편의점에 가서 사 온 거라고 했다. K는 큰 봉지를 들고 팀원들 사이를 돌며 음료를 나눠주는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뭘 고를까 고민하는 내게 K는 보리차가 담긴 작은 페트병을 건네며 말했다.
이건 선배 꺼요! 탄산음료도, 에너지 음료도 안 드시잖아요.
일정이 빠듯해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회의실에서 피자 쪼가리로 끼니를 때울 때였을까? K는 탄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말을 흘려듣지 않았었나 보다. 사무실에서 밤샘을 하며 다들 차에 주유하듯 에너지 드링크를 입에 쏟아부을 때였을까? K는 선택지가 없어 에너지 드링크를 마다하고 물을 마시던 내 모습을 잊지 않았었나 보다.
그때, K가 건넨 편의점 보리차는 크고 대단한 힘이 아닌 작은 관심과 센스만으로도 상대방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만능 ‘열쇠’였다.
지금 고급 수입 생수부터 커피, 흑당 버블티, 생과일주스, 프로틴 음료 등등 색도 맛도 다른 다양한 마실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어디를 가던 보리차를 내주면 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마신다. 아무리 배가 차도, 이미 필요한 양의 물을 충분히 마셨어도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다. 보리차 한 잔에 담긴 크고 작은 마음들을 알기에 허투루 대할 수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종종 보리차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래서 마음이 헛헛하거나 또 주책없이 날뛸 때면 보리차가 생각난다. 텅 빈 나를 채워주고 또 들뜬 가라 앉혀 주던 수많은 보리차들. 그 기억이 있었기에 지금껏 무너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날들에도 분명 보리차가 필요한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럴 때 방황하지 말고,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직접 끓인 보리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의 위로와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의 여유로 나를 채우면 그 어떤 어려움도 보리차처럼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