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김선달이 옳았다. 물은 사서 마시는 거였더라고”
어릴 적에 가장 좋아한 동화 중 하나는 ‘봉이 김선달’이었다. 낚시계의 거성인 그의 업적 중 최고는 역시 ‘대동강 물 사기사건’이었는데. 물을 파는 김선달이나, 물을 사서 가는 상인들의 상황이 웃겨서 한참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때는 몰랐거든. 내가 크면 물을 사서 마시게 될 것이란 사실을.
생수, 먹는 샘물 등으로 불리는 파는 물은 우리 일상의 곳곳에 함께 하고 있다. 향을 섞기도 하고, 탄산을 넣기도 하는 등 종류가 제법 다양해졌다. 이제는 수입맥주처럼 해외에서 온 물을 마시기도 한다.
오늘은 그 시초 중 하나인 탄산수 브랜드 ‘페리에(Perrier)’에 대한 이야기다. 그거 힙하고 (비싸서) 잘 나가는 거잖아…라고 물으면 함정. 이 멋진 브랜드에도 몇 번의 위기가 언제나 존재했거든.
페리에의 고향: 여기가 물 맛집이라며?
에비앙의 수원은 에비앙이지만, 페리에의 수원은 프랑스 남부지방 ‘베르제즈(Vergèze)’라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천연 탄산수가 나오는 곳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레부양(Les Bouillens)’이라고 불렀다. 레부양은 ‘끓는 물’이라는 의미인데 탄산이 보글보글 나오는 모습이 끓는 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에 석회가 섞이는 일이 많았던 유럽에서 ‘레부양’은 귀했다. 이곳은 로마와 스페인 사이의 길목이어서 많은 인싸… 아니 군사들이 지나가며 물을 마시는 곳이기도 했다. 기원전 218년 전 한니발(그는 로마군을 물리치고 레부양의 물로 축배를 들었다)부터 기원전 58년 줄리어스 시저(그는 레부양의 물로 목욕을 했다)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탄산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특히나 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치료용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1769년 그라니에(Granier) 가문이 레부양과 주변 영토를 매입했고, 1863년에는 나폴레옹 3세가 이곳의 온천수가 ‘미네랄워터’라고 인정을 하게 된다. 건강에 좋은 물로 인정받은 레부양은 무엇을 했을까? 그렇다! 바로 온천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사업이 성공해서 오늘날의 페리에가 된 것일까? 아니다. 온천을 개장하고 6년 뒤에 베르제즈 지역에는 큰 화재가 났다. 시설이고 뭐고 모두 손실이 되어서 1884년에 온천사업은 파산하고 만다.
페리에 박사, 생수를 팔 생각을 한다
에비앙은 수원의 이름을 땄지만, 페리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을 걸었다. 1898년 ‘루이 유진 페리에(Louis Eugène Perrier)’ 박사는 레부양을 인수한다. 온천의료치료 경험으로 탄산수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는 이곳을 인수하여 ‘베르제즈 건강음료 미네랄워터 회사’를 설립하기로 한다. 물론 돈만 있으면!
그러다가 재정지원을 해줄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근처에서 불어를 공부하고 있던 영국의 귀족 ‘존 함스워스(Sir John Harmsworth)’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마신 물이 영국의 물보다 가볍고, 나트륨 함량이 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존 함스워스는 스폰서 겸 동업자로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물의 이름을 ‘페리에(PERRIER®)’라고 짓는다. 맛이 없으면 책임은 당신 것이다… 는 장난이고 물과 이산화탄소의 최적의 비율로 조합한 페리에 박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1911년, 세계 최고의 탄산수 페리에(PERRIER)가 탄생한다.
프랑스의 물, 영국 왕실에 판매한다?
존 함스워스는 재정지원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페리에를 영국으로 진출시켜 많은 사랑을 받게 했다. 함스워스의 친구 중에는 ‘토마스 립톤(우리가 아는 그 립톤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 립톤은 페리에를 ‘에드워드 7세’에게 소개한다. 이후 페리에는 영국 왕실의 공식 물이 된다. 뒤이어 스페인 왕실에서도 페리에를 찾게 된다.
왕실과 귀족으로부터 인기를 끈 페리에는 영국 국민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온 굉장히 고고한 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존 함스워스는 페리에의 병 모양을 ‘인디언 곤봉’ 모양의 초록색 유리병으로 만들었는데. 이 독특한 디자인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페리에에게 2가지 사건이 연이어 터지게 된다. 1933년 존 함스워스가 세상을 떠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수원지와 공장을 빼앗긴 것이다. 두 번째 폐쇄야!
미국 진출: 흥행과 회수의 자이로드롭 체험기
전쟁이 끝났다. 본진을 잃고 가뭄처럼 사그라들던 페리에를 인수한 것은 ‘구스타브 르뱅(Gustave leven)’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전후에 생수의 필요성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페리에라는 브랜드로 세계에 진출할 요량이었다.
1973년 병 제조부터 생수를 담는 생산 과정을 완비하여 체계적으로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거기에 마케팅적 요소도 더했다. 구스타브 르뱅은 ‘페리에’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보다 더 세련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가꿨다. 그래서 페리에 광고는 동시대 다른 브랜드들 광고와 비교해도 뭔가 아트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대망의 1976,년 페리에는 뉴욕에 진출한다. 1988년쯤 되었을 때에는 이미 미국에 3억 병을 수출할 정도였다. 재미있는 건, (물을 팔긴 했지만) 유럽 쪽에서는 탄산수를 생활용품 정도로 생각했던 반면 미국에서는 ‘상품’이나 ‘브랜드’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는 페리에에 더욱 열광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의 충격도 커졌다. 벤젠 때문이다.
1990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연구실에서 페리에에서 ‘벤젠’ 성분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한다. 페리에 측에서는 벤젠을 따로 넣지 않는다며 부인하였지만, 탄산가스를 거르는 과정에서 소량 성분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량 리콜을 결정했다. 그 양이 1억 6천만 병이었다.
빠른 회수와 시스템을 고쳤지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르뱅은 그해 페리에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고, 생산량은 3분의 1로 줄었다. 그대로 망했버리는 것일까? 아니다. 2년 뒤 네슬레가 페리에를 인수했다.
아이코닉한 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
망해도 3번을 망했다. 그래도 페리에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이제는 단순히 갈증을 풀기 위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닌, 나를 드러내기 위해 마시는 시대가 되었다. 생수를 판매하는 측에서도 ‘약효’를 말하다가 이제는 ‘멋짐’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부침을 겪은 페리에는 이제 다양한 향(플레이버)을 넣기도 하고,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하기도 하는 등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실패 속에서도 브랜드를 지키면서 더 넓은 지평에 도전하는 것은 큰 자산이 된다. 오직 페리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도 좋은 생수나 탄산수가 있으니까. 한국에 페리에, 한국의 에비앙이 될 수 있는 맛있는 물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야고부] 페리에의 교훈, 서종철」, 매일신문, 2009.2.9
- 「무언가 특별한 것의 시작」 페리에, 2017.6.12
- 「페리에가 페리에로 명성을 떨치기 전의 이야기」 페리에, 2017.6.12
- 「THE HIGHS AND L’EAUS OF PERRIER」 let’s look again, 2017.7.18
- 「[고재윤의 Beverage Insight] 세계 10대 먹는 샘물 ‘페리에’」 고재윤, 월간호텔&’레스토랑, 2018.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