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겉옷이 거추장스러워진 계절이 왔다.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면 묵은 계절을 보내고 새 계절을 맞이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미뤄뒀던 일을 시작한다. 지난 계절, 나와 한 몸이 되어 추위와 칼바람을 막아주던 두툼한 옷들에게 잠시만 안녕을 고한다. 행거에 걸어둔 코트와 패딩 점퍼를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리곤 옷장 깊숙이 넣어 둔 박스 속 여름옷을 꺼낸다. 서랍 속의 겨울옷들을 꺼내 여름옷들과 배턴 터치를 시킨다. 늦은 봄과 늦은 가을이면 반복되는 연례행사, 옷장 정리를 할 때마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말이 있다.
어머? 이 옷이 여기 있었네.
오래된 유물을 발굴한 고고학자의 기분이 이럴까? 입으려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옷은 꼭 옷 정리를 할 때야 발견된다. 옷장을 뒤집고 탈탈 털어도 꼭꼭 숨어 있던 옷이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한때는 내가 그 옷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옷장 속에 사는 ‘옷의 요정‘이 먹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망갈 곳도, 훔쳐 갈 사람도 없는데 어쩜 흔적도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하듯 옷이 사라질까?
옷의 요정의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생각한 옷들은 매번 의외의 곳에서 나타난다. 보통은 비슷한 색깔의 옷과 옷 사이에 겹쳐 있거나, 아니면 손도 닿지 않은 서랍 끝 또는 옷장 구석에서 회색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기도 한다. 가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토닥이는 부모의 손길로 옷 먼지를 탈탈 털어 접으며 생각한다. 그래 다시 돌아왔으면 된 거다. 또다시 옷의 요정이 잡아먹지 않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찾았으니 내년엔 더 자주 입으리라 다짐한다.
작년에는 대체 뭘 입고 산 거지?
옷장 정리를 할 때는 계절에 맞는 옷들을 꺼내고 집어넣는 것뿐 아니라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을 버리는 일도 동시에 진행한다. 헤지거나, 묘하게 색이 바래거나,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는 회생 불가한 옷들은 1차로 거른다. 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몇 년 동안 집어넣고 빼기만 반복했지만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은 과감히 재활용 봉투에 넣는다.
내 기준은 3년이다. 3년 동안 입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입을 일이 없다. 재활용 봉투에 넣는 순간, 오만 생각이 밀려온다. 갑자기 이 옷을 다시 입고 싶어지면 어쩌지? 엄마 말대로 아직 입을만한데 물건 귀한 줄 모르고 막 버리는 건 아닐까? 이렇게 저렇게 매치하면 그렇게 이상하진 않잖아?
하지만 미련을 덕지덕지 붙은 그 옷의 존재는 딱 반나절 후면 까맣게 잊는다. 마치 내 곁에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세상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내내 어두운 옷장 지옥 안에 갇혀 있던 옷들에 비로소 자유(?)가 허락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보통 옷의 1/5 정도가 정리된다. 마음의 짐처럼 남아 있던 묵은 옷이 사라지면 드디어 옷장에 숨통이 트인다.
와 이 옷도 벌써 N년 넘게 입었네.
최종에 최최종에 최최최종, ‘이게_레알_Final_최최최종’ 타이틀이 붙은 저장 파일 이름처럼 최후의 옷들만이 남는다. 세어 보면 작년에는 벗고 다녔나 싶을 정도로 몇 개 없다. 게다가 살아남은 옷들을 보면 새로 산 옷들보다 평균 5년 이상은 된 연식 있는 옷들이다.
오래된 옷들의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함’이다. 시간이 쌓여 묘하게 내 몸매에 맞춰 옷이 변형된 느낌이 있다. 또 어떻게 매치해 입을까 고민할 필요 없이 이 옷과 어울리는 몇 개의 착장이 머릿속에 박혀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손이 가는 옷들은 계절마다 시작되는 옷장 서바이벌에서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옷들은 대개 옷장에서 몇 년 묵히다 재활용 봉지로 직행한다.
