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정도로 약을 많이 먹습니다. 2017년 기준 국민 한 명이 약에 지출한 비용은 약 57만 원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대중교통비 지출이 54만 원 정도니,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쓰는 교통비보다 약에 더 많은 돈을 쓴 셈입니다.
약을 먹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암과 같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이 만성질환 때문에, 생리통이나 알레르기 비염 같은 불편한 증상 때문에…. 과체중이나 탈모 같은 미용 목적으로도 약이 사용되니, 정말 다채로운 약을 다양한 이유로 먹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렇게나 많은 약을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이 어떻게 우리 몸에 작용하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입니다. 유명 음식점의 대표 메뉴에 대해서는 TV만 틀어도 세세한 정보를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직접 먹는 약에 대해서는 그런 정보를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주된 원인은 이렇습니다. 한 명의 의사 혹은 약사가 지나치게 많은 환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빨리 처방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환자는 빨리 약을 타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환자 입장에선 약을 하루에 세번씩 먹어야 하는 이유처럼 무척이나 기초적인 상식에 대해서도 알기가 힘듭니다.
이쯤에서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지금껏 그렇게 많은 약을 먹었는데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대체 왜 약은 하루에 세 번씩 먹는 걸까요?
닭장과 식탁 사이의 온도 차이
병아리를 부화시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란을 적절한 온도로 유지하는 과정입니다. 너무 차갑지도, 또 너무 뜨겁지도 않은 온도가 유지돼야 병아리가 태어날 수 있거든요. 계란이 너무 차가우면 계란을 병아리로 바꾸기 위한 물질대사가 중지되어 병아리가 될 수없고, 계란이 너무 뜨거우면 구운 계란이 되어 식탁 위로 올라가고 맙니다.
약을 하루에 세 번 먹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약을 먹는 목표인 ‘약효’는 약이 몸속에서 일정 농도 이상을 유지해야 나타나는데, 약의 농도가 너무 낮으면 약이 아무 효과를 내지 못하고, 또 약의 농도가 너무 높으면 계란이 익어 버리듯 우리 몸에도 약에 의한 독성이 나타나거든요.
우리가 약을 먹으면 위나 소장을 통해 혈액으로 약이 흡수되고, 곧 약효를 내기 위한 최소 농도인 최소 유효 농도(minimum effective concentration)에 도달합니다. 이 과정은 늦어도 30분 정도면 진행이 되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은 우리 몸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흡수는 빠르지만, 소실은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천천히 진행되죠.
그렇게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약의 농도는 최소 유효 농도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약효가 사라지게 되는 거죠. 약효가 쭉 지속되게 하려면 혈액 중 약의 농도가 최소 유효 농도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 반드시 다음 약을 먹어야만 합니다. 약을 세 번 먹으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약의 소실 속도가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약은 소실되는 속도가 빨라 하루에 네 번을 먹어야 약효가 지속되기도 하고, 또 어떤 약은 상대적으로 소실이 느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만 먹어도 약효가 유지될 수 있죠. 하루에 딱 한 번만 먹어도 약효가 하루 내내 유지되는 약도 있습니다.
감기 때문에 병원에 들러 약을 처방받으면, 점심 약이 아침 약이나 저녁 약보다 가짓수가 적은 경우를 자주 맞닥뜨렸을 겁니다. 특정 약은 아침에 먹은 약의 효과가 저녁까지 충분히 유지되기 때문에, 굳이 점심에 추가로 약을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물론 ‘졸린 약’을 일부러 빼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런가 하면 아침과 저녁 약은 같은데 점심 약만 다른 것도 약효 지속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약? 모르면 더 오래 아프다
보건 의료계에는 똑똑한 환자일수록 병이 잘 낫지 않는다는 재밌는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의사의 처방대로 우직하게 약을 먹는 환자들은 병이 빨리 낫는데, 증상이 좋아진 것 같으니 약을 마음대로 중단하거나 약 복용 횟수를 줄이는 헛똑똑이 환자들은 도리어 병이 더디게 회복된다는 뜻이죠.
앞서 약효 지속 시간에 대한 설명을 읽고,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침·점심·저녁에 약을 세 번 먹어 12시간의 약효를 볼 수 있다면, 아침·저녁에만 먹어도 2/3인 8시간의 약효는 볼 수 있지 않겠냐고요.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까 봤던 그래프를 세 번 겹쳐 봤습니다. 아침 약이 최소 유효농도 밑으로 내려갈 즈음 점심 약을 먹으니 농도가 다시 올라가고, 같은 일이 저녁에도 반복됩니다.
여기서 만약 점심 약을 거르고 아침 약과 저녁 약만 먹으면 어떨까요? 단순히 계산하면 약 복용량이 2/3로 줄었으니 약효 지속 시간도 2/3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침에 먹은 약의 농도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지면 약의 농도를 다시 최소 유효 농도로 올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만큼의 약이 허비거든요. 그래서 실제로는 계산치보다 훨씬 짧은 약효 지속 시간이 나타나는 겁니다.
끓인 물을 차갑게 식힌 다음 다시 끓이려면, 은근한 불로 데운 물을 끓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죠. 결과적으로 약효 지속 시간이 줄어들어, 정상적으로 약을 먹었을 때보다 빨리 병이 낫질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점심에 거른 약을 저녁 약과 같이 먹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아침, 점심을 걸렀다고 저녁에 세 끼를 한 번에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약의 농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약은 우리 몸에 ‘독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경미하게는 속이 쓰린 정도에서 그치지만, 심한 경우에는 의식을 잃거나 사망에 이를 수도 있죠. 약 먹을 시간을 놓쳤을 때는 그냥 다음 순서에 한 번만 복용해야 합니다. 놓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즉시 먹는 것이 좋지만요.
이런 이야기는 아마 처음 들으셨을 겁니다. 의사 혹은 약사 입장에서는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라 다들 알 것이라고 여기고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않은 탓입니다. 환자들은 매번 그렇게 약을 복용했으니 별로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을 테고요. 기초 중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내용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친절하고 겸손하게 여러분을 약의 세계로 인도할 가이드북,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입니다. 블로그로만 간접적으로 소개하던 약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묶어, 글로 풀어냈습니다. 구독자분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원문: 박한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