몇 년이 넘도록 꾸준히 같은 옷을 입는다는 건 크게 체형이 바뀌지도 않았고, 취향은 더더욱 바뀌지 않은 덕이 가장 크다. 화려한 장식이나 패턴, 유행 타는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몇 년이고 두고 입을 수 있는 심플한 디자인에 탄탄한 소재로 만든 옷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옷을 만나기란 힘든 일이다. 마치 외모, 성격, 능력, 취향까지 꼭 맞는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새 옷을 산 게 언제였더라?
이 글을 쓰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마지막으로 새 옷을 산 게 언제였지? 1년 전, 여름을 앞두고 빛바래고 목 늘어난 티셔츠를 대신할 흰 면티 몇 장을 산 게 다였다. 청바지에도, 면바지에도, 리넨 바지에도, 스커트에도 또 추운 계절에는 이너로도 두루 입었던 심플한 흰 면티.
여름이 지나고 가을, 겨울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닳도록 입었다. 가끔 뜨거운 물에 푼 과탄산소다로 표백 샤워를 해주기도 했지만 시간의 흔적이 쌓인 묵은 사용감은 어쩔 수 없다. 한 계절에만 입는 옷이었다면 이미 5년은 족히 입은 횟수였을 테니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외출용 흰 면티는 1년 안에 홈웨어나 잠옷이 되고 만다.
큰맘 먹고 새로 옷을 사려고 온 오프라인을 이리저리 뒤져도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찾기 힘들다. 새 옷을 사고 꾸미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게 이미 피곤해진 나이다. 매 시즌 신상을 쏟아 내는 의류 업체의 주요 소비 타깃과 한참 멀어진 탓일까? 유행에 목매지도 않고, 지갑도 확확 열지 않는 나 같은 소극적 소비자를 위한 옷들을 갈수록 찾기 어렵다.
나름 꾸미는 일에 목숨을 걸던 시절에는 #신상 #잇템 타이틀이 붙으면 질도 가격도 보지 않고 카드 긁기 바빴다. 하지만 분명 유행도 다 안 끝났는데 몇 번 세탁하면 걸레 상태가 되는 허접한 옷들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후 옷에 붙은 태그부터 본다.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는지, 가격은 그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꼼꼼히 따진다.
1단계 ‘태그 테스트’를 통과하면 더 깐깐한 2단계 ‘착용 테스트’가 기다린다. 입어보고 내 몸의 상태와 어울리는지, 피부에 닿는 감촉은 어떤지도 파악한다. 그리고 매장을 나와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이 옷과 매치해서 입을 만한 옷들이 집 옷장에 있는지? 이 옷이 정말 내게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걸 통과해야 최종 관문 ‘결제’에 도달할 수 있다.
꾸미는 데 혈안이 되어있던 20대 시절에는 사는 건 쉬웠는데 버리는 건 어려웠다. 꾸미는 게 귀찮아진 지금은 버리는 건 쉬운데 사는 건 어렵다. 물건을 사는(Buy) 것도, 삶을 사는(Live) 것도 어렵다. ‘산다 ‘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내 삶에 없던 새로운 걸 들이기 위해서는 머무를 공간도 마련해 줘야 하고, 소외되지 않도록 관심도 가져줘야 하고, 상태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도 해줘야 한다.
반려 동식물처럼 살아 있는 생명을 들이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반려 무생물’에게도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그 책임감 때문에 사는 일뿐 아니라 새로운 물건을 집에 들이는 일,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에 점점 더 신중해지는지 모르겠다.
살아가는 한 난 분명 새로운 옷을 사고, 새 물건을 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오기 전에 망설이고, 떠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다. 옷도, 물건도, 관계도 다 때가 있다. 뭐든 시간이 지나면 빛바래게 마련이다. 함께 하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해 만끽하고, 미련 없이 보내줄 것이다. 그래야 또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수 있을 테니.
원문: 호사의 브런치